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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른 영성으로의 회복(3) (행 4: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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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영성으로의 회복 (3) / 행 4:32-35

            믿는 무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삶에는 조화가 필요합니다. 균형과 밸런스가 중요합니다. 조화의 반대는 언밸런스이고 부조화이고 갈등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건강하다“는 말은 밸런스가 잘 이루어졌다는 말이고 조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몸이 병들었다”는 말은 밸런스가 이루어지지 않고 조화가 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몸의 어느 부분이 병들고 아픈 것입니다. 삶에는 이 조화가 중요합니다. 균형과 밸런스가 잘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이 바로 그 일을 하십니다. 성령은 인격의 영입니다. 균형의 영입니다. 조화를 이루시는 영이고 회복시키시는 영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성령이 임하신 결과 잘 조화되고 균형 잡힌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천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는 곳에 마음과 관계에서 그리고 삶의 모습에서 이 같은 천국의 모습을 이룹니다.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고 나서 모두가 한마음, 한 뜻이 되어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물을 아까워하지 않고 서로 나누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완전히 조화되고 회복된 모습입니다. 사람이 성령에 힘입으면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그렇게 조화가 잘 이루어진 세상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조화의 세상이었고 균형의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만들어 주신 에덴동산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세상이었고 인간과 하나님이, 자연과 동식물과도 서로 균형과 조화가 잘 이루어졌던 세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 조화가, 균형이, 밸런스가 잘 이루어졌던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때부터 그 세상에 부조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서로 원수가 되었고 밸런스가 깨졌고 갈등과 미움이 들어왔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은 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장벽이 만들어졌습니다.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세상은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조화의 하나님입니다. 축복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회복하시는 영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그 조화가 깨진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과 자연도 서로 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연을 학대하고 파괴하자 자연이 인간을 보복하고 독을 품었습니다. 인간과 동식물도 서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서로 무서워하고 독을 내었습니다.  그뿐 아니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죄로 부조화가 일어나 몸과 마음과 영이 조화가 깨졌습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 질병이 발생하고 사고가 발생하고 싸움과 분열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던 에덴의 모습이 다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한마음 한뜻이 되었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물을 아까워하지 않고 서로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천국의 모습입니다. 조화의 모습입니다. 회복된 모습입니다. 원래 인간은 이 모습이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은 후 이 좋은 모습이 다 상실되고 정반대로 한마음이 열 마음으로 나누어지고 한뜻이 열 뜻으로 찢겨진 것입니다. 물건을 나눔이 오히려 움켜쥐게 되었습니다. 영생이 죽음으로, 나눔이 소유 집착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고로 이 세상은 부조화의 세상이 되었고 균형이 깨진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성령이 오셔서 이 불균형을, 부조화를, 온갖 갈등을 조화를 이루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 조화는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성령이 임하시면 모든 삶의 분야에 조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다음과 같은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영의 조화

본문 33절을 보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영적으로 확고해지니까 자신감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먼저 영의 균형이 깨집니다. 영이 깨지면 먼저 영의 눈이 어두워지게 됩니다. 눈이 어두운 사람은 길을 가기가 두렵습니다. 겁부터 납니다. 더듬거려야 합니다.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면 용기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내일과 미래와 운명에 대해서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영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나서 병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면 새롭게 됩니다. 영이 충천하게 됩니다. 회복되게 됩니다. 회복되었다는 말은 눈이 떴다는 말입니다. 앞이 훤히 보인다는 말입니다. 오늘과 내일과 미래와 장래에 대해서 자신감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먼저 우리의 영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깨닫게 하고 알게 하고 가르치시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면 사람이 바로 서게 되고 균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영적 균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예배에 균형이 잡힙니다. 예배에 대한 충실은 영적으로 균형이 이루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영적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아 영적 세계를 보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 찾아가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하고 무관심하고 무시하니까 예배에 불충실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예배에 충실해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울은 예배를 우습게 여겨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주일날 먼 곳에서부터 주차장도 복잡하고 바쁜데 찾아오는 것은 영성이 그만큼 건강해서 그렇습니다. 그것은 삶의 우선순위에서 모든 권위를 하나님께 두는 삶이고 영적 질서가 잘 세워졌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균형 잡힌 영적생활입니다. 이 영적균형이 잘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때 내적 자신감이 충만해지고 믿음과 소망이 솟아납니다. 그리고 영적 반응이 고조됩니다. 아멘은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멘은 반응입니다. “그렇습니다, 옳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신앙의 전적 동의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성들이 남편에게 불만이 많습니다. 그 불만은 왜 말로 표현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왜 사랑을 뼛속으로만 하느냐는 것이 여성들의 한결같은 불만입니다. 뼛속으로만 사랑하지 말고 말로 표현해 보라는 것입니다. 아멘은 그런 것입니다. 아멘은 내적 표현이자 외적 표현입니다. 신앙의 고백을 의미합니다. 우리교회는 이 아멘으로 표현하기에 아주 인색합니다. 아멘을 속으로 하는 것도 좋지만 입으로 말로 시원하게 표현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때 자아에 더 깊은 영적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어느 시어머니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며느리를 데리고 목사님에게 안수 받게 하려고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이 손을 얹고 간절히 안수기도를 했습니다. 그래도 며느리는 무응답이었습니다. ‘아멘, 믿습니다’ 해야 하고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시어머니만 옆에서 ‘아멘, 믿습니다, 주시옵소서, 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얼마 후 임신을 했는데 누가 임신을 했겠습니까. 시어머니가 임신을 했다고 합니다.

고백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성령이 이 믿음을 회복시킵니다. 소망을 회복시킵니다. 영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래서 이 성령이 하나님과 일치하고 하나 되게 하고 연합되게 하고 회복되게 만드십니다. 그 회복이 변화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믿는 무리가 한마음 한 뜻되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믿음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영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몸의 회복

본문 32절을 보면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몸의 균형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먼저 내 영이 복을 받습니다. 회복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그러면 육신의 건강이 회복됩니다. 영적 균형이 이루면 몸의 균형도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가장 균형 잡힌 신앙인의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눅 2:52절을 보면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지성과 육신과 영성과 사회성이 아주 건강하게 균형을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그 모습은 보기만 해도 아름답습니다. 균형을 이룬 모습은 외모만 보아도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몸은 성장했는데 지혜가 부족해서 불균형이 된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와 판단이 성숙하지 못한 분이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어린아이 같이 서툽니다. 판단이 어린 아이와 같은 분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어른이 되고 철들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랑받을 짓을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성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모두 불균형입니다. 영이 건강하고 균형이 이루어져야 삶의 균형도 몸의 균형도 잘 이루어집니다. 요한 3서를 보면 “네 영혼이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영이 병들면 곧 바로 정신이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몸이 병들고 곧 바로 삶이 병들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과정입니다.

  사람이 나쁜 생각을 품고 살면 내게서 성령이 떠나십니다. 삶에서 꾀와 수단과 편법과 속임과 해를 끼치는 삶이 영으로 하여금 떠나게 하는 조건들입니다. 나쁜 습관도 영의 균형을 깨고 은혜를 오래 지속시키지 못하게 하는 조건들입니다. 폭주, 담배, 약물사용도 영을 소멸시키고 결국 몸의 균형을 흐트러트리게 하는 조건들입니다.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책감을 갖게 합니다. 죄책감은 나를 약화시킵니다. 마음 한구석을 불안하게 하고 기쁨을 좀먹게 합니다. 그때 외부적으로 다가오는 어려움이나 고난 그리고 힘든 일들을 이길 능력이 줄어들어버립니다. 그래서 결국 삶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고로 영이 병들면 다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운동을 열심히 하면 건강해진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면 운동하는 선수들은 모두 건강한 것입니까. 보약을 먹으면 건강해진다고들 말합니다. 정말 보약만 먹으면 다 건강해 지는 것입니까. 음식을 가리고 무공해 식품만 먹으면 건강해 진다고들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먼저 조화와 균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영이 내 안에 있어 내 몸과 정신과 마음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해집니다. 그때 내가 무엇을 먹어도 맛이 있습니다. 가난해도 그 삶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것이 건강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내 몸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내 몸은 하나님의 영을 담는 그릇입니다. 정신을 담는 그릇입니다. 나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몸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고 내가 주 안에 거하게 되면 그 상태가 가장 조화가 잘된 상태입니다. 그 삶이 가장 복된 조화를 이룬 삶인 것입니다.

지성의 조화

영은 깊이 헤아리게 하고 깨닫게 하고 이해하게 해서 지혜로운 판단을 가지고 살아가게 만드십니다. 말씀을 깨달을수록 지혜의 깊이가, 분별력이, 통찰력이 발생합니다. 그래야 분별의 삶을 살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한마음 한뜻”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깊은 깨달음과 깊은 분별력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눈을 뜨고 알고 보니까 네가 내 형제로 보이고 하나님의 자녀로 보이고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낌없이 나누고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면 목적이 발생합니다. 뜻이 발생합니다. 동기가 발생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이성으로, 생각으로,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히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래서 고민했습니다. 거역할 수도, 불순종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하다가 아브라함은 순종하기로 작정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분명 하나님의 명령이니 결과도 좋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지성은 믿음에 기초한 지성이라야 온전한 것입니다. 내가 판단하는 지성은 미완성이고 내 중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지성인들이 할일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 판단의 기준이 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지성, 판단, 결단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내 지성, 내 판단으로 생각해 보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기준을 두고 생각하니까 순종할 믿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칼을 빼들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이 분별의 삶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성숙시킵니다. 삶을 풍부하게 하고 절도 있게 합니다. 이것은 영적 균형이 잘 이루어질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영적인 조화를 잃으면 몇 가지 발생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불안함입니다. 매사가, 오늘 일이, 내일 일이, 미래가, 장래가, 운명이 두려움으로 엄습해 옵니다. 또 허탄한 것에 몰두하게 되고 분별력을 흐리게 합니다. 그때 허무한 것, 부질없는 것, 허탄한 미신에 미련이 미치게 됩니다. 미신, 굿, 부적, 점, 사주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허탄하고 허무맹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 균형을 잃게 되면 이런 것에 미련을 두고 기웃거리게 됩니다. 기준이 흔들리고 중심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깊은 지혜를 깨닫게 합니다. 역사의 흐름을 깨달을수록 영이 맑아져서 모든 것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알게 하고 깨닫게 합니다.

관계의 회복

본문 32절을 보면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했습니다. 관계의 완전을 의미합니다. 본문을 보면 이웃을 진정으로 발견하고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입으면 이웃이 눈에 보입니다. 형제애의 깊은 관계를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하나 됨을 의미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에게 가장 조화를 이루기 어려운 것이 관계의 조화입니다. 이 관계가 서툰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좌충우돌 합니다. 잘하고 싶은데 그것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가정의 관계에서부터 균형이 깨지고 싸움이 발생합니다. 부부간의 관계가 얼마나 좋은 관계입니까. 이 관계는 반드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관계입니다. 그 때 가정이 건강해 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되면 서로 원수가 됩니다. 가장 무서운 관계로 전락합니다.

결혼해서 살아가는 10쌍의 부부에게 물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현재의 남편과 결혼하겠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그중 두 쌍만 다시 결혼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에게 “남편을 정말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사랑은 무슨 사랑, 바꾸어 보아야 그놈이 그놈이지, 또 길들이려면 힘드니까 그냥 사는 것이 낫겠다 싶다“하고 말했습니다.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것은 내 능력으로는 부족합니다. 성령의 은혜로 힘으로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 내가 눈을 뜨게 됩니다. 그 눈은 나를 발견하게 하는 눈이고 너를 발견하게 하는 눈이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는 눈을 뜨게 되고 그때 너에게 나눔이 있고 너의 값을 발견해서 너를 소중히 여기게 하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서 회복이 주어지고 조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세상에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원래 이 세상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던 세상이었습니다. 협동의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자연, 이웃과 나 자신과 영적으로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던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죄가 들어옴으로 이 조화가 부조화로 깨져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자연과 이웃과 자기 자신과 불화와 갈등의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온갖 전쟁과 불화와 갈등으로 가득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령은 이를 다시 회복시키려고 부지런히 사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회복을, 자연과의 회복을, 죄로부터의 회복을, 자신과의 부조화에서 회복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한마음 한뜻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내안에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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