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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체험이 있는 신앙 (요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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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열한 번째입니다. 먼저 43절에서 45절입니다.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교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모았음이더라

우리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늘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교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자주 했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서도 여기에 대해서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들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은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6:1~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뛰어나지만 그 어머니와 형제들을 보니 존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또 누가복음 4장에서도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은혜로와서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겼지만 그들은 놀랍게 여기면서도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야 라고 말하면서 무시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몇 마디 했습니다. 그랬더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눅4:28~29). 말씀은 좋고 사람은 괜찮은데 그 출신을 보니 도무지 존경하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그런 일이 있어서 그런지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지나 갈릴리로 가실 때에도 또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지가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도 성경을 봐서 알겠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배척받지 않고 환영받았는데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45절에서는 갈릴리 사람들이 그를 영접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영접 받으실 것을 알면서도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교향사람이라고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아니라 그만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고향사람들로부터 환영받았는데 환영받은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성경에서는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하시는 말씀을 직접 들었고 예루살렘에서 하신 놀라운 일들을 보았기 때문에 믿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저 소문만 들었을 때에는 몰랐는데 직접 보고 직접 들으니 믿지 않을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고 물건을 쏟고 채찍으로 야단치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놀라운 일들을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과의 언쟁에서 놀랍게 이기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고 단지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는 말씀을 하시고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시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고향 사람들이 배척한 것은 그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배척했지만 고향 사람이든 타향 사람이든 누구든 예수님을 알면 믿을 수밖에 없고 또 예수님이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직접 만나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믿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는, 신앙이 있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정말로 나에게 신앙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의 삶이 신앙적인 삶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스스로 나는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아니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이 있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볼 때 참신앙인이며 신앙적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으면 이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체험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알아야지 신앙이 생길 수 있습니다. 42절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친히 만나서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 줄 알았기 때문에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도 신앙이 생기지 않습니다. 모양만, 무늬만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고 오직 교회에 출석만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경험한 것만큼 보인다고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얼마나 경험하고 얼마나 체험했는가에 따라 그 만큼만 믿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하시는 말씀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보통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고향사람들이 예수를 믿은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메시아만이 할 수 있는 말씀을 하시고 메시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하실 수 없는 일이고 할 수 없는 말씀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자들과 교회는 너무 세상의 유행에 따라갑니다. 교회와 신자는 달라야 합니다.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고르고 뽑은 것이 교회이며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교회와 신자들이 세상 사람에게 교회와 신자만이 할 수 있는 말과 일을 보여줄 때입니다. 이것이 신자와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것이 교회인지 세상 사람들이 모여서 노는 곳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자칫 잘못하게 되면 성과 속의 구별이 없어져 버립니다. 신자와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멋진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교회이어야 하고 신자는 신자이어야 합니다.

이제 46절에서 54절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것이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갈릴리에서의 첫 번째 기적은 여러분도 잘 아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이었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기적이 오늘 본문에 나오고 있습니다.

상당한 고관인 것 같은 사람의 아들이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빨리 오셔서 고쳐달라는 부탁에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여러분, 기적은 언제 일어나는 것 같습니까? 어떤 사람은 기적은 우연히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실제 기적을 체험한 사람도 대체로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만 우리는 이것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기적이 그냥 우연히 어쩌다가 일어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기적은 항상 그럴만한 요인이 있을 때에 일어납니다.

가나에서의 포도주 기적에는 예수님 어머니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요인이 있을까요? 첫 번째는 무엇보다도 이 곳 갈릴리 사람들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씀했습니다. 고향에서는 선지가가 높임을 받지 못했지만 갈릴리에서는 보란 듯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믿을만한 사람이 믿을 때에는 별 것 아니지만 그러나 잘 믿지 못하고 믿을만한 상황이 되지 못할 때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여러분에게 부탁하는 것은 여러분이 상황이 많이 좋을 때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평안할 때에 좋은 믿음을 가지십시오. 대체로 사람들은 아주 어려울 때에는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기도하고 아주 힘들 때에는 잔소리할 필요 없이 그 사람의 삶이 성결해 집니다. 문제가 있을 때는 항상 좋을 때입니다.

두 번째는 겸손함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의 겸손함입니다. 가버나움이라는 곳에 사는 고관이 나사렛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의 목수를 찾아왔습니다. 찾아온 길이 32킬로나 되는 아주 먼 길이었습니다. 웬만한 겸손이 없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자존심을 다 내려놓았으므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겸손이란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라고 어떤 사람이 정의를 내렸습니다. 바로 왕의 신하는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쳐다보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분이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본 것입니다. 한없이 낮은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이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구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바로 하늘의 하나님 앞입니다. 그래서 주일에 교회에 올 때 많은 사람들이 정장을 하고 나옵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겸손이며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또 하나는 이 아이의 아버지는 좌절하거나 포기할 수 있는 상황에서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아버지의 부탁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절) 라고 아주 냉정하게 반응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아버지는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라며 그래도 자기를 좀 봐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적은 이런 데서 일어납니다. 적어도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데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 15장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지경밖 두로와 시돈이라는 곳에 내려 가셨는데 그 때 이방 가나안 여인이 한 일을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마15:22~24)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도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 절하며 저를 도우소서 라고하며 계속해서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여자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여 옳습니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나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태도가 확 바뀌며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고 말씀하셨고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가버나움의 신하인 아이 아버지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50절에는 여기에 대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또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어제 일곱 시는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시각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꾸 포기하고 좌절합니까? 왜 기도하다가 중단합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그냥 교양삼아 믿다보니 자꾸 포기하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 더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50절에 살아 있다고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라 고 말씀을 하는데 보통 사람이면 이 말씀만 듣고 가겠습니까? 더 부탁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가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할텐데 이 아이의 아버지는 뭐든 당신이 하시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신뢰했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는 그 말씀만으로 됐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가장 믿음이 좋은 백부장도 그랬습니다. 주님이시라면 말씀만 하시면 나을 것이라고 주님을 신뢰했습니다. 이것이 기적을 부르는 믿음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 더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은혜에 대한 답이 있었습니다. 53절 하반부를 보면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가 일하는 곳은 궁중입니다. 궁궐은 예수 메시아를 배척하는 곳입니다. 궁궐에 왕이 있는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두 왕을 섬기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왕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 참으로 어려운 곳입니다. 자기 혼자 믿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온 집안이 함께 믿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의 아버지는 온 집안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은혜에 대한 반응이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기적을 불러오는데 가장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기적이 얼마나 필요한지 아십니까? 순간순간마다 기적이 필요한데 은혜에 대한 반응이 있는 삶에 기적은 오고 또 오기 쉬우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이 역사하시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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