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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폭적인 의탁 (막 7: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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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폭적인 의탁 (막 7:31-37)

[40대, 이제는 건강에 미쳐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중국의 교수이며 의사인 홍자오광이 지은 책입니다. 이 책에서 물질문명이 크게 발전하는 현대사회에서 만성병이 계속 증가하고, 발병 연령이 점차 낮아지는 이유에 대하여 3가지로 정리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몰라서 실천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즉, 몰라서 병이 생기고, 몰라서 병이 악화되어 죽는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알고는 있지만 실천할 형편이 못된다고 말합니다. 중년층의 대부분은 건강지식이 있고 건강을 원하지만 일과 가정에서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피곤을 풀지 못한 채 무리한 생활을 지속하여, 건강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생명을 단축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강 지식을 갖고 있지만 의지가 약하거나 끈기가 부족해 끝까지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흡연을 예로 들어 보면 100명 중 95명이 흡연의 유해성에 대해 알고 있는데, 그 중에서 금연을 결심한 사람은 50명이고, 그 중에서도 실제로 금연을 한 사람은 4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현대인들이 둘째와 셋째 부류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들음과 깨달음, 깨달음과 행함의 사이에는 이처럼 현격한 거리감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당할 때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탁하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 84:12)”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렘 17:7)”라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어떤 문제를 당하면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건강 생활에 막히고, 쌓이고, 매이고, 맺히고, 꼬이고, 끊어지고, 터진 것이 있습니까? 경제 생활에 막히고, 쌓이고, 매이고, 맺히고, 꼬이고, 끊어지고, 터진 것이 있습니까? 인간관계에 막히고, 쌓이고, 매이고, 맺히고, 꼬이고, 끊어지고, 터진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히고, 쌓이고, 매이고, 맺히고, 꼬이고, 끊어지고, 터진 것이 있습니까? 우리 예수님께 전폭적으로 의탁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처럼 “에바다” 여리는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막히면 건강을 잃습니다. 열려야 합니다. 피가 온전히 통해야 합니다. 신경이 온전히 통해야 합니다. 막히면 인간관계에 질병이 생깁니다. 맺히면 풀어야 합니다. 열려야 합니다. 마음이 막히면 응어리져 속병을 앓습니다. 풀려야 합니다.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막히면 신앙에 질병이 걸립니다. 들을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습니다. 열려야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들으면서 에바다의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막힌 것이 무너지고, 쌓인 것이 녹아 버리고, 매이고 맺힌 것이 풀리고, 꼬인 것이 정상적으로 회복되고, 끊어진 것이 연결되고 터진 것이 고쳐져 정상적으로 통하는 에바다의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방 여인의 딸을 고쳐 주시고 이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렀습니다. 아주 긴 여행입니다. 당시 차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 몇 개월이 걸렸을 것입니다. 데가볼리 지경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군데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 주니까 그가 데가볼리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전하였습니다. 그 때 모든 사람이 기이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성경은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막 5:20)”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은 듣고 많은 병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어눌한 자란 말할 때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말이 불분명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들을 수도 없고 말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말을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사람들이 분간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아마 후천적으로 귀가 어두워진 사람인 듯합니다. 선천적이면 말도 전혀 못할 것입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처럼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부모도 기가 막힐 것입니다. 오늘날 육신적으로는 말하고 듣지만 심리적으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의 말 듣기를 못합니다. 귀를 막고 삽니다. 그러니까 통하지 않습니다. 엉뚱한 말을 합니다. 상처 주는 말을 합니다. 증오하는 말을 합니다. 질투하는 말을 합니다. 상대를 멸시하고 죽이는 말을 합니다. 심리적인 동맥 경화증에 걸리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아에 사로잡힙니다. 선입관, 독선, 고정관념, 전통에 사로잡혀 통하지 않습니다.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부모가 너무 간섭하고 사사 건건 몰아세우면 심리적 자폐증에 걸립니다. 말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세상에 너무 시달리면 입을 닫아 버리는 것입니다. 너무 시집살이가 심하면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의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듣지 못하면 말하지 못합니다. 교회에 오래 다녀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이번 단기 선교에 가는데 30살인 졸업생이 참여하였습니다. 학교 다닐 때 설교를 들으면 잘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 때 예배에 참여하지 않았는지 후회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진다고 했습니다. 그날 그날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입벌려 말하지 못합니다. 에바다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려야 합니다. 육신의 귀가, 심리적인 귀가, 영적인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주님 내 육신의 귀가 닫혔습니다. 주님 내 심리적인 귀가 닫혔습니다. 주님, 내 영적인 귀가 닫혔습니다. 열러 주십시오.”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 나와 전적으로 의탁하면 에바다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1. 방법의 전적인 의탁

이 사람들이 전혀 예수님에 대하여 듣지 못하여서 믿음이 없는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무엇을 요청합니까?
32절을 보십시오.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손을 얻고 기도해 주기를 간절히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수하면 나을 줄 알았습니다. 당시 병을 고칠 때 안수를 통하여 했다고 합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딸을 고쳐 달라고 할 때도 안수를 요청했습니다(막5:23).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안수하여 고쳤습니다.(막6:5)

이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1)안수가 아닌 인생의 골방에서 개별적인 만남을 통해

33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갑니다. 오늘날도 의사가 병을 고칠 때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은 중환자실이나 무균실로 구분하여 격리 수용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환자를 안정시키고 최상의 상태에서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외부 질병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로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막히고 맺히고 응어지진 심리적, 영적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주님과 단둘이 있는 영혼의 광야로 부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질병일 수도 있고, 환난일 수도 있고, 실패일 수도 있고, 뜻하지 않는 불행일 수도 있습니다. 일에 묻혀 있을 때는 주님을 단둘이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단둘이 있는 곳에서 육신의 귀를 열어주고, 마음의 귀를 열어 주고, 영적 귀를 열어주기 위해 주님과 단둘이 있는 골방으로 초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방법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어려움을 줍니까? 왜 이런 고독의 시간을 줍니까? 이 고통이 어느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까? 그러나 그 때가 주님과 단둘이 만날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고 설 때입니다. 귀가 열리고 입을 열러 주기 위한 시간입니다.

[휴먼 네트워크 세상의 행복한 리더]의 저자 송은숙 사장의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남편 이인동 박사는 한국 인식기술을 창업한 사람입니다. 1994년 대한민국 최초의 문자인식 프로그램 '글눈'을 개발,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업계의 큰 반향을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코스닥 상장 직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절망 가운데 처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는 구급차 안에서 울부짖었지만 남편은 아무 대답이 없었고 남편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자, 남편은 꿈결처럼 살며시 눈을 뜨고 "은숙아 난 괜찮아."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 후 절망가운데 죽으려 했지만 세 딸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었고 대전 시내를 미친 여자처럼 쏘다니다 아무 교회에나 들어가서 기도인지 원망인지 모를 말을 하면서 울었답니다. 남편을 먼저 보낸 아픔보다 더한 삶의 괴로움들이 덮칠 때마다 "하나님, 제발 오늘 하루만 버틸 힘을 주세요."라고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 절망의 늪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믿음의 힘으로 이겼고 아픈 만큼 성숙해져 분명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다는 믿음으로 성장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 믿음의 힘으로 (주)한국 인식기술 대표이사, (사)한국 여성벤처협회 이사, (사)대덕 이노폴리스협회 이사, 중소기업청 심의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통의 순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을 단독자로 만나 에바다의 체험을 할 때입니다. 때로는 내 방법은 안수이지만 우리 예수님은 홀로 우리를 단독자로 서는 인생의 골방, 막장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2)안수가 아닌 각 개인이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의 방법

예수님은 그를 홀로 데리고 가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었습니다. 그는 어떤 말로 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고침받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신체적 접촉을 통해, 문제 있는 부위를 접촉함으로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손은 창조의 도구입니다. 예술가의 손은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어 내고 외과의사의 손은 질병을 고쳐줍니다. 하나님의 손이 인간을 흑으로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능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에스라를 도와 백성들을 이끌고 바벨론 포로에서 무사히 귀환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손이 도와 성전 재건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도와 느헤미야를 통하여 성벽을 재건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손으로 그들이 요구한대로 안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합니까? 침을 뱉아 그의 혀에 대십니다. 이것을 보면 어떻게 예수님이 저렇게 비위생적으로 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상식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식 수준으로 그냥 안수하시던지, 아니면 그냥 말씀을 선포하여 치료해주시면 될 것이지 왜 이런 유치한 방법을 쓰시느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들을 수도 혀가 굳어져 잘 말할 수도 없는 이 사람에게는 가장 좋은 사랑의 방법이었습니다. 침을 발라주는 것은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침은 더러움의 상징이 아니라 치료의 상징입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어릴 때 벌레 물리면 침을 발라 주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벌에 쏘여도 침을 먼저 발라줍니다.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입을 맞추면 침을 나눕니다. 이것은 더러움이 아닙니다. 최고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주님의 표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막힌 것이 무너지고, 쌓인 것이 녹아 버리고, 매이고 맺힌 것이 풀리고, 꼬인 것이 정상적으로 회복되고, 끊어진 것이 연결되고 터진 것이 고쳐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이해 못할 방법으로 사랑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욥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욥 5:18).”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안수하거나 만지심으로 치유하셨습니다.
문둥병자를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치유하였습니다(마태복음 8장 1-4절) 누가복음 13장 13절에 보면 귀신들려 18년간이나 꼬부라져 펴지 못한 여인에게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열두해의 혈루증 여인(마5:25-34)은 옷자락에 손을 대어 치유받았습니다.

말씀과 명령으로 치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13절에 보면 백부장의 하인이 심한 중풍병으로 고생할 때 말씀으로만 치유하였습니다. 나사로를 살릴 때(요11:43)와 열명의 문둥병자를 치유해 주셨을 때(눅17:14), 거라사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셨을 때(막5:8), 신하의 아들을 멀리서 치유할 때(요4:50)도 말씀과 명령으로 치유하였습니다.

기도로 고치셨습니다. 예수는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시기 전에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요11:41-44). 가나안 여인의 딸에 대한 치유는 그 여인 자신의 간절한 기도를 통한 것이었습니다(마15:25). 당사자의 믿음을 보시고 고치셨습니다. 혈루병을 치유받은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5:34). 두 명의 소경들을 치유해 주실때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9:29).
대화를 통해 고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3-30절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대화를 통해 심령을 치유해 주었습니다. 때로는 말씀을 통하여, 때로는 안수를 통하여, 때로는 기도를 통해, 때로는 믿음을 통해, 때로는 침과 흙을 통해, 때로는 대화를 통해 치유해 주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입니다.

3) 안수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 탄식하는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침을 혀에 바른 후 어떻게 합니까? 하늘을 우러러 탄식합니다. 막히고, 쌓이고, 매이고, 맺히고, 꼬이고, 끊어지고, 터진 것을 보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십니다. 신음과 같은 소리고 그 사람의 처지를 마음 속 깊이 동정하였다는 말입니다. 불쌍히 여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도 하늘을 우러러 보고 축사하셨습니다. 같이 아파하시고 같이 비명을 지르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비참함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비참함 속으로 뛰어 들어오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버림받음을 당신의 버림받음으로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을 대신하여 채찍을 맞아 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막힌 것을 보시고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건강 생활에 막히고, 쌓이고, 매이고, 맺히고, 꼬이고, 끊어지고, 터진 것으로 탄식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경제 생활에 막히고, 쌓이고, 매이고, 맺히고, 꼬이고, 끊어지고, 터진 것으로 탄식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인간관계에 막히고, 쌓이고, 매이고, 맺히고, 꼬이고, 끊어지고, 터진 것으로 탄식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히고, 쌓이고, 매이고, 맺히고, 꼬이고, 끊어지고, 터진 것으로 탄식합니다.
이번 단기 선교 때 단동에서 배를 타고 신의주 북한 땅 가까이 갔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옷을 벗고 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북한 병사들이 욕을 했습니다. 영혼이 죽고, 양심이 죽고, 경제가 죽고, 땅이 죽어가는 땅에 대하여 안따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상에서 아이들과 함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모두 눈물을 흘리면 기도하였습니다. 북한 땅을 보시는 예수님의 탄식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아픔, 우리의 고통, 우리의 막힘, 우리의 맺힘, 우리의 찢김에 대하여 우리 예수님은 탄식하며 기도하고 계실 것입니다.

4)안수가 아니라 말씀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탄식의 기도를 드린 후 어떻게 하십니까? 능력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에바다” 열리라는 말입니다.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라는 말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막힌 문이 열리라는 말입니다. 막히 육신의 문이, 막힌 경제의 문이, 막힌 인간관계의 문이, 막힌 영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열려야 합니다. 나사로야 나오라는 능력의 말씀이 선포될 때 돌무덤이 열리고 나사로가 살아나듯이 우리 영혼이 오늘 에바다라는 말씀을 들을 때 열려져 하나님과 매일 소통되고 사람과 소통되어 행복해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닫혀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에바다의 역사가 일어나기 바랍니다. 마음이 상처로 맺혀 있습니까? 에바다의 역사가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경제의 문이 닫혀있습니까? 에바다의 역사가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영성이 뛰어난 사람은 열려 있는 사람입니다. 하늘을 향해, 자신을 향해, 이웃을 향해,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에바다 할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병든 사람은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렸습니다.
그것을 보는 주변 사람들은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37절을 보십시오.
경탄합니다. 심히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 잘 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하신 모든 일은 원더풀이라는 것입니다. 감탄사가 나옵니다. 감사의 말이 나옵니다. 이게 혀가 진짜 풀리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 낼 때는 예수님을 나가라고 했던 그들이 이제는 축복의 말, 사랑의 말, 격려의 말, 위로의 말, 찬양의 말이 나온 것입니다. 내가 에바다 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 나와 전적으로 의탁하면 내 질병으로 굳게 닫힌 건강의 문이 열립니다. 예수님께 나와 전적으로 의탁하면 맺힌 인간관계의 문이 열립니다. 예수님께 나와 전적으로 의탁하면 풀리지 않던 경제의 문이 언젠가 열리게 됩니다. 예수님께 나와 전적으로 의탁하면 영적인 문이 열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을 전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의 말이 “예수님이 다 잘하였도다”라는 말로 원더풀로 바뀌는 것입니다.


2. 성취 후 전적인 의탁

이런 에바다의 역사를 일으키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부탁하였습니까? 36절을 보십시오. “경계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는 자로서 잘 못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였습니다. 그 고난을 받기 위해 오셨는데 예수님이 사람들에 의해 세상의 왕으로 추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고 그것이 알려지기를 원했습니다. 기적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이 알려지기를 예수님은 원했습니다.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메시아가 오셔서 무엇을 할 것을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 35:5-6)”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병자가 치유되고, 굶주린 자가 먹고, 귀신들린 자가 고침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왜곡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 영광을 받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메시아 사역을 감당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침묵을 명하십니다. 귀신에 대한 침묵 명령을 합니다.(막1:24-25;1:34;3:11-12) 치유 이적에 따른 침묵명령을 합니다.(1:43-45; 5:43; 7:36; 8:26) 베드로 고백 후 침묵명령을 합니다.(8:29-31; 9:9)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경계하실수록 더욱 널리 전파하였다고 했습니다. 물론 전할 수 밖에 없는 감격적 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의 명령과는 아량곳 없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자랑하고 증거했습니다. 고의적인 거역은 아닙니다. 자기 생각에는 옳고 자기 나름대로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더 존중하는 것입니다. 정작 아쉬운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자기마음대로 행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순종했기 때문에 치유받은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내용이 좋으면 방법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참된 순종은 자신의 생각으로 주인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참뜻을 깨달아 그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열림을 통해 주님이 메시아이신 것,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길 원합니다. 참된 아들로 공동체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기까지는 외부에 비밀로 지켜져야 했던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말씀에 의탁하며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지? 왜 이런 상황을 주시는지? 왜 이런 고통이 오는지? 왜 침묵해야 하는지? 이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묵히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기록된 말씀이 있습니다. 해석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적용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에게 감동을 주고 내 귀를 열어주고 내 입을 열게 해주는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 붙들고 이해되지 않아도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들이 2005년 8월에 통화에 있는 한 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왔습니다. 그 때 조그마한 시골 예배당이었습니다. 전도사님께서 교회를 건축하고 싶다고 하여 우리가 작은 헌금이지만 헌금을 해 드리고 같이 교회 건축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 후 그 전도사님에게서 전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교회를 짓는데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건축비가 3천만원 이상이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으려고 준비해 놓은 것은 천 만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 헌금은 우리 1대 임직자들이 임직을 기념하여서 단독으로 지으려고 한 헌금이었기 때문에 드릴 수가 없다는 응답이 왔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지만 성도들과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은 들었지만 무거운 마음을 안고 도와주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2년 만에 그 교회를 다시 방문하여 예배를 드렸는데 아주 현대식으로 교회를 잘 지어 예배를 드렸습니다. 서울에 계시는 어느 장로님께서 3천만원을 건축 헌금해 주어지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 84:12)”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렘 17:7)”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2)”

우리가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의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복입니까? 의지할 것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든지 우리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됩니까?
건강 생활에 막히고, 쌓이고, 매이고, 맺히고, 꼬이고, 끊어지고, 터진 것이 있습니까? 경제 생활에 막히고, 쌓이고, 매이고, 맺히고, 꼬이고, 끊어지고, 터진 것이 있습니까? 인간관계에 막히고, 쌓이고, 매이고, 맺히고, 꼬이고, 끊어지고, 터진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히고, 쌓이고, 매이고, 맺히고, 꼬이고, 끊어지고, 터진 것이 있습니까? 우리 예수님께 전폭적으로 의탁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처럼 “에바다” 여릴는 은혜가 우리에게 힘하여야 하겠습니다. 모든 막힌 것을 열고 에바다의 역사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전폭적으로 의탁하고 주님께 나오면 됩니다. 막힌 것이 무너지고, 쌓인 것이 녹아 버리고, 매이고 맺힌 것이 풀리고, 꼬인 것이 정상적으로 회복되고, 끊어진 것이 연결되고 터진 것이 고쳐져 정상적으로 통하는 에바다의 역사가 일어 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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