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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을 찾아서 (마 5: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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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아서(마 5:21-24) 

인간은 참된 행복을 찾는 존재입니다.
행복을 찾고자하는, 그 욕구를 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이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추구해 나갈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인생은 진짜 행복을 찾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기쁘다 구주로 외치며, 그 주님을 마음속에 모신 바울은 살전 5:16에서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행복을 찾아다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원치 않는 괴로운 문제가 터집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 가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는 말이 “인생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야” 죠.
그리고는 슬퍼하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놀라게 됩니다.
이런 아픔을 해결하지 아니하고 가슴 속에 품고 있으면 울화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처는,
울화통을 터트려도,
붕대를 감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푸념을 늘어놓아도,
그 상처를 아물게 할 수는 없죠.

그러므로 이런 때를 잘 대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토록 발목이 붙잡혀서 꼼짝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분노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불같은 분노를 내기도 하고요,
으르렁 대며 덤벼 들 수도 있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화를 내는 것은 지금 내가 화나 있다고 알리기에는 좋지마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두고 두고 되새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수시로 넋두리를 하면서 주위를 맴도는 거죠.
그러나 이러면 문제는 다시 일어나고, 정신적으로는 다른 병에 걸리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꿀벌을 보세요.
벌은 독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쏘이면 아프고, 심지어 생명을 잃기도 합니다.
그러나 꿀벌은 그 무서운 독침을 함부로 사용하지를 않습니다.
조절을 합니다.

사람이 조절을 잘하지 못하면 난폭한 행동이 솟구치게 됩니다.

추잡스러운 욕설들,
손으로 때리는 것,
발로 문을 걷어차는 것,
물건을 집어 던지는 것,
창문을 열고 뛰어 내리기도 합니다.

동물이 조절을 하듯이, 인간은 누구나 이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잘 조절해야 합니다.
그러나 조절이 안 될 때는
분노가 지나치게 되고,
일시적인 발광이 일어나기도 하고,
분에 못 이겨서 온 몸에 시나를 뿌리고 분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잘 조절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왜 분노가 일어났는지를 물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를 화나게 하는 것들을 이겨 내자는 말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일 겁니다.

아픔이 크지요,
그 마음을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그러나 그 아픔은 매우 보편적인 거예요.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일어난 그 어떤 일도 눈을 크게 뜨고 보면,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여러 명 있다는 것입니다.
지나간 상처는요,
내가 최초의 사람이 아니고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최후의 사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마음에 이 마음에 분노가 쌓이지를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일을 위해 주님이 다른 길을 나에게 주시는 과정으로의 고통으로 여겨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관점을 다르게 가지라는 것입니다.
왓츠는 끓는 주전자를 보면서 증기기관차를 만들었고,
프랭클린은 번개 불 속에서 어둠을 밝히는 전기를 보았고요,
쥐 하면 징그럽죠?
그러나 디즈니는 그 징그러운 쥐에게서 ‘미키 마우스’를 만들어 냈듯이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을 바라보는 인생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더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나의 아버지이시다.

무엇을 보느냐는 두 개의 그림.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다’

세 번째로> 고통스러울 때 주위의 도움을 받는 것도 매우 귀한 일입니다.
인생의 경험을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야기를 안하고 그냥 입을 다물면 다 깊은 고통으로 빠지게 됩니다.

지금 내가 너무 어렵다고,
솔직하게 조언을 구하고 그 조언을 충고를 잘 받아드리면 되새김질 하는 고통의 악순환을 끊을 수가 있습니다.

네 번째로> 분노는요 분노를 통해서 배우는 기회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금붕어를 집어넣는 수족관이 있어요. 그리고 이 수족관을 다른 유리로 칸을 막은 다음에 메기를 넣으면 처음에는 붕어를 잡아먹으려고 메기가 달려들다가는 유리벽에 부딪치게 되죠. 이런 동작을 여러 차례 반족하면서 계속 부딪치게 되죠.
나중에는 유리벽을 거두어도요 휙하고 달려들다가는 옛날의 그 유리벽이 있던 곳 앞에 서면 멈칫거리면서 돌아선다는 거예요.
잡아먹을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도 자포자기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일을 통해서 배우려는 사람은 약간의 어려움이 있어도 그 장애물을 뛰어 넘기만 하면 진자 영웅이 되고, 그 후에는 좋은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행복하려면 용서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용서와 화해를 기반으로 합니다.
용서는
주는 것이고(forgive)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며(forget)
저주나 악담 그리고 원한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for-sake)
무엇보다도 용서는 상대방의 자리에 내가 서 보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될 때에 그제서야 용서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남을 용서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고,
은혜를 체험하였다고 할 수 있고,
중생하였다고 말할 수 있고,
헌신 생활을 하고 있다고,
나는 나는 성령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상대방에 처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벌하지 않는 것이 용서입니다.

요 20:23절입니다.
“너희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다시 말합니다.
용서란 분한 마음이 없고,
속상한 마음이 사라지고
배신감을 다 떨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해야 그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용서할 때 그때부터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용서해야 성령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과 24절을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 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용서 받아야 할 짓을 하지 마세요.

그러나 용서해야 할 일이 있다면 용서하시다가
과거의 상처를 다 잊어버리고,
행복을 찾고,
미래의 소망에 이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
1.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2. 왜 이런 슬픔 찾아왔는지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은 잃은 것보다 주님께 받은 은혜 더욱 많음에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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