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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각의 차이 (왕하 5:8-14, 눅 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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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에 물이 반쯤 차 있는데 한사람은 물이 반 밖에 없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한 사람은 아직도 물이 반병이나 남아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모세가 보낸 열두 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와서 이렇게 보고를 했습니다. 열 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을 도저히 점령할 수 없다고 했고, 두 사람은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아는 젊은 목사님 한분이 장신대에 출강을 하는데, 얼마 전 과로로 쓰러져서 귀에서 계속 소리가 나는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사람들에게 유명하다는 이비인후과 소개를 받아 찾아갔는데, 예수 믿는 의사 선생님이 진찰을 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이 귀에서 소리 나는 병은 마니에르라는 병인데, 기도해도 안 낫고 죽어서 눈을 감아야 없어집니다.” 의사 선생님이 “기도해도 안 낫고”라는 말은 좀 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젊은 목사는 귀에서 나는 소리가 없어져서 아주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의사는 못 고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이 고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장자의 학문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한 선비가 장자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의 사상은 크고 높지만 쓸모가 없습니다. 마치 저 앞에 서 있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저 앞의 나무는 크기는 하지만 온통 구부러지고 울퉁불퉁하여 목수들이 쳐다보지도 않거든요.”

그러자 장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거꾸로 생각해 보게. 저 나무가 구부러지고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오히려 목수들한테 잘리지도 않고 저토록 오래 살아남아 큰 나무가 된 것이 아닌가.” 이러자 선비가 지지 않고 따졌습니다. “그래도 쓸모가 없는 건 없는 것 아닙니까?" 장자가 다시 말합니다. “왜 쓸모가 없나? 햇빛이 쨍쨍한 날마다 그 나무의 그늘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원하게 쉬었다가 가는데.”

이렇게 말하는 장자에게 선비는 더 이상 대꾸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기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면 편협해지고 실수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때로 자기 생각과 다르게 거꾸로도 생각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영어에 “이디어트”(idiot)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대체로 “백치, 바보”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idios-이디오스)에서 왔는데, 그 본래 의미는 “자기만의”(one's own)라는 뜻입니다. 즉,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만 고집하는 사람이 바보라는 말입니다. 독일어에는 “Fach idiot(화흐 이디오트)”라는 어휘가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전문가 바보”라는 뜻으로 자기 전문 분야만 알고 고집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나 외에 남도 생각할 줄 알아야합니다. 물론 우유부단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자기 생각만 옳은 줄 알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위가 높아지면, 부하나 아랫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그들의 생각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특히 조심해야할 일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람 왕국의 장군인 나아만은 나병환자입니다. 이것은 요즘에는 한센인이라고 부릅니다. 본문의 전후문맥에 드러나 있는 대로 나아만은 장군으로서 왕의 최측근이었습니다. 이런 높은 지위의 사람이 나병에 걸렸으니 내놓고 말은 못하고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겠습니까? 물론 나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차라아트”는 구약시대 모든 악성 피부병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의 병은 나병이 아니라는 현대주석학자들도 있습니다. 나병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불치의 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에서는 굳이 나병이 아니라고 볼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병도 고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시리아, 곧 아람)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 (누가복음 4:27)

  어쨌든 나아만의 나병 치료는 오늘도 우리에게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자세히 말하지는 않지만 아마 나아만은 자신의 병을 고치려고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나아만의 불치의 나병치료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이 다한 곳에 하나님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계산, 세상적인 수단과 방법이 계속되는 곳에서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위대한 일을 기대하거나 경험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람군대가 전에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어린 여종이 나아만의 집에서 그의 아내에게 수종을 들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 여종이 여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주인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에 있는 예언자를 만나면 나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나아만 부부는 일개의 여종, 그것도 포로로 잡혀온 어린 여종의 말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나아만 부부는 외국에서 잡혀온 여종이지만 그녀를 착실하게 여겨 평소 신용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여주인이 남편에게 말했고, 나아만은 다시 자기 왕에게 가서 말하여 예언자를 만나러 가도록 허락받았습니다. 이스라엘에 잡혀 온 어린 여종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나아만 장군 부부에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종이 자기 아내를 통해 하는 말을 들은 나아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계속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아만은 왕의 친서와 함께 상당한 선물을 준비해서 예언자를 만나러 갔습니다. 먼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을 만나 친서를 전하고 방문한 이유를 말하니, 당시 이스라엘 왕은 이것이 아람 왕이 다시 이스라엘을 침략할 구실을 찾기 위한 계략이라고 생각하여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슬픔과 애통한 마음의 표시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왕으로서는 나아만의 나병을 고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적국에 잡혀간 어린 여종은 사마리아의 예언자가 나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정작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의 왕은 오히려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어쨌든 사마리아의 예언자 엘리사가 왕궁에서 벌어진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나아만을 자기에게 보내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는 줄 나아만이 알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나아만은 엘리사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열왕기하 5:9-10)

  이 말을 엘리사의 사환에게서 들은 나아만은 기분이 몹시 상했습니다. 본문은 나아만이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아만이 한 말이 이렇게 나옵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열왕기하 5:11-12)

  우리가 나아만이였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나아만의 생각이나 말은 어디까지나 경우에 맞고 합리적인 말입니다. 분노하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은 오히려 점잖은 편입니다. 이러한 경우 대부분의 사람은 나와 보지도 않고 사환을 시키는 엘리사의 무례하고 성의 없는 태도에 욕설과 비난을 퍼부으며 나아만처럼 분노하고 떠나려고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장면은 외국의 국가 원수의 최측근이 심각한 문제가 생겨서 힘들어할 때, 한국의 교회 목사에게 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교회에 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고 심부름 하는 사람을 시켜 청계천에 가서 세 번 씻으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찾아온 사람의 생각과 기대가 있는데 적어도 나와서 차라도 한잔 대접하고 상처도 보면서 기도해주고 자기 생각을 이야기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아만 장군의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습니다. 한국 사람도 자존심 상하면 다 때려치우는 성질이 있습니다. 자존심 상하면 천당도 안 간다고 합니다. 아무리 예언자라도 그렇지, 최소한 멀리서 찾아온 손님에게 예의는 갖추어야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본문은 거기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번의 반전이 있습니다. 정말 나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일상의 예의나 상식으로 나아만 자신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쉬운 것이라고 무시하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옆에서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나아만의 종들이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일을 행하라 말하였다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열왕기하 5:13)

  홧김에 돌아서기는 했으나,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 아닙니까? 나아만이 종들이 하는 말을 다시 잘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열왕기하 5:14)

  이 일로 인해 나아만은 나병만 고쳤을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의 나병을 고치고 그를 구원하시는데, 여러 사람들을 직간접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어린 여종, 나아만의 아내, 아람의 왕, 이스라엘 왕, 엘리사, 엘리사의 사환, 함께 간 나아만의 종들이 그들입니다. 나아만이 자기 고집, 자기 생각대로만 했다면 나병치료도 실패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도 놓쳤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나아만을 고쳐주신 과정을 잘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향하신 구원의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부모님, 아내, 남편, 특히 집안의 어린 자녀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직장의 상사, 선생님과 목사님들의 말도 들어야 하지만, 때로는 직원들이나 후배들, 미화원, 경비원들이 여러분에게 하는 말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교회 밖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결정적으로 나아만은 마지막 순간에 돌이켜서 자기 종들의 말을 듣고 예언자의 지시대로 따랐습니다.

  생각해 보면, 오늘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도 장군의 복장을 한 나아만과 같이 겉으로는 보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속에는 나병과 같이 썩고 냄새나는 죄악 된 생각과 남에게 드러내기에 더럽고 부끄러운 약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아만이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고 깨끗해 진 것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믿게 하시고 교회생활, 믿음의 생활을 하게 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과 더러움을 씻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어린 아이와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기 위해서는 나아만과 같이 “내 생각”을 바꿀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깨끗한 그릇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깨끗한 그릇은 사용할 수 있어도 더러운 그릇은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요강에 담아 주면 누가 그것을 먹겠습니까? 내 생각만 따라가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 잘못되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교회와 직장에서 어디에서나 내 생각만 고집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병환자 같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데 언제나 내가 기대하고 생각하는 대로만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사야 55:8-9)

예수님을 위한다고 수난의 길을 가시지 말도록 항변하면서 말리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단호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태복음 16:23)

나라와 민족을 위하고 한국교회를 위하고 정의와 평화를 위한다는 구실로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다가 실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일찍이 다윗 왕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 나단을 만나서 의논했습니다. 나단도 다윗 왕의 성전 건축 계획을 듣고 동의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겠다는데 무슨 반대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 날 밤에 하나님은 나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전쟁을 많이 한 사람이라 피를 많이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역대상 28:3)

  하나님께서 다윗은 전쟁에서 사람들의 피를 많이 흘리게 했기 때문에 다윗이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그의 아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도록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전해들은 다윗 왕은 두 말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아무리 명분 있고 좋은 일이라도 다윗은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랐습니다. 성전건축을 못하는 대신 그는 아들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잘 할 수 있도록 준비만 하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멋있는 신앙인의 위대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사도행전 13:22)

다윗이란 히브리어 이름 “다비드”는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다윗과 같이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프란시스코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하라고 병을 주셨다. 행복해지고 싶어 부유함을 구했는데,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걸 갖게 해달라고 구했더니,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주셨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삶이었지만, 내 맘속에 진작 표현 못한 기도는 모두 들어주셨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시편의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9:14).

  우리 모두 나의 생각과 고집을 절대화하지 말고, 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께 열납 되기를 간구합시다.
 
  - 기도 -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자녀삼아 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도와주신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이 때로는 내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고집하고, 내 뜻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길 때가 많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랑받는 주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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