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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감사로 드리는 제사 (시 50: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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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로 드리는 제사 / 시 50:14-15

(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저는 어제 제가 일전에 모시던 목사님의 2주기 추도예배에 다녀왔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이신데 이 분은 평신도 사이에서보다 목회자들의 목사로 유명하십니다. 이분은 항상 별세신앙을 강조하셨는데 이는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신앙입니다. 이 분은 끊임없이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 한국 교회가 죽어야 한국 민족이 산다’고 외치며 사셨습니다. 이 분이 그 마지막을 암으로 투병하다 돌아가셨는데 암 투병 중에도 『죽어도 행복합니다』라는 책을 쓰시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이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한 달을 병 수발을 해드렸습니다. 그대 있엇던 일입니다. 어느 날 제가 이 목사님의 머리를 감겨드리고 있었는데 이 분이 갑자기 머리를 드시더니 거울속에 비친 저를 향해 보시더니 대뜸 이렇게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사, 인간이 무언 줄 알아?” 제가 말을 못하고 주춤하고 있으니 이 분이 이렇게 일갈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구더기야!”

인간은 구더기!  마치 득도한 어느 노스님이 마지막으로 들려주시는 주신 진리의 말씀처럼 제 가슴을 울렸습니다. 사실 그래요 인간은 벌레만도 못하고 죽으면 시체는 썩어 다 구더기의 밥이 됩니다. 요즘은 대부분 화장을 하니 모든 것은 공중에 흩어지고 한 줌의 하얀 재만 남습니다. 인간 별 거 아닙니다. 자기가 마치 무슨 대단한 존재나 되는 냥 힘주지 마십시오. 돈이 많아도, 학식이 뛰어나도, 미모가 뛰어나도 우리는 늙고 죽으면 썩을 몸들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싸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또 아무리 가난하고 이름 없이 산다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 앞에 가난한 자와 부자가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질 것은 자기 몸 하나 누일 땅 반 평뿐입니다. 요즘은 납골당이라 하여 죽어서도 층층이 놓인 서랍식 아파트에 들어가야 합니다.

육신에 지니거나 이 땅에 쌓은 것은 다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영원한 것만 남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듣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물질의 제사

오늘 말씀에서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라는 말이 나옵니다. 신약시대에는 예배가 가장 중요한 신앙 표현이지만 구약시대에는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성전까지 먼 순례길을 가야 했습니다. 그것도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등의 세 절기는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야 합니다. 제사 종류만 해도 불에 태워 드리는 번제, 곡물 가루로 드리는 소제, 감사와 나눔의 화목제, 자기 죄를 속하는 속죄제, 성물들을 거룩하게 하는 속건제 등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수백 만인데 그들이 양이나 염소 한 마리씩만 바쳐도 성전에서는 쉴 새 없이 양 잡는 소리와 피 냄새, 고기 타는 냄새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미가는 6장 7절에서 이를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피의 제사를 우리에게 요구하셨을까요? 물론 이를 통해서 우리 죄가 속죄함을 받습니다. 또 이런 속죄의 제사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상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물질입니다. 수많은 짐승들을 바쳐야 하는데 이것이 사람들의 부담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물질에 굶주려 계신 분이신가? 아닙니다. 오늘 읽은 시편 50편 14절 바로 앞에 있는 구절을 읽어 보십시오. 9절부터입니다. “(9)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11)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13)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온 우주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에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 손으로 드리는 물질을 원하십니까?

그것을 우리의 마음을 받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물질을 통해서 표현되는 우리 마음입니다. 예물을 바치면서도 마지 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말라기서에서는 마지 못해서 하는 제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3, 개역개정판) 사람들이 제사는 많고 물질은 아깝고 하니까 가장 병든 것을 바치거나 남의 것을 훔쳐 바친 것입니다.

사실 물질이 아깝지요. 그러기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을 원하십니다. 물질을 올바로 바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물질에 대한 분명한 주권의식이 있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제사 문제는 그래도 가볍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넘기 어려운 십일조의 산이 있습니다. 자기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은 신앙이 분명히 선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침례교 신자라 온 몸을 물속에 잠그는 침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침례를 받으려고 물속에 들어가다 보니 호주머니에 돈지갑을 지닌 채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목사님, 잠깐만요. 돈지갑을 놓고 오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그대로 놔두시오. 돈 지갑도 세례를 받아야 하오.”

종교개혁자 루터는 세 가지의 회개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회개가 필요하다. 가슴의 회개(통회의 눈물), 정신의 회개(가치관의 전환), 그리고 돈지갑의 회개이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돈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의 소망은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심각해질 때는 돈 문제가 걸릴 때입니다. 인생에서도 물론이려니와 신앙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바로 물질문제입니다. 물질문제에서 바른 태도를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온전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십일조를 물질문제에 대한 우리의 바른 신앙고백이자 물질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십일조가 마치 군대에 가면 유격훈련 중 ‘헬기레펠’ 훈련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헬기레펠은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기 위한 예비훈련으로, 지상 11m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훈련입니다. 이 11m 라는 것은 인간이 가장 공포스럽게 느끼는 높이입니다. 이 높이에서 뛰어내릴 수 있으면 어떤 곳에서도 자신 있게 뛰어내릴 수 있습니다. 실제 훈련장에 가면 헬기 레펠 높이는 약 10m 쯤 되고 여기에 사람의 눈높이를 더해 11m 가 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저는 11이라는 숫자나 십의일조 라는 숫자가 유사하기도 하거니와 그 의도하는 바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십일조에 성공한 사람은 어떤 물질문제에 있어서도 주인이 분명한 인생이 됩니다. 물질의 노예가 아니라, 물질을 부리고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인생이 됩니다. 주께서 쓰실 수 있는 사람은 온전한 십일조 훈련으로 단련 받은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진정한 정수를 맛보는 사람도 물질문제에 있어서 분명한 헌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분이 십일조를 바치면서 여섯 번 놀랐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첫째는 십일조를 바치면서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면서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았는지 발견하고 놀란다고 합니다. 둘째는 이렇게 많은 돈을 낼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보고 놀라고, 셋째는 십일조를 바치고도 그 나머지로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데 놀라고, 넷째는 십일조를 내면서 자신의 생활이 물질적으로 오히려 더 부유해지는 것을 보고 놀라고, 다섯째는 십일조보다 더 많은 돈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바칠 수 있는 담력이 생긴 것을 보고 놀라게 되고, 마지막으로 이런 축복을 진작 받을 것을 왜 이제야 받았던고 하며 후회하면서 놀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구호 단체의 대부분은 기독교 계통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70-80%는 기독교인의 헌금일 것입니다. 지하철에서 시각장애자들도 찬송을 불러야 돈이 나옵니다. 기독교인들이 물질 훈련이 되다 보니까 이렇게 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미국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긍정적으로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미국 청교도 신앙이 만들어 놓은 그들의 좋은 신앙 전통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저는 빌 게이츠의 삶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운영하며 세계 최고의 부자면서도 그는 또한 기부로 유명합니다. 매년 자기 재산에서 2조원씩을 기부해서 지금까지 30조원을 기부했다고 합니다. 자기 전 재산인 55조원을 기부하고 자식들에게는 120억 원만 유산으로 주겠다고 합니다. 그는 기부한 재산으로 AIDS 퇴치사업, 교육사업, 제3세계에 풍토병 치료와 결핵 백신 공급사업을 하였습니다. 빌 게이츠의 이런 노력으로 어떤 분은 빌 게이츠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70만 명의 사람들을 살렸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그가 워낙 많은 액수의 돈을 기부했기에 자선과 구호 역사에서 빌게이츠 ‘이전’과 ‘이후’로 나눌 정도입니다.

빌 게이츠는 최근에 자신이 중퇴했던 하버드 대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졸업식 연설에서 이렇게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자선사업에 나서게 된 것도 세상에 만연한 질병과 죽음, 무지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으로 인해 느낀 충격 때문이었다 ......인간의 위대한 진보는 발견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어떻게 불평등을 줄이는가에 달려 있다 ...... 단 한 명의 삶을 살린다고 해도 짜릿할 텐데 수백만 명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일조나 물질 훈련을 시키는 것은 바로 이런 멋있는 인생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바쳤다고 해서 우리가 결코 가난해지지 않습니다. 더욱 더 풍성히 채워주십니다. 잠언서 3장 9,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하나님은 이 물질로 선한 일 많이 하라 말씀하십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물질은 다 썩어 없어지지만 하나님께 바치고 이웃을 위하여 사용한 것은 영원히 남습니다.

감사의 제사

하나님이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인데 특별히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감사의 제사라고 합니다. 감사는 무엇입니까?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 현실에 대해서 감사한다면 하나님은 고마워하십니다. “네가 살기 어렵지만 나를 믿어주는 구나” 하며 하나님은 대견해 하십니다. 오늘 읽은 시편 50편 23절에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우리가 감사할 때 나타납니다. 사업이 형통해서가 아닙니다. 사업이 어렵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 이런 사업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만 믿겠습니다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내가 건강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변변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것은 대단한 신앙고백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백을 자기 인생에 대해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서두에 말씀드렸던 이중표 목사님은 자기가 가난하게 태어난 것도, 자기를 낳으신 부모님도 모두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일어나 일이라 생각하며 감사하셨습니다. 자기라는 존재를 빚기 위해 가난한 부모 역할을 맡으셔야 했던 부모님들을 극진히 모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눈으로 볼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자기 인생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나를 낳으신 부모님에 대한 감사를 가질 때 자기 생에 대한 감사가 시작됩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감사가 시작될 때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자기가 가난하게 태어났든지 부요하게 태어났든지 어떤 환경에 태어났든지 간에 그렇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운명에 대해서 감사하는 자의 인생을 기적의 인생으로 만드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베푸셨던 최대 기적 중 하나는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먹이셨습니다. 누가복을 9장 16, 17절에서는 그 장면을 이렇게 전합니다. “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를 거두니라” 여기 16절의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라는 단어에 유의하십시오. 여기 ‘축사하시고’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유로게오’ 입니다. 이 단어는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은 이 말씀을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리신 뒤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셨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의 한끼분 식사에 불과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감사하셨을 때 일어났습니다.

기적은 평범하고 작은 일에 감사할 때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지극히 적은 것에 감사할 때 얼마나 큰 기적이 일어나는 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생 광야를 지나는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지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으며 온갖 흑암과 공허와 혼돈에 둘러싸여 답답함을 느끼십니까? 하나님 앞에 감사하십시오. 지극히 작은 것 하나를 들고라도 우러러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감사는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배부른 인생이 됩니다. 누가복음 17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먹고 다 배불렀더라” 감사하는 자는 배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감사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제2차 대전이 끝나고 한 해군 장교가 고향땅에 돌아와 보니 모든 사람이 기아에 허덕이고 온 동네가 다 폐허가 되었고 자기 옛집도 잿더미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그 사람의 마음속에 분노가 생기고 또 증오심이 생기고, 불평과 원망이 생겼습니다. 그러다 화병이 급기야 전신마비로까지 되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게 되었는데 그 병원 원장이 그 사람의 발병 동기를 보니 불평과 불만에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처방을 내렸습니다.

“당신은 내가 주는 약을 먹기 전에 언제나 하루에 세 번씩 감사를 드리고 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병이 낫는 비결입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의사처방 대로 감사하기를 몇 개월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 중학교 다니는 딸 아이가 학교 갔다가 아버지를 면회하기 위해서 오면서 길거리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풀빵을 사가지고 와서는 “아빠 먹어” 했답니다.

그가 딸이 주는 풀빵을 받을 때 정말 감사한 마음이 솟아오르더랍니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받으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전신의 마비가 확 풀렸다고 합니다. 감사할 때 풀린 것입니다. 딸이 준 지극히 작은 풀빵 한 개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복을 더하십니다.

기도의 제사

하나님은 우리 상한 심령의 제사를 받으십니다. 시편 51편 16,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상한 심령은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해서 하나님의 전에 와서도 감히 고개도 못 들고 가슴을 치는 마음입니다. 주님께 서원한 것을 다 갚지 못한 것에 대해 항상 가슴아파 하는 마음입니다.

마치 예수님 말씀하셨던 세리와 같은 기도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3절에서는 그 모습을 이렇게 전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여러분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나오되 빈손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들고 나와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상한 심령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도 주님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환란 날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내가 너를 건지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를 건지는 날 너는 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대단한 능력, 인격, 물질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 아버지를 찾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상한 심령도 바치려 하지 않습니다. 힘들 때 그냥 술로만 달래려 하지, 그저 한숨만 쉬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십시오. 그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 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기도하셨습니까? 그러며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입니다. 실패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십시오.

기도하지 않고 거둔 성공은 성공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자기를 망치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고도 실패했습니까? 아닙니다. 실패가 아니라 성공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기도의 제사를 드리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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