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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공동체 (수 2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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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보렌교수(R. Bohren, 하이델베르그대학 실천신학 교수) 는
하나님의 공동체의 특징은 성령론적인 사고에 있다고 합니다.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성령론적인 사고라는 것입니다.
성령론적 사고란 성령을 따라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생각을 따라 사고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내 고집대로, 내가 하고 싶은 욕심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생각을 따라 사고하는 성령론적 사고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보렌>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령론적 사고는 상대방을 찬양하는 사고이다.”
성령론적 사고는 자기주장만을 내세우지 않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며 공동체의 일치와 단결을 촉구한다.
성령론적 사고는 자기를 낮추어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주하는 교향악에서
      서로서로 협력하여 화음을 이루려 한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시적인 갈등 속에서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를 말해주는 사건을 통해
    우리 내일교회도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더욱 결속되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이 끝난 후,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정복전쟁을 힘써 도운 공로를 인정받고   
      그들의 기업이 있는 길르앗 땅으로 건너가는 도중에
      요단 언덕 가에 볼만한 큰 단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그 소문이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리면서
    이 두 지파 반에 대해 분노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세워진
  실로에 있는 유일한 참 제단을 무시하고
  자신들만의 예배를 위해
        다른 장소에 예배의 단을 세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세운 볼 만한 큰 단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이 끝나고 각 지파의 기업 분배가 마쳐지자
여호수아는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에게 이제 각자 자기 소유지
즉 강 동편 길르앗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 일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이 무엇입니까?
1.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정복 전쟁 후에
  길르앗 땅으로 돌아간 일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은 무엇입니까?(1-9절)
가나안 땅 분배가 종결된 후 여호수아는
    요단 동편에서 기업을 얻은 대신
    가나안 정복 전쟁의 선봉에 서겠다고 한 약속을 성실히 수행한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의 노고를 치하한 후
    많은 전리품과 함께 그들의 기업이 있는
        요단 동편 길르앗 땅으로 돌려보내었습니다.
민32:20-32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는 모세를 찾아와
    풍요로운 요단 동편에서 살게 해 달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그때 난감한 반응을 보이던 모세는 그들의 거듭되는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가나안 전투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즉 그들의 가축과 부녀자들과 최소한의 수비대를 남겨두고,
나머지 장정들은 무장을 하고 요단 서편으로 건너가
    다른 지파와 함께 동행하여
        가나안 정복 전투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수4:12절 모세의 명령대로 이들 지파는 요단강을 도하할 때
      완전 무장을 하고 선봉에 서서 건너갔습니다.
물론 그들이 요단 동편의 기름진 땅을 차지하는 조건이었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들 세 지파가 보여준 생명을 건 헌신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아주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축복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한 마음으로 이룬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헌신과 희생이 따랐습니다.
사실 민수기 32장에 나오는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의 행동은   
극도의 이기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모세는 이들의 행동이 공동체에 악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그들의 요구에 심하게 책망하면서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요단을 건너 가나안의 일곱 부족과 처절한 전투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들만 요단 동편의 풍요로운 땅에 안주하려는 생각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사기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한 악한 행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 그들은 돌이켰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전쟁에 함께 가기로 작정한 이후,
    그들은 전쟁의 최선봉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이 처음에 전쟁에 임했을 때, 몇 년이 걸릴지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전쟁의 가장 큰 위험인
  죽음이라고 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요단 동편에 남겨진 가족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적극적으로 전쟁에 임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단 동편의 풍요를 누려보지도 못하고
  남겨진 가족들과 영영히 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면
      그들이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수4:12-13절을 보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는 모세가 그들에게 이른 것같이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들보다 앞서 건너갔으니 사만 명가량이라 ”
이들 지파의 3분의 1가량이 되는 정예화 된 장정 4만 명이
가나안 정복 전쟁의 최선봉에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과 함께 싸웠던 것입니다.
`오래도록` 약 7년간이나,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하여 가나안 정복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들의 헌신과 희생이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게 된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더군다나 민주주의라는 미명아래 집단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모두가 자기 욕심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50년 대 까지만 하더라도 천연두는 치명적인 전염병이었습니다.
1798년에 <제너>라는 의사는
    천연두로 죽어 가는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젖소에서 천연두의 면역성을 가진 우두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사람에게 주사하면
    천연두 면역성이 생긴다는 것을 학회에 보고했습니다.
학회에서 마지막 실험 단계에 들어갔을 때
당시에 유명했던 영국의 학계의 권위 있는 동료 의사들은
    질투와 시기심으로 그를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시골뜨기 의사가 의학의 ABC도 모르고
    하나님과 의학을 모독한다고 비난했습니다.
동물과 사람을 구별할 줄도 모르느냐고,
동물에게 실험한 것이 사람에게 적용이 될 수가 있겠느냐고 조롱을 하면서     
그 보고를 묵살하려고 했습니다.
만일 그 학회에서 그것이 부결이 되면 당시는 인체 실험이 매우 어려운 때이고     
권위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다시 빛을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을 머금고
`몇 달 전에 어느 사람에게 주사를 해서 듣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한 사람의 임상 실험을 가지고 되느냐며 또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자 제너는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저는 23명을 실험했고,
낳은 지 열 하루밖에 되지 않은 제 아들에게도 실험을 했습니다.`라고 말하니
그때 장내는 숙연해졌습니다. 그것은 결사적인 실험이었습니다.
    인류에게서 천연두를 없애버리기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희생이 없이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신 십자가의 복음이
      오늘 우리들에게 믿음의 본질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죽지는 못할지라도 남을 배려하는 작은 마음으로 하나 되어     
이 세상을 살맛나는 세상으로 가꾸어가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는
    누군가가 헌신과 희생이 있기에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제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이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저들이 요단 언덕에 이르러 먼저 한 일이 단을 쌓는 일이었는데
10절에 [ 볼 만한 큰 단 ] 이었다고 합니다.

볼 만한 큰 단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2. 요단 언덕에 세운 볼 만한 큰 단의 영적 의미는 무엇입니까?(10절)

[ 볼 만한 큰 단 ] 이란 규모가 큰 제단으로
  Living Bible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만큼의 큰 단’이라 번역합니다.
그러니 실로의 성막 안에 있는 단보다
    규모 면에 있어서는 더 큰 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지파 반 사람들은 7년 동안 전쟁을 끝내고
  이제 자신의 소유지로 돌아가기 위해 경계선인 요단강을 건넜을 때
      남다른 깊은 감회에 젖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일을 기념하며 또한 앞날의 결속을 다짐하는 뜻에서
    자신들이 돌아가는 요단 동편에서도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단을 크게 만들었습니다.
볼 만한 큰 단을 만든 이유는 24절 이하에 단을 만든 목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목적은 이제 요단을 건너면 가나안 땅 경계선 밖인데
나중에 자손들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단을 경계로 삼았기 때문에
    너희는 하나님의 분깃이 없다고 하면 문제가 되기 때문
후에 우리와 너희 자손들에게 증거를 삼기 위하여
    볼 만한 큰 단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볼 만한 큰 단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언약이 대대로 지키기 위한 증거로 신앙의 기념비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지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분명 이들이 쌓은 단은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신앙적 열심을 발휘함에 있어서
      좀 더 사려 깊은 주의가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항상 신앙행위를 할 때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사려 깊게 하는 것은
        공동체의 덕을 이룬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000년대 떠오르는 엘리트는 욘(yawn)족` 이라고 합니다.
욘족은 영어로 영(Young) 앤드(and) 웰시(Wealthy) 벗(But) 노멀(Normal)     
의 앞 글자로 만들어진 신조어입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욘족은 30~40대에
        수천만 달러에서 수십억 달러의 부를 일구고
        대부분의 재산을 자선 사업에 쓰면서
가족과 함께 평범한 삶을 추구하는 성향을 보이는 사람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욘족의 대표적 인물로는
    대저택을 갖고 있지만 자선활동과 촌스러운 옷차림,
      친근한 가족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 소프트 회장을 꼽았습니다.
또 야후 창업자 <제리 양>과
  이베이 공동창업자 <피에르 오미드야르> 등도 욘족으로 분류됐습니다.
욘족이라는 말은 영국 선데이 텔레그래프가
  부자들 가운데 자선활동과 가족에 충실한 조용한 삶을 사는
        새로운 엘리트를 지칭하는 단어를 만든데서 유래됐습니다.
욘족이 인정받는 사회가 바로 건전한 사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지금 강남 서초동 밤거리 길 가 주차장에 3분의 1이 외제차라고 합니다.
그것도 20-30대 젊은이들이 차주라고 합니다.
저들이 재벌의 자녀가 아니라 평범한 직장인인데도
    외제차를 타야만 남들 눈에 튄다는 것입니다.
오늘 두 지파 반 사람들이 세운 볼 만한 큰 단
비록 자기들의 힘으로 세웠고
    좋은 의미에서 신앙의 기념비로 세웠지마는
공동체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의 용사들은     
요단 언덕가인 골 지역에 멀리서도 볼 수 있는 큰 단을 쌓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요단 서편의 지파들은
그들의 행위가 율법에 어긋난 것으로 보고
    실로의 회막에 모여 전쟁을 위한 준비와 의논을 합니다.

왜? 이스라엘 지파 간에 이렇게 전쟁을 불사하는 갈등이 생겼습니까?
3. 왜 이스라엘 지파 간에 갈등이 생겼습니까?(11-20절)

그 이유는 16절에
[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오늘날 여호와를 좇는데서
  떠나서 자기를 위하여 단을 쌓아 여호와를 거역하느냐? ]
본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세워진 실로에 있는 유일한 참 제단을 무시하고
자신들만의 예배를 위해
  다른 장소에 예배의 단을 세웠다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단이 둘로 나눠지면
      이스라엘의 공동체도 둘로 나눠질 수 있다고 하는
        위기감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의 행동을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를 반역하는 행위로 규정하여     
곧 군대를 소집하여 세 지파를 심판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제사장 비느하스를 대표로 하여 각 지파에서 1명씩 뽑아
        조사단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들이 요단 언덕에 쌓은 단에 대해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17절에 브올의 죄악 때문입니다.
브올의 죄악이란 민25:1-9절에 나오는 사건으로
그들이 광야 생활 중 싯딤에 머무르는 동안
    바알 브올을 섬기면서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여
        그날에 염병으로 24,000명이 죽임을 당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비느하스의 결단력 있는 행동으로
    사건이 마무리 되고 염병이 그쳤습니다.
비느하스는 이 일을 야기 시키며 자기를 위하여 단을 쌓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죄 된 행위인지를 책망합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은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하나님 앞에 존재하므로
18절에 비록 요단 동편에 있는 두 지파 반의 죄악이라 할지라도
        모든 이들이 죄를 함께 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기업을 포기하면서라도 19절에
      요단 동편 땅에 성막이 없어서 하나님을 섬기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라면
              요단 서편으로 다시 건너와 살도록 권유했습니다.
또 그들의 패역으로 온 회중에게 진노가 임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스라엘 온 민족이 한 공동체임을 알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갈등이 생기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수많은 갈등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그 원인은 아주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고
        가치관과 사상이 다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단 동편으로 간 두 지판 반 사람들이 단을 세운 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이스라엘 공동체를 무시하고
  자신들 마음대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이스라엘과의 연합의 표시로 세운
        상징적인 기념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를 본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해
      반역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분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서로의 생각이나 가치관의 차이가 있을 때
    갈등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집단의 행동은 각기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세심하지 못하거나 성급히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은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지도자에게 그 행위의 동기를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괜한 오해를 사서
    형제들 사이에 전쟁을 치룰 뻔한 것입니다.

또한 요단 서편의 지파들도
  우상 숭배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신앙의 확고함은 인정되나
  성급하게 모든 것을 판단하고 전쟁을 준비한 것은 옳지 못합니다.
참된 신앙인이라면 타인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함께
    모든 상황에 대한 바른 안목과 침착성이 필요합니다.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바로 깨닫고
    세심한 배려와 폭넓은 안목으로
          서로 용납하는 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갈등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관계를 악화시킴으로 분규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갈등에 휘말려 싸움에 이르지 않고
    지혜롭게 그 갈등을 해결하고
이스라엘 공동체는 더욱 확고한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갈등을 해결하는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4. 서로 간의 갈등을 해소 하려고 하면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요?(21-29절)

1)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들어야 합니다.
요단 동편으로 간 세 지파가 제단을 쌓았다는 소문을 듣고
  분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 군대를 소집하고 전쟁 준비에 착수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전쟁에 임한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 이스라엘 자손이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를 길르앗 땅으로 보내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를 보게 하되 ]
무슨 말씀입니까?
반역을 응징하는 전쟁에 앞서서
    세 지파에게 사자를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는 한편,
    왜 그런 일을 하였는지 자초지종을 듣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요단 동편으로 간 세 지파가 요단 가에 단을 세운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했던 과는 달리 23-26절에
[ 우리가 단을 쌓은 것은 돌이켜 여호와를 좇지 아니하려 함이 아니거나
  혹시 그 위에 번제나 소재를 드리려 함이어든
    여호와는 친히 천벌을 내리소서 ]
[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
[ 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분의가 없느니라 하여
    너희 자손이 우리 자손으로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 우리가 말하기를 이제 한 단 쌓기를 예비하자 하였노라
  이는 번제를 위함도 아니요 다른 제사도 위함도 아니라 ]
그래서 이 단이 증거가 되어 27절 하반절에
[ 너희 자손으로 후일에 우리 자손게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분의가 없다 못하게 하려 함이로라 ]
즉 하나님께서 요단으로 약속의 땅 경계로 삼으셨기 때문에
  나중에 강 건너 사는 우리들의 자손들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증거삼기 위하여 이 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아주 순수한 목적이었음이 밝혀졌던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비일비재합니다.
갈등의 핵심 원인은 서로의 생각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다르다고 서로 정죄하고 비난한다면
    이 세상은 곧 망하게 될 것입니다.
내 생각은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그르다고 하는 오만과 아집이
  갈등의 고리를 더욱 두텁게 만들고
      이로 인하여 씻을 수 없는 오욕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등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려면
  서로의 생각과 입장을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말하기에 앞서서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는 일을 잘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의 오해가 풀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명령하는 사람` `충고하는 사람` `호소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쏟아가며 서로를 들어주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자기의 입장을 말하고 그것이 관철되기를 원하지만
    상대방의 아픔이나, 슬픔이나, 괴로움을 듣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너무나 인색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귀는 두 개, 입은 하나 주신 것은
  말하는 것보다 듣는 일을 두 배로 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갈등이 있습니까?
부부간, 부모와 자식간, 또는 성도와 성도간에..............
이 모든 해결을 이루는 방법은
  상대방의 입장을 잘 듣고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 있는 것입니다.

2)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르우벤 자손과 잣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에 간 사절단
    즉 제사장 비느하스와 각 지파의 방백들은
    아주 간절하게 그들의 행위를 돌이키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공동체의 사랑이 베여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신들의 형제들의 행위가 16절에 [ 어찌하여 여호와를 거역하느냐? ]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로 보였기 때문에 저들 신앙이 잘못될까봐 
  책망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권고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2) 공동체의 사랑입니다.
  18절 [ 오늘날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 ]
공동체란 한 배에 탄 운명을 같이하는 사람들입니다.
  형제의 범죄가 곧 우리들의 범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이키라는 권면입니다.

3) 형제 사랑입니다.
  무조건 잘 못 했다고 책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방백들은 형제 사랑의 간곡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19절 [ 너희 소유지가 깨끗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곳으로 와 우리 중에서 소유를 취할 것이니라 ]
그러니 19절 하반절에 [ 여호와게 패역하지 말자 ]
똑 같은 책망일지라도 사랑으로 하는 책망은
      상대방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들 세 지파의 행위를 괘씸하게 여기고
    군대를 몰아 전쟁을 일으켰다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엄청난 희생이 일어났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에 앞서서 형제를 얻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가 갈등을 해결하려는 마음은 있지만 잘 되지 않는 이유는
    접근하는 방식이 너무 과격하기 때문입니다.
왜 과격하게 되는가 하면 문제만 보기 때문입니다.
문제만 보이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 문제만 해결하면 다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상처받고 아파하고 고통스러워 할 사람이 생긴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로 인하여 더 큰 상처와 갈등이 후유증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사랑, 공동체의 사랑, 형제 사랑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범위에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랑보다 더 큰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갈등과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 안에는 파벌이 있었습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그들은 나뉘었습니다. 
누가 더 신령한가? 누가 더 권위가 있는가? 하는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은사 체험을 두고도 서로 갈등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먹는 문제 대문에 시험이 들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써서 권면한 내용이 바로 고린도서입니다.
고린도서를 통해서 하는 바울의 권고는 이것입니다.
즉,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라
어떤 은사를 받았느냐?에 그 권위와 신령함이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때,
      권위가 있고 신령한 성도가 된 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되지 않으면
    교회는 세상과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점,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고전12장 마지막 부분, 31절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리고 이어서 13:에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보다 더 중요한 방법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접근하고, 어떻게 해든지 구원하려 하고
      살리려는 마음으로 갈등을 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 즉
    하나님의 사랑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큰사랑으로 우리들의 삶에 생겨난 여러 가지 갈등들을           
극복하고 평화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먼저 청종하고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분명한 합일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 합일점을 어디에 맞추어야 하나님이 기뻐하는 화목이 되겠습니까?
5.  그리스도인은 갈등 해소의 합일점을 어디에 맞추어야 합니까?(30-34절)

요단 동편으로 건너 간 세 지파의 변론을 끝까지 듣고 보니
과연 그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배신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음이 판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요단 서편에 있는 이스라엘 온 백성들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온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며 즐거워하였습니다.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그들은 자연히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동편으로 건너 간 세 지파에 대해서 분노하였던 이유는
이스라엘이 한 공동체로서 다른 신을 섬기고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우상숭배를 통해 변질시킬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들 세 지파의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전쟁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했다면
    그들은 이방의 여러 민족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을 것이고,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싸우지 않고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모두가 만족하고
      행복할 만한 방법을 찾는 그들의 모습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말을 아주 많이 이용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더욱 나쁘게 되는 경우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쉬운 예가 중세시대의 십자군 전쟁입니다.
총 일곱 차례에 걸쳐서 진행된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 정복 전쟁은
  터키에 점령당한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한다는 목적으로 발발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고 예루살렘을 찾는 순례자를 보호하며
이교도 터키족으로부터
    성지(聖地)를 탈환한다는 목적으로 일어난 이 전쟁에서
    정복된 회교도는 무차별하게도 처단 당했으며
    유대인 거주민들은 학살되었습니다.
그 결과
팔레스틴, 시리아, 소아시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은 정복되었지만
동방과 서방교회,
    기독교인과 유대인과 회교도인 간의 분열은 심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서
    무장한 회교도들에 의해서 기독교의 복음이 막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시작된 일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그 역사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모든 오해가 풀린 다음,
이들 세 지파가 세운 단의 이름을 `엣`이라 칭하였는데,
그것은 `우리 사이에 이 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 단을 보면서 후손들에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 민족의 참 신이시며,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치게 될 것입니다.
서로간의 오해로 인하여 전쟁까지 치를 뻔한 사건이
그들의 지혜로운 행동으로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서로간의 공동체 의식을 더욱 확고히 다짐으로서
더 깊은 형제애를 맛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 안에서 행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인가?
      나아가서는 그 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을 것인가?
마5:16절에 말씀이 다시 생각납니다.
[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막혀진 담들이 열리고,
      갈라진 마음들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오해된 부분들도 풀어야 합니다.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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