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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이 들어서도 초라하지 않게 사는 방법 (대하 1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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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서도 초라하지 않게 사는 방법
역대하16:1-14

사람의 연령에는 4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자연연령입니다. 둘째는 건강연령입니다. 셋째는 정신 연령입니다. 넷째는 영혼 연령입니다.

영국의 노인 심리학자 브롬리는 '인생의 4분의 1은 성장하면서 보내고, 나머지 4분의 3은 늙어가면서 보낸다.'라고 했듯이 자연 연령은 시간이 지나면 늘어납니다. 그런데 연령은 들어가는데 정신 연령은 유아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는데도 영혼 연령은 예수 믿은 지 30년이 지났는데도 한 살 수준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같이 눈오는 날이면 60대가 되었는데도 노래방 가서 도우미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부르며 놀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나이 들었지만 우아한 삶이 아닙니다. 고상하고 우아한 삶이 아닙니다. 초라한 삶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들면서 건강하고 우아하게 늙어가기를 원합니다. 나이 들어서도 초라하지 않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나이 들면 들수록 하나님 안에서 열정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1-6)/일과의 관계

마지막까지 열정을 가지되 하나님 안에서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일과의 관계입니다. 모든 일을 인간적이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처리합니다. 편법으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1)아사 왕은 나이가 들면서 열정을 잃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인간적인 방법으로 처리했습니다.
젊을 때 열정적으로 위대한 종교개혁을 단행한 왕이었습니다. 유다의 2대왕이었던 아버지 아비야가 3년간 통치하였으니까 아마 젊은 날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왕이 되자 열정적으로 일을 하였습니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일을 합니까?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의 모습이 14장에 잘 나와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모든 우상을 제거합니다. 정치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합니다. 그렇게 되자 나라가 평안해 지고 형통해졌습니다. 구스 사람들이 백만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 유다 군대는 50만 밖에 되지 않습니다. 11절에 보십시오. 여호와께 열정적으로 부르짖었습니다.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젊을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정적으로 하였습니다. 그 결과 나이가 들면서 나라가 안정되어져 가고 태평성대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이가 들자 변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사왕이 나이가 든 후의 내용입니다. 1절에 보십시오. 이 때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북쪽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성을 건축하였습니다. 선전포고를 하고 사람들을 유다 나라에 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 때 아사는 젊을 때의 열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승리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을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벤하닷에게 재물을 주어 동맹을 맺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성전의 헌금까지 뇌물로 주고 환심을 사려고 합니다. 이 열정은 방법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젊을 때와는 다릅니다. 젊을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열정의 동기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자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도구로 전락시킵니다. 이용물로 전락시킵니다. 열정의 동기가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신의 목적 성취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여 이방인에게 동족을 치게 합니다. 이 때 이미 북쪽 앗수르의 남진을 막기 위해 아람은 북이스라엘과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아사왕은 북쪽 이스라엘을 침략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아람 나라는 지중해에 이르는 무역로 개척하기 위해 바로 이스라엘을 쳤습니다.(4) 그리고 아사는 라마의 건축 재료를 빼앗아 국경을 든든히 지키기 위해 게바와 미스바 성을 건축하였습니다.(5-6)

2)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열정을 잃지 말아야 하지만 모든 일 처리를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하여야 합니다.
열정이 중요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4대 고통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첫째는 질병입니다. 둘째는 고독감, 셋째는 경제적 빈곤, 넷째는 역할상실입니다. 점점 의욕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잃어버리는 것 중 대표적인 것 하나가 열정상실입니다. 의욕을 잃는 경향이 있습니다. 육신의 힘은 쇠약해지고 건강은 나빠지고 기억력은 희미해집니다. 열정을 잃어버리면 나이가 들면서 성장하고, 성숙하고, 사역을 하고, 담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퇴보하고 무기력해지고 자신감을 잃고 나태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감을 가지고 마지막 호흡이 멈추는 순간까지 열정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노년은 미끄러져 내려가는 시기가 아니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시기입니다. 늙음이란 정해진 나이에서 부터가 아니라 할 일을 상실할 때부터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무슨 일을 해도 심드렁하고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 다 산 것 같은 얼굴에는 권태가 가득해서 옆에 가면 자신까지 권태로 물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웃음이 묻어나며 활력이 넘쳐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열정입니다. 삶과 일에 대한 열정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나이들면서 외모나 성격, 대인관계에 커다란 차이가 납니다. 노년을 초라하지 않고 우아하게 보내는 비결은 사랑, 여유, 용서, 아량, 부드러움 등의 요소도 있지만 핵심적인 요소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 노년에 얼마나 열정적으로 살았습니까? 모세 80에도 민족을 위해 새 출발하였습니다. 갈렙은 85세에도 저 산지를 달라고 열정을 가졌습니다. 노년기에도 열정을 가지면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통계에도 노년기의 뚜렷한 업적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썬샤인 잡지에 의하면 세계 역사상 최대 업적의 35%는 60세부터 70세 노인들에 의하여 이루어 졌고 23%는 70-80세 노인, 그리고 6%는 80대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역사적 업적의 약 64%가 60세 이상의 사람들에 의하여 성취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시성(誇聖 )밀톤은 만년의 20년 간 두 눈의 실명이라는 역경 속에서도 그 숭고한 시문(誇文)을 수많이 엮어냈습니다. 악성(樂聖) 베에토벤은 만년의 15년 동안 전혀 듣지 못한 귀머거리였지만 죽을 때까지 작곡의 길에 정진하였습니다. 밀톤이나 베에토벤이 그 불구의 몸을 한탄하며 자포자기하였다면「실락원」도 「제9 교향곡」도 결코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소포클레스가 「클로노스의 에디푸스」을 쓴 것은 여든 살 때였습니다. 괴테가 「파우스트」을 완성한 것도 여든이 넘어서였습니다. 다니엘 드 포우는 쉰 아흡 살이 되어서야 「로빈슨 크루소」을 썼고, 칸트는 쉰 일곱 살 때 「순수이성비판」을 발표했고, 미켈란젤로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을 일흔 살 때 완성했습니다. 그는 89세로 세상을 마칠 때까지 조각하는 칼을 들고 그의 작품에 손을 댔습니다. 베르디, 하이든, 헨델 등도 고희(古稀)의 나이를 넘어 불후(不朽)의 명곡을 작곡했습니다. 렘브란트나 모네의 그림, 예이츠의 문학에서 걸작으로 손꼽히는 것들도 그들의 생애의 만년에 가서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아인쉬타인이나 쉬바이쩌 역시 노경에서도 창조적인 일을 많이 했습니다. 프랑스와 모리악은 「지난 날의 청년」을 여든 세 살 때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글래드스턴은 여든 넷이라는 고령에 수상을 하였습니다. 아데나우너는 1949년 63세 때 독일의 수상으로 선출되어 14년 동안 현대사에 혁혁한 발자취를 남긴 대정치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가극 작곡가 쥬제페 베르디(1813-1901)는 그의 불후의 명작 <아베마리아>를 85세에 작곡했고, 랄프 보간 윌리엄즈(Ralph Vaughan Williams)는 80대에 그의 교향곡 8번과 9번을 작곡했으며, 그랜드마 모제스(Grandma Moses)는 77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99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기묘하고 호감을 주는 좋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나이 들면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방향이 잘되어야 합니다. 쓸데없는데 열정을 부리면 안됩니다. 늙어 가는 피부 붙들고 열정 부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열정을 부려야 합니다. 아사의 잘못은 열정은 있었으나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방향성이 바르게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사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는 열정은 있었지만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하나님 방법으로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불은 좋은 것이지만 가스랜지 안에 있을 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가스랜지를 벗어나 벽에 붙으면 불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바닷물을 좋은 것이지만 그 바닷물이 육지로 뛰어 오르면 안됩니다. 젊을 때 인간 방법으로 일했다해도 나이가 들면서 더욱 하나님 방법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2. 나이가 들면 들수록 모든 인간관계를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가져야 합니다.(7-10)/인간관계의 승리

나이가 들면서 초라하지 않으려면 대인관계를 잘 가져야 합니다. 미국 카네기멜론 대학에서 인생에 실패한 이유에 대한 조사를 했답니다. 조사 결과 인생에서 실패한 이유가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이 부족했다고 답변한 사람은 15퍼센트에 불과했답니다. 나머지 85퍼센트는 잘못된 인간관계라고 꼽았답니다. 그만큼 인간관계는 살아가는 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은 이기주의(에고이즘)가 강해집니다. 노욕이 생깁니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폭군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스쿠루지 노인같이 허전함을 잊기 위해 허세를 부리고 완고하게 고집을 부리며 자기만족에 빠지기 쉽습니다. 자기 몰입 나르시즘(narcissism)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대인관계는 초라할 뿐입니다. 나이들면서 페이탈리즘(fatalism)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염세적이고도 운명론적인 생각이 노년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날 찾아오지 않고 버림받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미워집니다. 사람들이 싫어집니다. 여기에 빠지면 대인관계를 기피합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초라하지 않고 우아하게 보내려면 대인관계를 잘 가져야 합니다. 대인관계를 잘 갖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인간관계 회피형, 인간관계 경시형, 인간관계 불안형이 되지 않는 비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 이론과 방법들이 있겠지만 간단합니다. 타자 중심, 하나님 중심이 되면 됩니다. 이 원리만 붙들면 우리는 죽는 날까지 참으로 초라하지 않고 풍성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원리를 붙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사왕은 나이들면서 대인관계에 실패했습니다.

1)아사 왕은 나이가 들면서 인간관계를 자기 중심으로 가졌습니다.
그는 젊을 때 모든 인간관계를 타인 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가진 사람입니다. 얼마나 그가 하나님 중심의 인간관계를 가졌는지 대하15:1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찾아보십시오. 여기서 모친은 아사의 아버지 아비야의 모친입니다. 그러므로 아사의 할머니입니다. 할머니가 아세라 신을 섬기니까 폐위시켜 버렸습니다. 얼마나 하나님 중심입니까? 그리고 그가 얼마나 자기 중심이 아니라 타인 중심의 인간관계를 가졌는지 15장 8절을 보십시오. 전쟁에 나가 구스를 이기고 돌아 왔을 때입니다. 선지자가 개혁을 요구하니까 그 말을 그대로 듣고 제 2의 종교 개혁을 단행합니다. 전쟁에서 막 돌아왔는데 환영을 하지 않고 무슨 말이냐고 선지자에게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왕권을 가진자라고 선지자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가증한 우상들을 전국토에서 제하여 버립니다. 여호와의 단을 쌓습니다. 그래서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조차 하나님께서 아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보고 그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자 인간관계가 어떻게 변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선견자 하나니가 아사왕의 불신앙을 지적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왕을 의하였다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과거 구수 사람과 전쟁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였는데 이제 나이가 들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는데 왕이 망령되게 즉, 어리석게 행하였다는 것입니다(9). 전쟁에서 승리한 왕입니다. 얼마나 기분이 안 좋았겠습니까? 이 때 아사 왕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대노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선견자를 옥에 가두게 했습니다.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왕의 정책에 항의하는 백성을 학대하였습니다.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인간관계는 실패했습니다. 교만해져 버렸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잠16:8)입니다. 나이들면서 에고이즘, 나르시즘(narcissism)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2)우리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모든 인간관계를 나 중심이 아니라 타자 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가져야 합니다.
인간관계는 중심 축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물질 중심의 인간관계를 갖는 사람은 나이 들면 들수록 초라해집니다. 일 중심, 나 중심의 인간관계를 갖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타자 중심의 인간관계를 갖는 사람은 나이 들면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따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가장 좋은 풍요로운 인간관계를 갖는 것은 하나님 중심의 인간관계입니다. 나이 들면서도 변함 없이 성공할 수 있는 인간관계는 하나님 중심의 인간관계입니다. 한 평생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노년에도 찾는 이가 많고 죽은 후에도 그리워하는 이가 많은 것입니다. 노인이 되어 가족도 찾지 않는다면 얼마나 초라합니까?

노년의 풍요로운 인간관계를 갖는 비법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중심의 인간관계를 갖는 비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을 찾을 만한 사람으로 가꾸는 것 중요합니다. 은혜를 끼쳐 고마운 사람이 되거나 남에게 유익을 줄 만한 지식이나 인격이 있을 때 노년에도 찾는 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일생을 자기의 이익이나 성공과 자기만의 생활을 위하여 달려 온 사람에게는 노년의 풍요로운 인간관계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남에게 베풀 것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베풀 것은 돈이 될 수도 있고, 지식이나 기술이나 특별한 재능이 될 수 있습니다. 베풀 수 있는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사 왕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를 무시하지 않고 그가 전하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귀를 막습니다. 선택적으로 듣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 이외의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노년은 초라해지는 것입니다.

노년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았던 아브라함, 요셉, 이삭을 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노년에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합니다.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고 이제까지 살아온 경험에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만 그대로 따릅니다. 이삭을 보십시오. 아마 농사를 지어 100배의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아마 그 때가 100세가 넘어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말렉 사람들이 괴롭힙니다. 우물을 빼앗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말씀을 붙듭니다. 나중에는 원수들이 인정해 줍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치리라"(단12:3).

3.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인간의 의지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11-14)/대신관계

나이가 들면 분주함이 없어집니다. 분주함의 상실은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상실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합니다. 정서적인 불안이 찾아옵니다. 공허해 집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없어!"라고 하는 자신에 대한 권태가 자신을 무기력감으로 이끌게 하고, 고독함과 공허감에 빠지게 합니다. 사별의 슬픔들을 가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건강이 점점 쇠약해 집니다. 숨이 가쁘고 가슴이 조여집니다. 기력의 상실되고 근육의 무력감이 찾아옵니다. 의지할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잃어 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쉽게 분노하고 우울해 하며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인생이 초라해지는 것입니다.

나이가 든다고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내 능력을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 정신 연령, 영적 연령은 더욱 젊어져 왕성하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 4:16)" 노년이 되어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그런데 아사왕은 나이 들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에 실패를 하여 초라해졌습니다.

1)아사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인간을 의지하였습니다.
아사왕은 젊었을 때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였습니다. 전쟁할 때도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나라를 다스릴 때도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을 단행할 때도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이들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아사 왕이 나이가 들면서 병이 들었습니다. 심히 중한 병입니다. 사람이 병드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신앙 훈련을 위해 병을 주는 경우고 있고 자신의 부주의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죄로 인하여 등 여러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 아사의 병은 징계로 주어진 병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의 헌금을 이방왕에게 바치고 이방 나라 사람을 동원하여 자신의 민족을 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 선견자를 잡아 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자신을 대항한다는 이유로 백성들을 학대하는데 하나님이 보고만 계시겠습니까? 질병을 통해 인간의 연약성을 깨닫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을 회개하기 원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빨리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사는 어떻게 합니까? 12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병이 심히 중한데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원에게 만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병으로 인하여 2년 뒤에 왕이 된지 41년에 죽었습니다.

2)우리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인간의 의지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의술로 치료하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병원에 가 의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의지하지 않고 의사만 의지하는 불신앙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전혀 없이 오직 인간의 경험과 이성만 의지하는 불신앙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1천 번제를 드리고 성전을 지었던 솔로몬이 노년에 초라하게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들들은 다투고 반란을 일으키고 나라는 두 쪽으로 나누어지는 비극을 노년에 맛보아야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다 잃어 버린다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은 더욱 좋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나이 때문에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노년에도 멋지고 우아하게 살 수 있습니다. 곱게 늙어갈 수 있습니다. 결코 초라하지 않습니다.
히스기야는 교만하다가 병들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 회개하고 얼굴을 벽에 대고 하나님께 통곡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결국 히스기야는 생명을 15년 동안이나 연장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시편 92:14)" 집니다.

데이빗 리빙스톤(1813-1873)이 죽던 날 밤 마지막으로 써 놓은 글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이 위대한 선교사는 기도하는 모습으로 침상 옆에 무릎을 꿇은 채 숨을 거둔 것을 그의 아들들이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글을 적어 놓았습니다. "나의 왕, 나의 생명, 나의 모든 것 되시는 나의 예수님, 당신께 나를 드립니다."

우리의 나이가 들면서 잃는 것들의 자리를 대신하여 우리 안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 은혜의 샘물로, 하나님의 권능으로 풍족하게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계속 성장하고 신앙적으로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노년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힘차게 일하셨던 F.B. 마이어 목사(1847-1929)는 "당신의 낫으로 거둔 마지막 추수가 가장 큰 수확이 될 수도 있고, 본향으로 향해 가면서 거둔 결실이 가장 커다란 것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렘 17:7)"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사 40:31)" 나이들면 자식 의지하는 것, 돈 의자하는 것, 자기 지혜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를 의지하여야 합니다. 힘의 근원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우리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시146: 5). 왜 그렇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실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시146: 6, 렘 32: 17). 믿을 수 있는 진실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시146: 6),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시 146 : 7-9).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시146 : 10). 찾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시인인 밀턴(Milton)은 노년에 시력을 잃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여 걸작, '실락원'을 썼습니다. 베토벤은 귀머거리가 되자, 하나님을 의지하여 불후의 9번 교향곡을 포함한 여러 위대한 교향곡들을 작곡했습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노년에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우리의 믿음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쓰레기에서 장미가 피게 하며 죽음에서 부활하게 할 것입니다. 나이 드는 것은 마지막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것입니다. 결승점을 앞에 놓고 쉬엄쉬엄 달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승점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최선을 다해 뛰는 것입니다. 이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뛰는 것입니다. 후반전의 인생은 여생(餘生)이 아니라 후반생(後半生)입니다. 인생의 주기로 보면 내리막길같지만 천국을 향해 새 인생을 시작할 때입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의지한 모세는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하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34:7)"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름답게 죽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아름답게 늙어 가는 일이다."라고 앙드레지드는 말했습니다.

나이 들어서도 초라하지 않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세가지 것을 마음에 세겨야 하겠습니다.

1. 나이 들면 들수록 열정을 잃지 않고 모든 일을 인간적이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의 마지막까지 사역에서 초라하지 않고 우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 나이가 들면 들수록 모든 인간관계를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의 마지막까지 인간관계에서 초라하지 않고 우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인간의 의지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의 마지막까지 하나님과 관계에서 초라하지 않고 우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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