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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부부] 이혼을 생각하십니까? (막 1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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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을 생각하십니까?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막10:6-9)

I. 본문해설

이 본문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혼인에 대해 질문하는 장면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혼할 때 증서를 써주어 나가게 하라고 한 것은 너희의 완악함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지 성경 본래의 정신은 그렇지 않다 하시고 모세의 전통이 아닌 창세기 2장의 원래의 전통으로 돌아가 말씀하십니다. 그 전통은 바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둘을 부부가 되게 하셔서 한 몸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세기에 나오는 바로 이 말씀,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를 인용하심으로써 이들의 질문을 비껴가셨습니다.

이때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왜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서 아내를 내보내라고 이야기하며 이혼에 대해 찬동을 표시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법도라기보다 그들의 완악함을 인해서 일시적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일부다처제 사회가 되다보니 남자들이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임에 있어서 부부됨의 진지한 성찰 없이, 싫증이 나면 아내를 버리고 다른 사람이 또 그 여자를 아내로 취하고, 이런 식으로 부부관계가 불명확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법적인 관계라도 명백하게 하여 가정생활의 혼란을 조금이라도 막아야겠다는 배려에서 모세가 백성들에게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이야기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이혼을 찬동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II. 혼인의 원리: 한 몸 됨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일부다처제를 허락하셨을까라고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명백하게 답을 내릴 수 없지만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다처제로 사는 것을 좋아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인간들이 워낙 부패하고 타락했기에 일시적으로 허용하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홍수 후에 인류가 급작스럽게 줄어들게 되었고 소수의 사람이 다수로 번성하기 위해서 제한적으로나마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그러한 부패를 허용하심으로써 이 땅에 자손들이 많아지게 하셨을 것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우리의 관심사는 왜 일부다처제였는가, 혹은 그 이전 모계사회에서는 왜 일처다부제의 삶이 허락되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혼인의 근본적인 이치와 정신, 그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룰찌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결혼의 근본적인 원리가 무엇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 원리는 바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한 몸이 되는 결합의 정신은 무엇인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A. 육체적 결합

첫째로 육체의 결합입니다. 우선 부부는 장소적으로 한 곳에 동거하는 사람입니다.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부부는 한 공간 안에서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진전하면 이 육체의 결합은 장소적으로 한 공간 안에서 사는 것뿐만 아니라 성性을 통하여 그 부부가 한 몸으로 결합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부부생활에는 반드시 이 육체의 결합이 있게 되는데 부부는 두 몸이지만 이것을 통해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혼인에 있어서 한 몸이 되는 결합의 첫 번째 요소입니다.

B. 영혼적 결합

둘째로 영혼적 결합입니다. 결혼을 통해서 부부의 영혼이 결합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연합의 관계가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존재한다고 가르친 에베소서의 교훈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떨어질 수 없는 한 몸 된 영적인 연합관계로 존재하는데 이런 종류의 연합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존재하는 이 영적 결합은 두 사람이 각각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적인 결합을 이루며 붙어있는데서 비롯되는 결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남자와 하나님을 믿는 여자가 만나서 이루는 결합입니다.

원래 타락하기 전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완전한 연합은 바로 그 사람의 영혼과 하나님과의 연합이었으며 특별히 그 영혼 안에 있는 지성과 하나님 자신의 결합이었습니다. 이 결합 때문에 한 사람은 남성 또는 여성으로서 또 하나의 결합을 부차적으로 필요케 되었습니다. 그것이 혼인입니다. 그렇기에 혼인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중생한 남자와 중생한 여자,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신랑과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신부가 만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결혼은 엄밀한 의미에서 결혼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런 이치를 무시하고 대담하게 불신자와의 결혼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불신자와 결혼을 했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아주 아름답게 결말을 맺어서 훌륭한 신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도 그런 경우에 속할 것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불신자와의 결혼을 대담하게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행동이 아닙니다.

C. 정신적 결합

셋째로 정신적인 결합입니다. 이 정신적인 결합은 영혼적 결합에서 비롯되는 마음의 결합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육체의 결합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정신적으로 연합되어 있는 상태, 이것이 바로 부부됨의 상태입니다. 들어오든지 나가든지 아무 상관이 없고, 있으나 없으나 아무 느낌이 없는 그런 부부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진정한 결합을 이룬 한 몸으로서의 부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부부에게는 바로 이러한 정신적인 결합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가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공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필요로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떨어지면 보고 싶고 못 만나면 그리운, 정신적으로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에 의해서 자신이 가장 잘 이해되고 있으며 또 자신이 그 상대방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어서 서로 용납할 수 있는 그러한 결합이 부부의 결합의 두 번째 요소입니다. 이것이 혼인으로 한 몸이 된다는 말의 두 번째 의미입니다.

남녀가 만나서 육체적으로 하나 되고, 정신적으로 하나 되고, 영혼에 있어서도 하나가 되어 한 몸을 이루는 것이 바로 부부의 대의大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남편이나 아내가 예수를 안 믿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속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불신자인 배우자가 어찌하든지 구원받아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고 말씀과 성령 안에서 예수의 형상을 닮아 성화될 수 있도록 온 마음을 다해 그들의 영혼의 형편이 자신의 영혼의 운명인 것처럼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남편과 아내는 둘이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결합한 사람이 되고, 서로가 부족하고 다른 것이 많지만 성령과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깨트려져 지순의 사랑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서로의 출발점이 다르지만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곳이 그리스도 예수이기 때문에 주님을 추구하며 가까이 다가갈수록 결국엔 아내와 남편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결합을 완성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 안에서 남편과 아내는 그리스도 때문에 부부의 연합을 또한 공고히 하게 되며, 일평생 이렇게 완전한 삼중의 연합, 육체적 연합, 정신적 연합, 그리고 영적 연합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체가 한 사람의 온전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며 참된 신자가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올바른 성화생활을 해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올바른 남편, 한 남성이 되어가는 것이고 올바른 아내, 한 여인이 되어간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자식, 참된 이웃이 되어가는 것도 여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III. 이혼이 허락될 때조차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이혼을 허락하는 때가 있습니다. 신약으로 와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이혼이 허락이 되는 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간음했을 때입니다. 상대방이 혼인 시에 언약했던 정절貞節을 배신했을 때에 배우자는 그 사람과 더 이상 살지 않고 이혼할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사도 바울은 그것 이외에 또 다른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있는 경우를 말하는데 그것은 아내나 남편이 이제 예수님을 믿게 되어서 신실한 신자가 되어서 살려고 하는데 상대방이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당신과는 살고 싶지 않다고 청구할 때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혼이 허락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원칙만으로는 사실 혼인생활을 지속하기 굉장히 어렵다는 사실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 시대로 넘어오게 되면 이외에도 교회에서 이혼을 허락하는 몇 가지 조건들이 추가됩니다.

이것들이 이혼을 할 수 있는 허용적인 사유는 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이 최선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였던 호세아 선지자에게서 이런 모습을 봅니다. 그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는데 불행하게 창녀로 이름난 고멜과 결혼하도록 계시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그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 여자는 바람기가 많은 여자였고 한 남자로 만족을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그 여자를 끝까지 용서하고 그 자녀들을 다 길러냈습니다. 이혼하는 것이 무섭다거나 선지자의 가문에 명예를 더럽히는 것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이 여자를 향한 뼈 속 깊이 타들어가는 진실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아내를 향한 사랑이 단순한 에로스Eros의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Agape의 사랑이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으로 흘러나와 이 아내를 사랑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혼을 함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은 회피한 채 자기사랑을 위해 그 이혼 사유들을 이용하며 정당화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혼할 수 있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항상 최선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이혼했기 때문에 져야 할 마음의 무거운 십자가가 결코 감소되지 않음도 알아야 합니다.

IV. 이혼과 관계의 파괴

이혼이 허락된 경우에도 그것은 최선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혼이 왜 그렇게 나쁜 것입니까? 이것은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A. 하나님과의 관계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이혼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남편과 혹은 아내와 이혼하지 않기 위해서 수많은 날들을 몸부림쳤을지라도 혼인의 결합을 깨뜨린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우, 이혼한 즉시 영혼의 깊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갑니다. 종종 이혼을 하고 나서 매우 홀가분하게 생각하는 지체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의 참된 평화에서 오는 홀가분함이 아닙니다. 물론 교회에 다닌다고 매일 때리고 핍박하던 남편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으니 자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악랄하게 괴롭히고 의심하고 못살게 하며 잔소리하던 아내와 헤어졌으니 일시적으로는 평화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평화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음으로 누리는 평화와, 그것을 포기해버리고 자신을 죄에 양보하는데서 오는 평화입니다.

육체적이고 정신적이고 영혼적인 결합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남편과 아내는 공통된 책임을 집니다. 그리고 그 결합이 깨뜨려졌을 때에는 어느 한쪽의 책임이 아니라 양쪽 모두의 책임입니다. 물론 남편이 훨씬 더 방탕하기 때문에 남편이 이혼에 더 많이 이바지했을 수도 있고 남편이 참으려고 했지만 아내가 워낙 못되게 굴었기 때문에 이혼할 수밖에 없도록 더 많은 원인을 제공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파괴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보다도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인 믿음의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했더라면 자신은 힘들어도 희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해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가정이 깨뜨려진 것입니다.

B. 자녀들과의 관계

두 번째는 자녀들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는 더 이상 기대하는 것이 없으니 파괴될 것도 없다 해도 자녀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한 여자로서의 행복이 어머니라는 이름 때문에 무시되어야 합니까?” 가장 세속적인 여자들이 읊어대는 구절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로서의 나의 의무가 내 행복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가장 이기적인 남자들이 외치는 소리입니다.

혹시 이혼을 생각하고 있는 자매들, 이혼을 생각하고 있는 형제들이 있다면 지금 회개하고 그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이미 이혼한 사람들은 이 말씀을 가슴에 깊이 아로새기십시오. 이혼을 하면 자녀들과의 관계가 깨진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물론 자녀들이 미워서 이혼한 것은 아닙니다. 이혼을 결심하기까지 가장 이혼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마음속에 양심의 가책을 두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이 아니라 애들일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런 식으로 자녀들의 삶을 짓밟을 수 있는 권한이 과연 자신에게 있는지 자문自問해보십시오. 그렇게 이혼을 하고 찾을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자녀들의 가슴에 그렇게 피멍들게 하는 그 아비, 어미가 진짜 부모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뒤늦게 후회하며 아이들을 찾아가봐야 아이들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상처가 곪은 지 오래입니다. 사람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쉽게 정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세계였는데 그 세계가 허물어진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떻게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 아이들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반드시 불행해집니다.

C. 자신과의 관계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신과의 관계 또한 파괴됩니다. 자신과의 관계가 파괴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혼을 결심할 때에 이것으로 내 인생을 끝장내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혼할 때 꿈꾸는 것은 새 출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가정을 깨뜨렸다는 가책, 그리고 내가 아이들을 버렸다는 가책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찌 새 출발이 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는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이 그를 용서해주셨는데도 자신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사단의 좋은 올무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평생을 자유롭지 못하게 살아갑니다.

V. 사랑으로 고난을 이김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참으십시오. 사랑으로 고난을 이기십시오.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참을 수 있습니까? 목숨을 걸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혼을 결행決行하는 대부분의 남편과 아내들이 은혜가 고갈된 상태에서 결정을 내립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올바른 결정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은혜가 고갈되면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나에게 많은 고난이 있어도 은혜가 충만하면 고난이 예수의 고난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 고난을 통해서 주님과 한 몸이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런 결정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주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가정을 지키려고 애를 써도 내게 은혜의 자원이 부족하면 남편의 허물과 아내의 잘못이 그대로 보입니다. 은혜가 고갈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이 자기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허물 때문에 남편이 미워지고 그 잘못 때문에 아내와 살기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를 보십시오. 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가지고 주님 앞에 울며 매달렸습니다. 외롭고 괴로울 때 주님 앞에 나아가서 매달리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면 그 은혜는 우리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꽉 채웁니다. 그 때에 남편이 영혼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이 충만해지면 남편의 허물이 남편과 나누어져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내의 허물이 아내와 나누어져서 보이게 됩니다. 허물과 과오는 밉지만 그 사람은 용서가 됩니다. 그래서 영혼으로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은혜를 받고 위기를 넘긴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간증입니다.

그런데 은혜의 자원이 없으면 미움과 원망, 그리고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대한 한탄, 이런 것들로 마음과 감정이 뒤엉켜져서 혼돈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죄가 아주 좋아하는 환경입니다. 그러니까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을 하는데 성령의 비추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단이 가장 어리석은 결단입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결단에 열매를 오랫동안 거두어들이고 특별히 죄 없는 자녀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후에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하는 그 삶이 과연 어떠한 삶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혼을 결심하게 되는 것은 거의 죽음에 버금가는 결심입니다. 그러니 남편과 헤어져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기 전에, 아내와 갈라서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기 전에, 목숨을 걸고 한번 하나님께 매달려봐야 되겠다는 결심을 가지기를 권합니다. “하나님, 우리 가정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사랑할 수 없는 내 아내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사랑할 수 없는 내 남편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됩니다. 그럴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을 거의 못해본 상태에서 결단을 내립니다. 신앙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을 때, 주님의 인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지혜로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깨트리는 훈련이 안 된 사람들의 결혼에는 불행이 먹구름처럼 드리워져 있습니다. 가정에 돈이 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남편의 진정한 회심을 위해 기도하고 아내의 진정한 회심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둘 다 회심한 신자여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려고 하면 말씀을 듣고 깨트려지는 남편, 조금이라도 남편을 거스르려는 감정이 생기면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깨트려져서 그 남편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아내, 그런 자기 깨어짐의 세계를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을 때에야 부족하지만 계속 다듬어지면서 주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혼하기를 사모하지 말고 고난도 이기고 슬픔도 이기게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늘 구하십시오. 그리고 한번 다시 눈을 떠서 여러분들의 아내나 남편, 그리고 아이들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가득 차 있으면 내 남편이 그렇게 불쌍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 은혜가 있으면 내 아내가 그렇게 가엾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 은혜가 내 안에 있으면 아이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목이 멥니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꺾고 하나님의 선한 목소리를 따라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가정이 곤고하고 어려울수록 육체의 편안함을 따르지 말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울 때도 친구를 찾아가서 울지 말고 주님을 찾아 우십시오. 괴로울 때도 주님을 찾고 주님과 만나십시오. 은혜를 받으십시오.

VI. 결론과 적용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이 죄를 짓고 난 뒤, 집안에는 칼부림이 그치지 않았고 왕자들의 난亂, 그리고 수많은 투기와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 했기 때문에 찾아온 피할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고난 속에서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을 참회하였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왕이었지만 언제나 가난한 자로 살았고,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주님만을 앙망仰望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죄의 대가로 주어진 징계의 많은 고통이었지만 후에는 다윗을 오늘날 우리가 아는 다윗으로 만드는 훌륭한 성화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안식이 없는 삶이었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이 세상의 왕국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고, 또 그랬기 때문에 날마다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을 누리는 성도로서의 기쁨을 찾으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깨트리는 고통 속에서 마음이 아파도 그렇게 자기를 꺾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 안에 있는 하나님 당신을 향한 사랑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보이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께서 거기에 세워 주셨고 그렇게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어제나 오늘도 변함없이...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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