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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르는 교회와 자라는 교회 (마 21: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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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마 21 : 18 - 22
제 목 : 마르는 교회와 자라는 교회

저는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요즘에 느끼는 것은 세월이 참 빨리 흘러간다. 라는 것입니다.  덥다 덥다 했는데, 이제 무더운 여름도 한풀 꺾이고,  다 지나가지 않습니까?  벌써 8월도 지나고, 이제 가을을 알리는 9월을 우리가 맞이하고 있습니다.  젊은 제가 이런 감정을 느낀다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훨씬 더 실감하실 줄로 압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하는 말이 있지요?  “세월은 유수와도 같다.”  또,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한 해가 정말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어요.
돌아보면, 그저 정신없이 바쁘게만 보냈지, 처음에 소망했던 것 중에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도 없이 지나온 것 같애요.

올 한해를 시작할 때, 다들 소망하셨지요?  세상의 불신자들과 같이 막연한 행운을 바라는, 그런 허왕된 소망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가운데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소망, 이런 신앙 안에서의 소망들, 다 가져 보셨는 줄로 압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 소망들, 지금 이루어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소망하신 것 가운데, 지금 이루어진 것들이 있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쎄 하며 고개를 저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 이런 감정, 가지실 줄 압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남은 시간들도 이렇게 세월을 보내게 된다면, 우리는 분명 후회하는 한해를, 또 다시 보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혹시 T.V에서 하는 웃찾사라고 하는 개그 프로그램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거기에 보면, 한 개그 코너에서 개그맨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제-발 긴장 좀 하자.” 처음에는 멋있게 등장을 했는데, 서로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며, 정신없는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이내 대화의 내용이 횡성수설하게 되고, 엉뚱한 일을 벌이게 되는 그런 상황이 연출됩니다.  그러면서 서로를 바라보며 하는 말이, “제-발 긴장 좀 하자” 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설교 서두에 왜 이런 말을 합니까? 
오늘 설교를 하는 본문의 내용이, 우리에게 사뭇 긴장감을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 본문 말씀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말씀이지요. 
예수님이 하루는 시장하셔서, 무화과 나무에게 열매를 얻으려고 갔지만, 아무런 열매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저주를 하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19절 말씀을 보세요. “길 가에서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어떻게 되었다고 했습니까?  주님의 저주로, 그 자리에서 그 무화과 나무는  말라 버렸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보게 되면, 어떤 면에서는, 좀 너무하신 것 아니냐?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세요.
주님의 공생애 사역을 보면, 이렇게 극단적인 반응을 보인 예가 별로 없습니다. 별로가 아니라 거의 없습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주님의 이런 극단적인 반응을, 딱 두 군데서 발견할 수 있는데요, 공교롭게도 이 두 번의 모습을, 우리는 오늘 본문이 속한, 이 마 21장에서 다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무엇입니까?  마 21 : 12절 이하에 나타난 성전청결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장사치들이 모이는 시장터가 되어 있었습니다.
소를 팔고, 양을 팔고, 비둘기를 팔고, 또 이런 거래를 하기 위해 돈을 바꾸는 환전사업을 하는 등, 성전에서 해서는 안 될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주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진노하셨다는 겁니다.
환전상을 둘러엎으시고, 소와 양과 비둘기들을 채찍으로 때리며 다 쫒아내셨습니다.  아마 주님의 이런 모습을, 사람들은 처음 보았을 줄 압니다.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평소의 주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지요. 
평소에는 온유하시고, 인자하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분으로 비춰졌는데, 성전에서 보여 준 주님의 모습은, 이와는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이처럼 성전에서 진노하셨던 것입니까?  성전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예요.  주님이 성전을 향해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전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기도하며 예배하는 장소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모든 백성들이 아닌, 자신들만의 특권을  누리는 장소로 이용하였다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마음 놓고 편하게 기도하며, 예배할 수 있는, 성전의 본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백성들이 성전에 오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처럼 진노하시며, 그들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주님이 진노하셨던 사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무화과 나무의 저주 사건입니다.  주님이 시장하셔서 그 나무에게 열매를 구했지만, 열매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열매가 없을 때,  그 나무는 주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말라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인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두 가지의 사건이  연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이 두 가지의 사건이, 연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왜이겠습니까?  여러분 이 두 사건은, 따로 구분되어진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어떤 의도 속에, 서로 맞물려져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전에서의 사건을 쉽게 설명하시기 위해, 바로 이 무화과 나무의 사건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마땅히 이루어져야 될 일과, 무화과 나무가 맺어야 할 열매와의 상관관계를 설명하시기 위해, 이러한 연속적인 사건을, 주님이 연출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보기 드물게 주님이 진노하신 이 두 가지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주님이 이런 사건을 동시에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을 때, 우리 또한 주님으로부터 이런 진노하심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교훈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오늘 우리가 이 성천 교회를 어떠한 모습을 섬겨가야  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이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이 성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아멘!!  그리고 우리는 이 성천 교회에 먼저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이 교회를 마음 놓고 찾아 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고, 그리고 그들이 이 교회에서 마음껏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천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먼저 불러주신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타난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강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46년 동안에 걸쳐 지어진, 아주 웅장한 건물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전체의 자랑거리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성전이 하나님께는, 전혀 자랑거리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랑거리가 뭡니까?  오히려 실망감만 안겨 주는 성전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전이 아무리 아름답게 지어져도, 성전의 제 기능을  상실한 성전이라면, 결코 하나님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그랬어요.  그리고 말씀하시길,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했습니다.  여러분, 이 두 가지의 말씀을 연결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살펴본 이 두 사건과,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워주신 교회를, 우리가 힘써 전도하고 채워서, 그야말로 만민이  기도하고 예배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만들어야 함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계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해서, 하나님이 세워 주신 이 성전을 채워  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교회 성장연구소” 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뭐 그런 연구소도  있는가?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요즘 현대 교회가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기관입니다.  거기에서 교회 성장에 대한 자료를 배포하기도 하고, 또 교회 성장에 관한 컨설팅도 해 주는데, 주로 교회 부흥에 관심을 가지는  교회가 어디이겠습니까?  기존의 교회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새롭게 개척한 교회들이 이런 교회 성장이나, 교회 부흥에 대한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개척교회 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저도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번  경험해 봐서 잘 압니다.  그런데 개척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다 힘들고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물론 처음에는 힘이 들지요?  환경적이나, 재정적이나, 인간적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 힘이 들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런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개척 교회가 빨리 성장하고 부흥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 방법이 무엇이냐?  다른 것 없습니다.  목회자와 온 성도들이 그야말로 교회 부흥에 올인을 하는 것입니다.  목숨 걸고 뛰는 것이예요. 얼마동안요?  최소한 3년 동안은 이렇게 뛰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성장연구소에서, 말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개척 교회는 3년 안에 쇼부를 봐야 한다.”  무슨 말입니까?  개척 교회를 시작해서, 3년 안에 부흥을 경험하지 못하면, 자칫 그 상태로, 정체되어진 그 상태로 10년을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제 말이 아닙니다.  교회 성장 연구소에서 발표한 통계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통계가, 비단 새롭게 개척한 교회들에게만 적용이 되는, 그런 통계이겠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교회들도, 기존의 교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부흥은 개척교회만의 소망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땅에 세워진 모든 교회들이, 이러한 부흥을 소망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교회들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들도, 한번 성장이 정체되어지기 시작하면, 그리고 그 정체가 3년이고, 4년이고 계속해서 나타나게 된다면, 그 정체된 분위기로, 이제는 10년을 갈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감을 모든 성도들이 느끼면서, 교회를 새롭게 일으켜 세우기 위해, 목회자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일사분란하게 기도하고, 전도하며 나아갈 때에, 하나님은 그 정체된 분위기를 성장으로 깨뜨려 주시며, 나아가 이전에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부흥의 역사도, 일으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교회에 부흥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데, 이 은혜가 아무 때나 임하는 것이 아니예요.  언제 이런 은혜를 주십니까?  성도들에게 주님을 향한 열정이 있을 때, 이 부흥의 은혜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또 열정이 있다고 해서, 항상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이 부흥은 마치 바람과 같습니다.  한번 휘몰아치게 만들어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채워주시는 역사가 나타나는데, 이런 은혜의 때가, 교회 역사상 사실 몇 번 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두세 번 정도입니다.  아니 두세 번밖에 안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나?  그 다음은, 하나님이 이루어주신 부흥 속에서 성장해 나가는 겁니다. 

여러분 서울에 많이 모이는 교회들을 보세요.  그 교회들이 해마다 부흥합니까?  아닙니다.  어느 한 순간에 부흥한 것이예요.  그리고 그 부흥 속에, 계속해서 성장해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부흥의 은혜 주실 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교회가 채워집니다.  수천 명, 어떤 때는 수만 명이 모여 듭니다.
그야 말로 구름 떼와 벌 떼와 같이 모여 듭니다.  광야에서 메추라기 떼를 몰아 주셨듯이, 하나님이 성도들을 몰아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만나는 매일 주셨지만, 메추라기는 매일 주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부흥의 은혜도,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예요.
그러나 이러한 부흥이 한번이 지나고, 두 번 정도만 더 부흥의 은혜를 경험해도, 그 교회는 수천 명, 수만 명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믿습니까?  믿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 성천 교회가 추구해야 될 모습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이러한 부흥을 목표로, 온 성도들이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기를 힘쓰며, 전도하기를 힘쓰는 모습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지난 주일, 우리 1청년회 임원들과 리더들이 모여, 하반기 사역에 대한  회의를 할 때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생명이 있다는 증거는 자람이다.”
우리 1청이, 진정 신앙이 살아있고, 믿음이 살아있다면, 분명 그 증거가 나타나야 한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  생명의 열매들이 나타나야 한다. 
계속해서 지금과 같이 30명도 안되는 인원이, 몇 년 동안이나 모여 예배드리고 있다는 것은, 우리 공동체가 잠자는 공동체 내지는, 죽어가는 공동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여러분, 제 말이 틀린 말입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좀 충격적인 말이었느지도 모릅니다.  모르겠습니다.  저는 충격 받으라고 말을 했는데, 별로 충격 받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제가 주장하는 것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제 주장이, 저만의 사견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눅 13장 말씀을 한번 같이 찾아볼까요?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정체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 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눅 13 : 6 - 9절까지의 말씀, 제가 읽고 여러분이 읽고, 교독을 합시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3년이라고 했습니다.  3년은 하나님이 기다리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열매가 없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신다고 했습니까?  찍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왜입니까?  “어찌 땅만 버리느냐?”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소멸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정체된 가운데 계속해서 지내고 있는 교회들을 향한 하나님의 실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교회가 문을 닫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도 은혜 가운데  계속 유지는 됩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하나님이 주신 부흥의 은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주님이 주신 긍휼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피 흘려 세우신 교회이기 때문에, 놓지 못하고 그냥 붙잡고  계시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하신 말씀을 보세요.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이런 긍휼의 은혜도 한계가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변에서 문을 닫게 되는 교회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러한 일들은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개척교회로 시작했다가, 끝내 자립조차 하지 못하고 끝나는 교회도 많습니다.  작은 교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지요?  큰 교회로 성장하고 아름다운 성전 건물까지 지어 놓은 후에, 어떻게 점점 사양길에 들어서면서, 나중에는 텅 빈 교회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더러 있는 것을 또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직접 가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특히 유럽에 있는 교회들의 대부분이, 바로  그와 같은 종말을 맞고 있는 것은, 실로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주님이 책망하신 예루살렘 성전이, 바로 그와 같은 종말을 맞이하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구약 시대에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고, 그 성전을 통해 제사를 받으시고, 또 기도를 들으시던 그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그렇게 끝나게 만드셨는가? 
바로 그 해답을, 우리는 오늘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 사건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예루살렘 성전의 문을 닫게 만드시고, 그 대신  신약 시대의 새 예루살렘교회를 일으키시고 부흥케 하셨는가?  오늘도 주님께서는 과연 어떤 교회를 마르게 하시고, 또 어떤 교회는 자라게 하시는가를,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이 주시는 구체적인 교훈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교훈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교회는, 곧 마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제사장들이 섬겼던 예루살렘 성전과, 사도들이 섬겼던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적인 차이점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미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 앞에 아무 쓸모없는 껍데기 교회로 변모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18절과 19절이 지적해 주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신 예수님께서는, 그 전날 저녁에 식사도 못하시고 주무셨는지, 혹은 새벽에 일찍 길을 떠나신 까닭인지, 하여튼 시장기를 느끼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오시자마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시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무상 간이음식점을 만난 택이지요.

이 무화과나무는, 일 년에 두 번 열매 맺는 시기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시기는, 잎이 자라기 전이나 잎이 무성할 때인데, 이때는 설익은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래서 이 과실은 상품적인 가치는 없고, 그저 주님과 같이 정말로 배고픈 사람이나, 또 나그네들이 따먹게 되는, 그런 열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기는, 그 같은 설익은 열매와 잎이 떨어지고 난 후인데, 이때에는 정말 맛있는 무화과 열매가 맺힌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대하고 다가가셨던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했으므로 이 사건은 그 전자, 즉 설익은 열매가 잎과 함께 열리는 시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에서는, “이 때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 라고, 다시 말해, 진짜 열매가 맺히는 시기는 아니 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매우 시장하셨던 주님께서는, 그 설익고 맛없는 열매라도 좀 얻고자 해서 그 무화과나무 곁으로 가셨던 것이지요.  하지만 어떻습니까?
그 무화과나무에는, 잎만 무성할 뿐 그런 설익은 열매조차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이제부터 너는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그 나무를 저주하셨다는 겁니다.
무화과나무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시고 저주하심으로, 이를 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시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주님 보실 때 오늘 우리 성천 교회는 어떤  모습입니까?  또, 오늘 우리 성도들의 신앙은, 주님 보실 때 어떤 모습입니까?  먼저 부름을 받아 세움을 입은 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성도들입니까?  우리는 생각할 때에, 아직 우리는 열매를 맺을 때가 멀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판단은 언제나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믿습니까? 

나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할지라도, 주님이 보시기에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아멘!!  내 생각은 주관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언제나 객관적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무리하게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주님이 아니시라는 겁니다. 
충분히 준비가 되어있고, 또 충분히 그 일을 할 만한 단계가 되어졌기에,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 가운데 처음부터 주님 마음에 쏙 드는, 그런 신실한 성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바울과 같이 모든 일들을 충성되이 감당하는 성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족하지만, 이제는 주를 위해 뭔가 할만한 신앙은, 다 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할 때에, 좀 준비가 될 되어져 있다 할지라도, 주님이 원하시면 설익은 열매라도 맺어서, 주님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어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열매를 못 맺지만, 앞으로 더 자라게 되면 풍성하게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변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예요.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때는 언제나 지금입니다. 현재입니다. 
우리가 지금 두 달란트 남기지는 못해도, 최소한 한 달란트는 남겨서 주인 되신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성도들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바램이 있는데, 이런 기대로 주님 우리 곁에 다가오셔서, 열매를 찾는데, 우리는 이런 저런 핑계로 설익은 열매조차 드리지 못하고, 그저 잎만 무성함을 자랑한다면, 그저 역사와 전통만을 자랑한다면, 우리의 결국 또한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와 같이, 무너져버린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 줄로 압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세상 사업을 하면서도 장사 안 되는 상점이라면 일찍 문 닫는 것이 더 낫고, 이윤을 남기지 못하는 지점이라면, 프랜차이즈 권리를 회수하고 폐점시키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운영하시는 방법도, 어찌 보면, 꼭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세요.  2 : 5절에 보면,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촛대를 옮긴다고  했습니다. 

촛대가 옮겨지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 교회의 성도들이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땅 끝까지 이르러야 할 전도와 선교 사역에 힘쓰지 않고, 아무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교회, 주님의 이름으로 시행하는 선한 사업들을 도모함이 없이, 세상에  비난과 조롱을 듣는 교회, 이러한 교회는 결국 촛대가 옮겨지고, 무화과나무와 같이 말라질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담임 목사님, 우리 교회에 부임하신지도, 올해가 벌써 4년째가 되는 줄 압니다.  그리고 새 생명 축제를 시작한지도, 3년이 지난 줄 압니다. 
이제는 열매를 맺어야 할 때인 것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홍해를 향해 내어 밀 때에, 온 백성들이 다 따라 그 물을 향해 나아갔듯이, 이제는 담임 목사님 중심으로 온 성도들이 마음이 하나 되어져, 세상을 향해 나아가, 홍해의 역사와 같은 교회 부흥의 역사를 일으켜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런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는데, 먼저 앞장 서 나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로, 오늘 이 무화과나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교회는, 반드시 성도들이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볼 때는, 주님 말씀 한 마디에 나무가 그렇게 말라 버리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게 여겨졌을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님이 하신 일을 보고 이상히 여겨 묻지 않습니까?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그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 21절과, 22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할렐루야!!! 

우리가 생각할 때는,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과, 주님이 말씀하신 기도에 대한 교훈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성도들의 축복에 대한 열쇠가, 바로 이 말씀 속에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도가 곧 모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축복의 열쇠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그냥 기도가 아니지요?  어떤 기도입니까?  믿음의 기도입니다. 
누구를 믿는 믿음입니까?  주를 믿는 믿음입니다.  주를 믿되, 확실히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태산과 같이 버티는 불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믿음의 기도입니까?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교회의 부흥을 이루실 것을 믿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드리는 기도, 이런 기도가 바로 모든 인생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하는 축복의 열쇠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과 기도, 바로 이것이 말라서 결국 문 닫게 된 예루살렘 성전과, 지금 막 문 열고 개척한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크게 성장하게 된 예루살렘 교회와의 차이점이라는 것입니다.  또, 주님의 은혜가 메마른 가운데, 모든 삶이 피폐되어지고, 고통을 당하는 예루살렘 성전에 거한 인생과, 성령 충만한 가운데 뜨겁게 기도하고 전도하며, 인생에 부어주시는 새로운 은혜와 축복으로 영육간의 모든 일들에 형통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초대 교회 성도들과의 차이점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은 어떤 기도를 드렸습니까?  회당 문에 서서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적인 기도를 했습니다.  마음을 담아 간절히 소원하는 기도가 아닌, 형식적인 주문과 같은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에게는, 주님을 향한 믿음의 기도가 없었다는 것이예요.
그러니 마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결국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아니한 채로 무너지고 말았지 않았습니까?  인생도 결국 그와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는 달랐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섬겼던 제자들이나 사도들은 주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약속하신 주님을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기도에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고, 또 골방에서 기도할 때마다  성령님과의 교통함이 있었습니다.  교회 내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습니까?  누구랄 것도 없이 무조건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누가 잡혀 가거나 교회가  핍박을 당하면 어떻습니까?  온 성도들이 모여서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자신이 당하고 있는 문제보다, 형제와 자매들이 당하고 있는 문제를 위해 더욱 더 간절하게 기도에 힘썼던 교회가, 바로 새 예루살렘 교회, 초대 교회 성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그 기도가 어찌 응답되지 않았겠습니까?
그 기도는 그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 만사형통의 해결책이었다는 겁니다.

그 결과 정말 예루살렘 교회에 어떤 역사들이 나타났습니까?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실제로 가능하게 나타나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루에도 삼천 명이 등록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질병이 나았습니다.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소경이 눈을 뜨게 되며, 앉은뱅이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사도의 옷깃만 스쳐도 귀신이 떠나갔으며, 죽었던 과부와 청년이 사도의 기도를 받고 부활하기도 했습니다.  인생에 나타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이, 다 기도로 해결되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초대교회 안에서 나타나고 있었다는 겁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일들을 기록하다가, 끝내 다 기록할 수 없어서, 나중에는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사도들이 민간에 표적과 기사를 수없이 행했다.” 라고 요약 정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는 능력이 넘쳐났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성천 교회가 바로 이런 능력이 충만한  역사가 있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천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아멘!!!  모든 능력의 시작은, 기도인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 성천 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과 같이,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기도하는 모습이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은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요청에 여러분 각 자가 다 응하시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와, 믿음을 가지고 힘써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의 기도와 전도를 통해, 이 성전이 올 해도 채워지고, 내년에는 더 많이 채워지고, 조만간 4부, 5부 예배도 드릴 수 있는 귀한 역사가, 그리고 여러분의 삶에도 말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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