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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하는 믿음, 구원받아야 할 믿음 (마 7: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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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결론과도 같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팔복, 세상의 소금과 빛, 살인, 간음, 맹세, 원수 갚는 것, 구제, 기도, 금식, 염려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 좁은 문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 이 모든 말씀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주는 경고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주님을 믿는 우리들로 하여금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는 말씀이다. 자기 자신에게 속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속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을 것이다. 물론 믿음의 측면에서 바라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1) 불신자들이 있다. 불신자들은 어떤 면에서 자기 자신에게 속은 사람들일까?
불신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교회도 안 나온다. 그들은 천국도 지옥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최후의 심판 때 심판을 받고 지옥에 떨어질 때 그들은 놀랄 것이다. 전혀 믿지 않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2) 또 한 종류의 자기 자신에게 속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때로는 신앙인(그리스도인, 신자)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현상이 나타날 때가 있다.

나는 예수를 믿었고, 그래서 나는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했을 때는 그들은 얼마나 당황하고 당혹스럽겠는가?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냐구요? 예수님은 오늘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오늘 말씀은 불신자들을 향한 경고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이다. 어쩌면 우리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오늘 자신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그런가 너 자신을 한번 살펴보라”고 하신다. “너의 믿음이 참된 것인지 거짓믿음인지를 한 번 시험해 보라”고 하신다.


2.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신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셨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었는가?

1) 정통 신앙의 고백을 했다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그가 바른 신앙고백(정통신앙고백)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다. 그는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서 죽으셨음을 믿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정통신앙고백을 한 사람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들이 있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롬10: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고전12:3)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주라 부를 수 없다.”

이처럼 바른 신앙고백은 중요하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머리로만, 지적으로만, 입술로만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복음서에는 귀신들도 바른 신앙고백을 했다고 한다.

(눅4:48) “귀신들이 소리 질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결단코 구원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했다.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한 분 하나님 앞에서 믿고 떠는 것.” 사실 이보다 더 정확한 신앙고백이 있겠는가? 그러나 결코 귀신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

  바른 신앙의 고백은 지적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른 신앙을 알고 있다는 것과, 바른 신앙을 소유한다는 것은 다소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바른 신앙고백은 천국에 들어가는 필수 조건이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신앙고백 이상의 것이 되어야 한다.”

2) 열심과 열정만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21절)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22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주여 주여’ 를 두 번 반복해서 부른다고 하는 것은 그 만큼 예수님을 향한 열심히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호통을 치셨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열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고, 또 실제로 열심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열심의 동기가 바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열심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열심도 있고, 인간적인 열심도 있다.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비롯되는 열심도 있지만 자신의 종교적인 만족과 이익을 위한 열심도 있다. 예수님의 책망을 들었던 사람들은 주님을 향한 진정한 열심보다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종교적 열심만을 품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내 자신을 보라. 당신에게는 열정이 있는가?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으로 열정을 품었는가? 아니면 나의 유익을 위해서, 내 만족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열정인가? 예수님은 이런 후자에 속하는 열심을 가진 자들을 향해서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3) ① 명의도용신앙으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22-23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들은 선지자 노릇했고, 귀신을 쫓아냈고, 많은 권능을 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주의 이름으로 했을 뿐이다. 주의 이름으로 했다는 것은 내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능력을 믿고, 주님의 이름으로 했다는 그런 말이 아니다. 다만 선지자 노릇하기 위해서,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기 위해 다만 주님의 이름을 빌려 왔을 뿐이다. 그의 이름을 잠시 빌려 온 것뿐이다. 이름만 이용했을 뿐 진실이 없었다. 결과는 좋았지만 그 주님과 아무런 인격적인 관계가 없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신앙을 그렇게 이름 붙였다. “명의도용신앙” 그 신앙은 주님의 이름을 훔쳐 와서 다만 잠시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② 나의 종교적 행위와 활동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선지자 노릇하는 것(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 - 이 모든 것은 중요한 그 사람이 많은 종교적 행위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종교적 행위와 활동이 천국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고 하신다. 

3) 그렇다면 참된 신자의 특성은 무엇인가?

① (앞에서부터 연결해서 말씀을 드린다면) 참 신자는 팔복의 특징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다. 팔복에서 언급하는 사람들을 보라.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이 모든 사람들의 특징은 외형적이고, 지적이고, 감정의 변화나 행동만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이 변한 사람들이고, 영혼이 변한 사람들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성품이 변화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주여 주여”만 부르짖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고자 부단히 자신의 내적인 변화를 추구했던 사람들이다.

② 참 신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에 최우선 순위를 두는 사람이다. 참 신자는 나의 건강과 부와 권세보다는 자신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다. 참 신자는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거룩한 삶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③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참 신자는 바른 기초를 가진 사람이다. 참 신자와 거짓 신자를 구분하는 것은 집 모양이나 외형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토대, 기초에 있었다. 지혜로운 사람은 기초를 반석위에 두었고, 어리석은 사람은 기초를 모래위에 두었다.

  지혜로운 사람(참 신자)은 반석위에 기초를 두는 사람이다. 그는 신앙의 기초를 든든한 곳에 둔다. 그는 신앙의 기초를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님과의 관계에 둔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곳에 둔다.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보다 하나님을 알기 원하며, 자신을 알기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원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최고의 소원이다. 그는 거룩해지는 것이 최고의 소원이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모든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최고의 소원이다. 그 사람이 참된 신자이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3. 영화 밀양을 보고 나서

1) 이 영화의 줄거리는 한 과부가 삶에 어떤 고통이 찾아오고, 또 어떤 과정을 거쳐서 신앙을 갖게 되는지, 또 그의 신앙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연단되는지... 이런 것을 다루고 있지만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반성적인 기독교 시각으로 보았다.

2) 메시지
①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해 주려고 교도소를 간다. 그런데 그 안에서 그 살인자가 이미 복음을 듣고 용서함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주인공은 분노한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왜 당신은 이미 용서함을 받았는가? 그 분노를 하나님을 향해 쏟아낸다. - 나는 이런 평안을 누릴 가치가 있지만 너는 그런 평안을 누려서는 안 된다는 우리들의 편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또 마음 따로, 행동 따로인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을 보여준다. 믿음 따로, 행동 따로인 기독교. 말하는 것과 사는 것이 너무나 다른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그 속에서 내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② 그 여자 주인공이 하나님을 향해 반항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모두 기도하는 모습과 클로즈업된다. 예배당에 찾아가서 기도하는 사람들 앞에서 장의자를 두드리며 반항한다. 구역예배 드리는 가정에 찾아가서 기도할 때 창문에 돌을 던진다. 연합예배 때 목사님이 기도하시는데 가요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를 들려준다.
- 우리는 오늘도 기도한다. 우리의 기도가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가? 우리는 혹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축복만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영화는 오늘 현재 기독교의 기도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③ 그 여자 주인공은 결국 신앙의 힘보다는 그 곁에서 한 발자욱 물러서서 그를 바라보는 카센터 사장인 남자 주인공을 의지한다. -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오늘의 기독교가 멀리 계신 하나님, 높이 계신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우리 곁에서 상처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 영화는 저에게 “맹목적이고 현학적인 신앙의 이름보다는 너의 곁에서 아픔을 당하는 사람에게 실제로 손을 내밀어 그를 감싸주고 싸매어주는 것이야말로 참된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밀양은 저에게 “너의 신앙은 괜찮니?” 라고 묻는 것 같았다.
오늘 주님은 이쯤이면 됐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너의 신앙을 점검하라”고 하신다. 주님은 “너 자신에게 속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은 나에게 “너의 믿음은 너를 구원하는 참된 믿음이 되어야지,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 믿음이야말로 구원받아야 할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주님은 “너는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참된 신자가 되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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