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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해 : 사랑의 심정으로 줄 수 있는 너무나 큰 선물 (요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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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우리들이 잘못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잘못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을 그릇 판단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 판단의 기준과 정의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과는 별로 상관없이 자기 자신의 기준과 기호에 따라서 달라질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정의를 표방하지만 내면적인 음음한 구석에는 자신의 이익이나 심리적인 만족, 자신의 범죄의 은폐, 가해로 말미암은 쾌감, 자신의 현재 위치 유지 등에 관한 약간의 평안 등이 있을 것입니다.

제법 의의를 표방한 재판장과 같으나 근엄한 얼굴로 다른 이를 판단하고 정죄할지라도 그 머릿속에는 번뜩이는 계산이 돌아가고 동시에 초조함을 은폐하기 위한 잔혹한 미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발각되지 않은 자가 발각된 자를 고소하는 위선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7장 1~5절>에 이르기까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러므로 너희는 먼저 너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고 그 후에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말도 못하냐? 정의와 진리에 대해서 주장도 못하느냐? 죄에 대해서 지적도 못하느냐? 라고 우리는 질문할 수 있습니다.
죄악이 창건해도 우리는 침묵해야만 하는가? 라고 우리는 반문할 것입니다.
왜 수많은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죄악에 대해서 통렬히, 준엄하게 공박했을까요?
예수님도 죄악에 대해서는 으르렁거리며 포효하고 준엄히 꾸짖으셨습니다.
물론 정의와 진리, 죄에 대한 주장과 판단, 그리고 그 지적과 심판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순전한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정함의 분량을 우리가 행사한다면 그것은 월권적인 행사이고 하나님의 위치에 내가 올라선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만 우리는 그 분이 위탁해주신 은혜를 따라 정의를 사수하기 위하여 죄를 지적하고, 진리를 세우기 위해서 악의 세력과 싸워 주의 거룩성을 보존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두 가지 선행되어야 할 사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첫째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입니다.
즉 자기 자신의 들보를 먼저 뺀 후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의 티끌을 제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그릇된 주장이고 위선으로 전락되게 됩니다.
그 다음은 죄에 대한 지적과 절개를 위한 징계와 심판의 의도가 상대를 미워하고 판단하고 넘어뜨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상대를 매장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사랑하고 세우려는 의도 속에서 진행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면 실패하는 이유가 이 두 가지를 선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내 잘못을 해결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공박하니 정통성이 없고 힘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의도가 아니라 분함이나 혹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미움의 감정이기 때문에 재판장과 같이 심판한다 할지라도 실제적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한 여인에 관한 문제를 다루시면서 도대체 내 앞에 있는 형제자매에 대해서 어떻게 우리가 그들과 더불어 교우하며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을까를 예수님께서 오늘 행하신 모습을 통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가 범죄 하였을 때 주님의 모습은 어떤 것이며 우리는 어떻게 그 요구를 이루어드려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특별히 예수님은 정말 우리의 주님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과 이해와 그리고 그 지혜와 통찰 속에 우리는 정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별히 이해는 우리가 주님을 따라 이 세상에서 사랑의 심정으로 줄 수 있는 너무나도 큰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모두에게 기쁨을 줄 수 있고, 이해하게 되면 배려하고 사랑하고 그에게 큰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것을 봅니다.

오늘 예수님 앞에 끌려온 이 여인은 분명히 범죄한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그와 같은 상태에서 대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의 죄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을 참소한 사람들의 죄를 깨우쳐주심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그 여인도 용서받을 기회를 허락해주셨고 이 여인을 참소했던 사람들에게도 양심을 깨우쳐주셔서 그들에게도 새로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이 여인만 용서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이들도 마음에 양심이 살아나기 시작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결국 은혜를 입힌 것은 여인뿐 아니라 돌아간 사람들, 즉 분노된 마음으로 와서 참소하던 이 사람들까지도 깨달아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됐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오늘 본문 속에서 이와 같은 일들을 생각해봅니다.
먼저는 예수님의 이해와 사랑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용서해주시기 위하여 그 여인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은 명백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변호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 필요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호한다고 하면 주님의 논리력이나 자랑할 수 있을지 몰라도 변호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그는 명백하게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죄를 변호하지 않고 오히려 여인을 정죄하고 있는 사람들의 죄악성을 깨우쳐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여인을 정죄할 사람이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음을 가르쳐 주심으로 이 여인의 범죄의 위중함이 아니라 용서받아야 할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떤 방법으로 접근했을까요?
예수님은 율법적 사고보다는 사랑을 우선함으로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사랑의 용서 방법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의 율법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그 모세의 율법을 능가하는 사랑의 법을 제공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율법을 온전히 이루셨던 것입니다.

사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예수님은 굉장히 곤고한 지경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감람산에서 기도하시느라고 정말 어려우셨습니다. 피곤하셨습니다.
밤에는 열심히 다가올 십자가를 위해서 기도하셨고, 낮에는 피곤한 중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기도해주시며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좋지 않게 보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유다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판단을 묻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당신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고 말씀할 겁니까? 당신의 뜻을 말씀하십시오.
진퇴양난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을 말하였으니 “살려주라” 하면 모세의 법에 위반될 것입니다.
“죽이라” 하면 로마의 실정법에 위배가 되겠지요.
유대인들은 당시 그들의 공회인 ‘산헤드린’이라는 공회에서 사형을 구형할 수는 있지만 최종적인 선고, 즉 결정은 로마 총독의 관할입니다.
예수님이 거기서 “살리라, 죽이라” 했을 때, “죽이라” 했다면 그것은 실정법에 위반되는 것이고, “살리라” 하면 그것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거기에 이중적으로 올무를 걸고 있는 것이 “죽이라” 라고 얘기를 했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이제까지 사랑을 말하고 용서를 하지 않는다.’ 라고 그들은 예수님의 논리에 대해서 반박할 겁니다.

또 “살리라”하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 라고 예수님을 비난할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중적인 올무를 통해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뜻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 예수님이 말씀 하셔도 예수님을 올무에 넣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런데 빠져나올 수 없는 올무에 갇히신 예수님은 그 올무에 걸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상황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잘못한 것을 알았습니다. 변명할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죄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접근의 방법이었습니다.

유대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적인 사고를 가지고 죄에 접근함으로 말미암아 여인이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마지막 결론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이라는 방법으로 접근함으로 말미암아 이 여인이 죽지 않고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죄를 죄로 보기는 하되 그것을 해결할 길이 없었고, 예수님은 죄를 죄로 가르치되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제시했으니 곧 ‘사랑’이라는 방법이었습니다.
죄의 박멸은 징계로 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능가하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용서함으로 이루어져 새로운 기회를 부여함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악에 대해서는 의로워야 하지만 오히려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악을 능가하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있어지는 모든 죄를 다 없애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없애버린다면 죄가 없어질까요?
모세의 율법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분명히 간음한 사람은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간음한 사람을 죽이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만큼 죄를 싫어한다는 것이고, 죄를 미워한다는 것이고, 죄를 떨쳐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게 목적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지 사람 죽이는 것을 기뻐한다는 뜻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 겁니까?
‘죄를 어떻게 하면 없애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지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목표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라서 여러분이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 30년 전쯤에 남아메리카의 가이아나라는 곳에서 ‘인민사원’이라는 사교집단을 만들어서 ‘짐 존스’라는 사람이 교주로 있었습니다. 이 짐 존스라는 사람이 사람들을 이리저리 다 사교집단을 모집해서 이 가이아나에서 인민사원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거기에 있었는데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어서 이 짐 존스라는 사람이 더 이상 유지하기가 어려웠던 것이었습니다. 그 때 표면적으로 무슨 이유를 내세웠냐면 우리들이 다 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죄를 없애려면 우리가 다 죽어 없어져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900명, 정확히 914명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약 900명 정도 되는 사람이 일시에 그 자리에서 다 모여서 독약을 마셨습니다. 다 독약을 마시고 그 자리에서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것이 알려져서 사람들에게 발견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그 희대의 큰 사건이었습니다. 900여명이나 되는 사람이 일시에 다 독약을 마시고 그 자리에서 다 똑같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논리는 뭐냐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 죽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죽으면 죄가 없어질까요?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죄가 없어질까요? 죄는 또다시 이 세상에 창건해서 마침내 수많은 다른 후세사람들에게 또다시 죽음의 불덩어리를 몰아넣고 말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와 같은 올무를 가지고 예수님께 다가왔지만 예수님은 분명한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인간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는 그 인간들을 사랑함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으면 죽어야 돼요. 그러므로 하나님과 분리되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모두가 다 죽어서 해결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자기를 버리신 사랑에 의해서 해결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의 징계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사단의 저주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징계는 결국 징계의 아픔을 통해 사람을 축복의 사람으로 세워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사단의 저주는 사람을 퇴락과 파멸의 길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바로 율법의 징계는 우리 인간을 말살시키고 우리의 생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죄의 요소를 지적함으로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이와 같이 오늘 이 여인을 죽이고 싶어 하여 예수님을 올무에 넣기 위하여 온 것은 율법의 바른 용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는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같이 용서함 받은 우리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마음에 복수할 각오가 있다면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자기의 의를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시면서 우리 인간들을 구원해주셨던 것입니다.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지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주 앞에 온전한 기쁨과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이 여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니다.
주님 앞에 왔을 때 산발한 머리로 사람들에게 끌려 이리저리 사람들에게 조롱과 뭇매를 맞고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서 왔을 겁니다. 얼굴 들고 살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조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으로 인하여 슬금슬금 사람들이 다 도망쳤을 때 이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인하여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부끄럽지 않고 자유로운 몸과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 갈 수 있는 기회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한 순간의 상황만을 모면한 것이 아니라 이 여인에게는 완전하게 새로운 무대로 접어들을 수 있는 이와 같은 기회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바로 우리 인간들이 그런 모습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만신창이가 되어서 사람들 앞에도 부끄럽고 하나님 앞에서도 부끄러운 모습으로 끌려나왔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속의 역사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와 은혜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율법의 법정에서 살릴 수밖에 없는 사랑의 법정으로 이관하였으므로 우리는 영원한 사랑과 기쁨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영원한 우리인생의 법정에 섰다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으나,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정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자유와 구원의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와 같은 일이 있기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이 여인에 대한 이해의 심정을 가지고 다가갔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해의 심정을 가지고 사랑의 베풂을 가지고 다가서면 우리는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선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의 심정으로 다가서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이 세상에 어떤 누구도 우리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그리고 내 주변의 동료를, 내 주변의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바라볼 때 우리는 모두가 기쁨과 은혜의 백성을 세울 수 있지만, 판단과 정죄의 심정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누구도 내 주변에는 한 사람도 바른 사람이 없는 죄인들만 우리 주변에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해를 통해서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을 베풀어야 합니다.

두 번째, 오늘 예수님의 이해와 지혜를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단 답의 요구를 받았습니다.
“예수님, 뭐라고 할까요? 죽일까요? 살릴까요?” 예수님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이끌려 예수님이 단 답으로 대답해야 될 의무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땅바닥에 구푸려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런 글씨를 썼다고 주석을 합니다.

제 칠 계명입니다.
<레위기 20장 10절, 신명기 22장 22절>에 있습니다.
‘간음하면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것만 읽으면 죽이라는 얘기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얘기하셨냐면 그것을 쓰시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이라고 쓰시고 죄 없는 자가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이라는 말씀에 대한 해석이겠지요.
'간음한 자는 죽이라' 거기에 대한 해석으로써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구푸려서 쓰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른부터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이 슬금슬금 다 없어졌어요. 저는 이 장면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슬금슬금 없어지는 순간 그들의 양심이 조금씩이라도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양심이 조금씩이라도 작동하지 못했다면 그들은 그렇지 못했겠지요. ‘간음하면 반드시 죽일지니라’가 이 여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통렬히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의 참뜻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들의 양심의 심정에 예수님께서는 글씨를 쓰셨던 것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마침내 예수님의 호소는 권세 있는 자의 호소로 받아들여져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 마음에도 양심이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도무지 저 사람을 돌로 칠 수 없다.’는 양심이 살아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정말 예수님은 이 여인을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돌로 치려고 왔던 그 강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구조해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들의 마음에 양심을 살아나게 함으로 말미암아-하나님의 말씀에 진실한 뜻을 깨닫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다 도망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던 올무를 오히려 그 여인도 구조하고 이 사람들도 구조하는 기회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정말 진실 되게 깨끗함과 정함을 가지고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의 말과 그리고 허접하게 살았던 사람의 말을 우리는 둘 다 똑같은 무게로 들을 수 없을 겁니다.

오늘 예수님이 “너희 중에 간음하지 않은 사람이 돌로 치라. 누구든지 죽이라”
그리고 “너희 중에 죄가 없으면 돌로 치라” 라는 말씀을 바로 예수님께서 쓰셨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이 쓰고 말했다면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마음의 움직임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길거리 지나가는 사람이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라고 얘기했다면 사람들은 그 마음에 감동을 못 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셨으니까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말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가 그들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죄악성을 보여주심으로 서로 서로를 참소하지 못하고 아끼고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죄를 용서케 하고 세워줄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부여하시기 위하여 이와 같은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여인, 한 명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뿐만이 아니라 그 여인 한 명의 문제를 해결해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여인을 참소하려고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문제도 동시에 해결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스스로 강요에 의해 어떤 문제를 결정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깨우침과 은혜와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끔 그러죠. 이쪽 길로 가려고 했는데 그 길이 아니면 사자를 놓아서 도망가게 하고 또 딴 길로 갔는데 그 길도 아니면 낭떠러지 만나서 돌아오게 해서 결국 갈 길로 간다고 얘기합니다. 그럼 우리는 표현으로 ‘하나님 앞에 끌려와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더 정확한 표현은 ‘하나님이 우리를 스스로 그렇게 하도록 결정시켜 주셔서’ 하는 것이겠지요.
예수님의 지혜, 분노를 삭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양심에 호소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란 말입니다.
바로 진정한 이해를 통하여 예수님은 지혜를 발휘하였고 그 지혜를 통하여 그들을 설득하는 힘을 가지고 그들 스스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법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세 번째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분명히 능력 있는 권세를 가지고 선포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온전한 선포입니다. 권세를 가진 분이 분명한 용서와 사랑을 더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가서 다시는 이와 같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라는 것이 그냥 묵인되고 용납되는 것이 아니라 죄라는 것을 철저하게 끊고 이제 너는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기회를 주고,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그에게 새로운 꿈과 소망을 제시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대하여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너는 자유롭게 죄의 종노릇 하지 말고 기쁨을 가지고 네 삶에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라는 기대입니다.

용서를 어떻게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한다는 것, 그 상처를 보존시켜준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용서해주는데 그 이유는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을 내가 믿어.’ 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내가 용서해주는데 너는 더 나빠질 거야.’ 그러면 우리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의 자유로 말미암아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가운데 용서받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은혜의 놀라운 세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우리 주변사람들과 더불어 어떻게 생활할까요?
큰 아이가 엄마한테 만원을 용돈으로 받았습니다. 조그마한 동생이 와서 말합니다.
“형 돈 있으면 나 천원만 줘.” 그랬더니 뭐라고 했냐면 “돈 없어.”하고 박절하게 굴면 우리는 큰 형에 대해서 인색하다고 얘기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은혜와 사랑을 받았는데 우리 주변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용서의 10분의 1이라도 한다면 하나님께 받은 축복의 10분의 1이라도 다른 사람을 축복하여 우리가 베푼다면 우리의 삶에 훨씬 다른 삶의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용서함을 받았다는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받았다는 감격을 누리지 못하니 그 용서를 받은 것에 대해서 베풀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이건 내가 분명히 잘못했는데 나는 용서를 받았어. 그런데 내가 이렇게 용서를 받았으니 내가 누구를 용서하지 못 하겠어.’ 라는 마음이 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더 많은 것을 베풀 수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분명히 믿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살면서 뭔가 없다는 것은 뭔가 다른 것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뭔가 내가 가졌다는 것은 뭔가 내가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동차 타다가 자동차가 없으면 좀 불편하죠?
자동차가 고장 나서 맡기면 불편하죠? 그런데 편한 것도 있잖아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주차할 걱정도 없고, 어디 갈 때 급한 일이 있어서 자동차를 안 가져갔으면 좋겠는데 가져가야 될 일도 없습니다.
또 자동차가 없으면 대중교통도 이용할 수 있지 않습니까? 대중교통을 한 번 이용해 보면 그 가운데 많은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보기도 하잖아요. 또 걸어 다니기도 하잖아요. 빨리 달리면서 볼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천천히 가야 볼 수 있는 것도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빨리 달려가야 눈에 잘 보이는 것도 있는데 천천히 걸어야 눈에 보이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환경을 바꿈으로 말미암아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지혜들을 얼마든지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에게 있어서 불편하다는 것이 우리들에게 더 많은 것을 줄 수도 있고, 내가 결핍했다는 것이 내게 있어서 어떤 더 많은 것을 제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안가지고 있는 사람은 관리해야 될 필요도 없고, 잃어버릴까봐 걱정도 안 합니다. 잃어버릴까봐 걱정할 사람은 많이 가졌기 때문에 잃어버릴까봐 걱정하는 것입니다.
재주가 한 가지 밖에 없다는 것은 오히려 그 재주가 크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따라서 우리 삶에 있어서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공평함을 우리는 어디에 생각해야 합니까? 우리 인간들의 삶에도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면-나에게도 은혜를 주셨다면 그에게도 은혜를 주셨다는 겁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내 옆의 사람이 왜 중요하냐면 하나님이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그에게도 중요히 여김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보아야 합니까?
이해의 심정을 가지고 보면 내 주변의 사람이 다 훌륭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판단과 정죄의 심정을 가지고 보면 내 주변에는 모두가 다 죄인밖에 없습니다.
판단과 정죄의 심정을 가지고 보면 내 앞에 올바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의 비틀어진 잣대에 맞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내 잣대가 비틀어져 있는데 거기에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의를 주장하다가 불의 속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 가운데 우리의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다른 사람을 세울 수 있는 지혜와 은혜를 발견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죄의 소멸은 죄를 지적하고 판단하고 공박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보혈과 사랑과 용서로 소멸되는 것입니다.
변화라는 것은 남을 쳐서 넘어뜨려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살려내고 스스로 순종의 굴레를 쓰고 싶게 만드는 진정한 아낌과 사랑의 권면 속에서 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 전부 나쁜 사람만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제일 좋은 사람일까요?
제일 좋은 사람이 아니라 그도 똑같이 나쁜 사람입니다.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거든요.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이 다 모두 훌륭한 사람만 있다면 그 사람 자체가 훌륭한 것입니다.
왜 내 주변에는 전부 나쁜 사람만 있을까? 그 사람이 나쁘니까 당연하죠.
우리는 내 주변의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말고 내 주변의 사람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은혜요 비결입니다.

사랑과 이해의 눈길을 가지고 바꾸면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엾은 사람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될 사람입니다.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를 긍휼히 여기고, 세워가고, 위로하고, 격려한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렸죠? 사단의 저주와 하나님의 징계가 다른 것은 하나님의 징계는 결국 아픔을 통해서 그 사람을 세우는 것이고, 사단의 징계는 그를 파멸과 퇴락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세우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이해하고, 남편은 아내를 이해하고, 그다음에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이해하고,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 옆에 있는 직장의 동료를 이해할 수 있고 내 옆에 있는 어떤 사람이든지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하면 우리 마음이 움직이고, 우리마음이 움직이면 우리는 그에게 너무나 큰 것들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좋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좋아하고 사랑하고 아끼면 우리는 어떤 것도 줄 수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축복 속에 거하게 됩니다.
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베풀어 주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삶이 곤고하고 외롭고 피곤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왜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안 될까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축복받는 은혜의 백성으로 만들지 못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 사람을 축복과 은혜를 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갈 때 결국 우리의 삶에 더 큰 기쁨과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저는 간절히 기대하고 소원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가는 곳에는 그 주변에 모두가 기쁘고 축복된 사람들이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받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울 수 있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으로 사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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