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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보다 더 소중한 사명 (행 20: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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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시대 성군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세종대왕의 모습을 그린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당대 세종과 함께 살던 9명의 인물들에 의해서 조명된 세종의 모습과 정치가로서 세종이 어떤 임금이었는지 이 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종은 왕으로 취임하는 교서에서 “인을 베풀어 정치를 펴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맹자의 교훈을 따라 정치를 이끌어 나가겠다는 선언입니다. 국왕이 훌륭한 정치를 펴고 인을 베풀면 천하에 벼슬하는 자들이 모여들고, 농사짓는 자들이 왕의 들에서 경작하며 장사꾼들도 왕의 시장에 물건을 쌓아놓게 된다는 맹자의 원칙을 세종 임금이 뒤따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특별히 눈에 띄는 대목이 있는데 세종 임금이 사람을 어떻게 등용해서 쓰는지에 대한 항목입니다. 지금도 인사문제는 조직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기업이나 단체, 교회, 정치의 사활이 걸린 문제가 바로 인재를 등용하는 것입니다. 세종 임금이 인재를 등용하는 것을 보면서 당시의 정승이었던 황희가 세종을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세종은 인재는 세상 모든 나라의 가장 중요한 보배라고 여겼다. 한 시대가 부흥하는 것은 반드시 그 시대에 인물이 있기 때문이요, 한 시대가 쇠퇴하는 것은 반드시 세상을 구제할 만큼 유능한 보좌가 없기 때문이다.”

  세종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을 들여 쓰고, 어떤 사람을 내칠 것인가 방도를 써보라.”는 과거시험문제를 출제했습니다. 당시 이 문제로 장원급제한 강희맹이라는 사람의 답안에 이렇게 실려 있었습니다. “국왕은 인재를 분류할 줄 알아야한다. 국가의 운명을 맡길만한 뛰어난 인재는 반드시 사용하고 물리쳐야 할 인재를 구분하라.”

  오늘날에도 인사문제가 매우 중요하기에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사람을 선택할 때에 적용할 만한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중용(重用)해야 할 뛰어난 인재란 어떤 사람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오랑캐를 누를만한 위엄을 갖고 있으나, 늘 자기 자신을 단속하는 사람, 마음에 중심을 확고하게 세워 자질구레한 절도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 충성과 의분이 격렬해서 나라가 위태로울 때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 등은 모두 국가의 운명을 맡길만한 신하이자 한 시대의 뛰어난 인재이다.”

두 번째, 재주가 많더라도 물리쳐야 할 인재란 어떤 사람인지 말합니다. “재물만을 탐하고, 여색을 밝히며, 끊임없이 재물을 긁어 들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먼저, 자기가 권력 있는 위치에 올라가면 재물만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민족을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놓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재물과 자기 이익만을 탐하는 사람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오늘날로 표현하면 이성을 밝혀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등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끊임없이 자기 배와 욕심만을 채우면서 행한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내치라는 것입니다. 재물을 탐하면 정의를 해치고, 여색을 밝히면 예의를 해치며,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희망이 없고 개선의 의지가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바른 인재입니까? 내 주위에 인재들을 불러 모으고 사용하고 계십니까? 누구에게나 인사란 아주 중요합니다. 자신이 공동체의 장이될 때 인재 등용은 더욱 더 중요합니다. 한 정치 집단이나 그룹, 국가에 있어서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한 인물이 공동체를 세우기도 하고 망가뜨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구원사역, 하나님의 생명 사역, 하나님의 교회 사역은 말로 다할 수 없이 사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을 등용하셨습니다. 우리가 보면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걸출한 인물을 택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사도바울은 결코 완벽한 인물, 당시 많은 사람들이 쫓아가던 호감 있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2세기 초에 나타난 “바울과 테클라 행전”이라는 외경을 보면 바울의 외모와 인상에 대해서 쓴 구절이 있습니다. “바울은 키가 작고 대머리이며 다리가 굽었다. 하지만 골격이 다부지고 눈썹이 서로 맞붙고, 콧날은 약간 굽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온아(溫雅)함이 넘쳤다. 때로는 인간 같고, 때로는 천사 같이 보였다.”

바울을 만나 함께 이야기해보면 그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의 확신을 갖고 있는 천사와 같은 인자한 모습이 보여 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별 볼 일 없는 것처럼 보였던 사도바울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 생명의 사역을 위해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친히 만나셔서 바울의 가슴속에 복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자기 인생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사명을 가슴으로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엄청난 삶의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시선, 하나님의 눈앞에 서 있는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원래 유대인이었고 바리새인이었으며 율법에 정통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사물을 율법이라는 시각으로 보았습니다. 그때 그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 불과한 타락한 종교인이었습니다. 자기 민족을 로마에 항쟁하는 저항 인물로 밖에 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가진 법으로 남을 판단했습니다. 그 법은 사람을 정죄하는 법이었고 사람을 살리는 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이 어느 날 다메섹을 향해 갈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기존에 가졌던 가치관과 자기 삶에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가식과 거짓을 발견했고, 그 가면을 과감하게 벗어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왔을 때 자기 속에 있는 거짓과 이기적인 욕심이 보였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고 행동했지만 그 속에는 자기의 탐욕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빙자한 자기주장이 자기를 붙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을 만난 순간 그것은 자기 탐욕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질주하면서 살았는데 자기 인생이 헛된 목표에 붙잡혀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내면으로부터 거짓과 불의에서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우리 삶에 도약이 필요합니다. 공부를 해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과 하나님이 나를 공부하도록 시켜주셔서 공부하는 것은 인생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음악을 전공하고 악기를 연주해도 자신이 유명해지기 위해서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 하나님께 내가 가진 달란트를 드리기 위해서 연주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생을 달라지게 합니다. 내 인생을 조금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직장에 다니는 것과 하나님이 내게 직장에서 할 일을 주시고, 나로 인해 직장이 변화되고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이 나타날 수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일을 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과거 바울의 삶은 질주하는 삶이었습니다. 열심히 앞을 향해 달려가며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그는 자기 삶이 이기적인 삶에 붙잡힌 삶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새로운 용기를 얻어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비난하는 두려움에서부터 벗어났습니다.

  우리가 비약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서기보다 사람의 시선, 사람의 비난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인생에 도약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부모님의 시선, 부모님의 기대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이 말은 부모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대, 하나님의 시선에 붙잡힘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확인되지 않으면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에 대한 기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왜 나를 만드셨습니까? 하나님, 왜 나를 이 땅에 살게 하셨습니까? 하나님, 왜 이런 집에 나를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직업을 주셨습니까?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달란트를 주셨습니까? 하나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 사명으로 깨닫게 해주세요.”
 
  마음의 결단이 생기지 않으면 결코 인생의 도약이 없습니다. 그냥 남이 나를 보면 그때 잠깐 잘했다가 늘어지고 새로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는 것,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주는 것, 하나님이 내 가슴속에 이렇게 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을 가슴으로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서고 변화될 수가 있습니다. 그때 세상이 우리를 향해서 뭐라고 해도 비난의 두려움을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변화란 때로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줍니다. 욕먹지 않고 살려는 사람은 인생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결심하면 그것은 사람들의 시선에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통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아무리 잘 해주도 주변 사람들 중에 약 10%는 절대로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반대로 내가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주변 사람들의 10%는 나를 좋아한다.” 이렇게 보면 모든 사람에게 만점 받으려는 것에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중요한 것은 오히려 진정으로 누가 나를 인정해주는가, 정말로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존경받는 사람이 나를 인정하는 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삶은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해보라고 하면 그리로 가고, 또 저렇게 해보라고 하면 그리로 가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전혀 인정해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사명을 주시고 하나님이 내 모습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내 목숨보다 사명이 더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셨기 때문에 세상이 그를 무너뜨리려는 모든 유대인들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사도행전 20:19)

  바울은 유대인으로부터 온갖 간사한 계략에 몰려 시험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를 무너뜨리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모든 공격으로부터 넘어가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겸손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눈물로 기도하면서 자기의 길을 갈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때 바울이 받았던 아픔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가야했는데 성령은 예루살렘으로 가면 환란이 기다리고 있고 결박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도피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24)
 
  그는 자기의 삶이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를 향하여 가는지를 가슴으로 깊이 깨달았습니다. 저는 2주 동안 터키에 가서 수천 킬로미터를 버스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길을 더위와 추위를 무릅쓰고 걸어서 산을 넘고 강을 지나며 간 것을 생각하니까 바울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에 기록된 그의 모습이 가슴에 다가왔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린도후서 11:23-27)

바울의 수고와 생명을 건 삶의 도전, 죽음에까지 이르는 고난의 역사를 마다하지 않고 사명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한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서 내게까지 이런 복음의 역사가 전달된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생에는 반드시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수를 안 믿어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신앙의 길로 걸어가면 바울처럼 부딪혀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대가를 치룰 준비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머리를 숙여 수고하고 땀 흘리고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며 부딪혀 나가야 합니다. 그때 도망가거나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돌파하세요. 도망가면 갈수록 더 큰 후회와 두려움이 덮쳐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부딪치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십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총독으로 있었던 플리니라는 인물이 당시 그리스도인을 박해했던 로마 황제 트라얀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후 1세기 말-2세기 초기독교인의 삶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플리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몰라서 트라얀 황제에게 묻기 위해 편지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황제여, 저는 그들(그리스도인)에게 신에 이름들을 불러보라고 하며 그리스도인을 저주하라고 명했습니다. 진짜박이 기독교인들은 그 명령에 불복종했습니다. 그들은 새벽이 되기 전 일정한 날에 모임을 갖고 신이라 여기는 그리스도에게 찬양을 올리곤 했습니다. 또 죄를 짓지 않겠다, 도둑질과 간음과 사기를 행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행하는 잘못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런 미신적인 것을 행한다는 것 외에 다른 혐의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벌써 1세기에 이렇게 새벽마다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드렸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려고 도대체 뭐하는 집단인가 찾아봤더니 그들은 새벽에 모여서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예배드리면서 이제는 죄 안 짓겠다, 도둑질 안하겠다, 간음하지 않겠다, 사기 치지 않겠다고 작정하는 것 외에 나쁜 것이 없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그들의 삶에 일구었던 믿음을 통해서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복음의 역사가 전달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전심전력합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이 우리 인생에 우선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인생의 사명을 품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어떤 달란트와 직업을 가지고 개인의 역사를 이루어도 괜찮습니다. 내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설 때 그것이 사명인 것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이 일을 한번 평생 해봐라.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공부해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인생을 달려가라.”

우리는 수고하고 땀 흘리며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기도하면서 정면으로 부딪혀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삼으면서 부딪혀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삶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주실 것입니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 생명을 걸고 죄의 복음을 나누었던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서 우리가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시금 주님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내 인생의 우선권인 생명보다 더 귀한 주님을 사랑하는 사명을 알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정치하는 사람, 하나님 사랑하면서 기업하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문화, 예술의 달란트를 마음껏 발휘하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공부하며 학문하는 사람, 하나님 사랑하는 법조인과 의사, 직장인과 가정주부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통하여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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