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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빗나간 목표 (창 33:17~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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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빗나간 목표 
◈본 문: 창세기 33:17~34:7

지난 7월 17일(수) 승무원과 승객 186명을 태운 브라질 탐 항공소속 에버버스 A-330기가 브라질 상파울로 콩코냐스 공항에 착륙하던 중 활주로에서 미끄러진 비행기가 인근 건물과 주유소에 충돌하면서 폭발하여 210여명이 사망한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사고의 원인은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달리는 비행기나 자동차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정해진 노선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평탄하던 삶이 부서지고 무너져 내리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환경에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어디서 사느냐? 내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어떤 사람들로부터 무슨 말을 듣느냐? 하는 것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이나 삶의 질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 맹자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이사를 세 번이나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환경은 사람에게 절대적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머물러야할 장소, 만나야할 사람에 대해 교훈하시기를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편 1:1~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며 살기를 바라십니까? 그리하려면 위치 선정을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복과 화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생각, 죄인의 발걸음, 오만한 자의 자리를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창세기 33장~34장은 사람이 머무는 장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조상인 야곱이 단신으로 고향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갈 때, 날이 저물어 돌을 베개하고 들판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날 밤 꿈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세기 28:13~15)하셨습니다. 눈을 떠보니 꿈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감격하여 베개를 삼았던 돌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지었습니다.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굳게 맹세하기를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세기 28:20~22) 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맹세한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나를 지키셔서 승리하게 하시면 이곳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겠다는 것과, 둘째는, 십일조를 반듯이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야곱은 20년간 머슴살이를 하면서 많은 고생을 했지만,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축복하시므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다시 야곱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창세기 31:13) 하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20년 전 벧엘 들판에서 하나님께 맹세한 것을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야곱은 모든 가족과 가축을 이끌고 벧엘을 향해 출발을 했습니다. 벧엘을 향해 나아가던 야곱은 도중에 목적지를 수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집 벧엘이 아닌 세겜이란 곳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까닭은 그곳 세겜에는 물이 넉넉하고 초지가 좋아 목축하며 살기에 적당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맹세한 벧엘이 아닌 세겜으로 목적지가 바뀌었습니다. 다시 말해 목표 즉 방향이 처음 것과 다르게 빗나갔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러한 야곱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一. 벧엘이란 어떤 곳입니까?

벧엘이란 말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벧엘 들판은 야곱이 가장 외롭고 두려움에 처해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야곱을 위로하시며 축복을 약속하신 곳입니다. 이에 감격한 야곱은,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고 복을 주신다면 이곳으로 돌아와 베개 삼았던 돌로 하나님의 성전을 지겠노라고 서원했던 곳입니다. 하나님은 이곳 벧엘에서 야곱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벧엘은 어디이겠습니까? 벧엘은 오늘날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듯 오늘날 하나님의 집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중심해서 하나님을 섬기기며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육신의 안식처가 가정이듯, 교회는 우리 영혼의 안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84:3~4에 말씀하시기를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기도, 찬양, 봉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영혼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삶의 지혜와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러한 지혜와 소망과 용기는 세상을 이기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승리하는 삶의 모습은 하나님께 또 다른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역할이며 교회의 중요성인 것입니다.

二. 야곱이 머문 곳은 세겜이었습니다.

세겜이란 것은 “일부분”이라는 뜻입니다. 벧엘을 향해 가던 야곱이 왜 세겜에 머물렀습니까? 그 까닭을 본문 17절에 밝히고 있습니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창세기 33:17)고 했습니다. 벧엘에 가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전을 세우기로 맹세한 야곱은 자기와 짐승을 위해 세겜에 집을 짓고 머물렀습니다. 출발 할 때에는 하나님을 위하여 벧엘로 가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러던 야곱의 마음은 자기를 위하고 짐승을 위하는 것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세겜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출발한 목표가 자기와 짐승을 위한 것으로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출발할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자 출발했는데, 이제는 자기 자신의 평안을 위한 삶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목적이 수정되었습니다. 세겜 들판을 바라보니 물이 넉넉하고 초원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아름다운 집을 짓고 가축의 우리를 짓고 살아가면 한없이 행복할 것만 같았습니다. 벧엘로 가서 하나님의 전을 세우려던 맹세는 없었던 일로 취소했습니다.

그렇다하여 야곱이 하나님을 아주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세겜에서도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세겜의 뜻이“일부분”이란 것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은 야곱의 삶에 있어서 일부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분적인 순종, 절반의 순종이었습니다.

야곱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하나님을 섬기며 의지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야곱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야곱이 외삼촌에게 20년 동안 여러 번 속으며 살았지만 하나님의 축복으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고 온다는 소식을 듣자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고, 하나님은 야곱의 기도를 들으시고 형의 위협으로부터 건져주셨습니다.  야곱이 누리고 있는 지금의 부귀와 평안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있어서 이제 하나님은 삶의 일부분으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야곱은 행복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착각이었습니다. 달리던 열차가 노선을 빗나갔음에도 무사하기를 바라는 어리석음과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이 어디에 있을까요? 행복은 하나님을 중심해서 살아갈 때입니다. 그리스어로 행복이란 “유다이모니아” 라고 합니다. “다이모니아”란 하나님이란 뜻이며 “유”란 “같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과 같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하는 것이 행복이란 뜻입니다. 행복이란 하나님과 함께할 때 있게 되는 것인데, 야곱은 하나님은 옆으로 제쳐놓고 행복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을 지키시며 축복하신 하나님 외에 다른 방면의 행복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착각이었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어리석음이었습니다.

탈무드에 개에 관한 우화가 있습니다. 한 랍비의 집에 개가 있었는데 그 개는 자기 꼬리에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 꼬리를 잡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꼬리를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제자리에서 빙빙 돌 뿐이었습니다. 드디어 그 개는 지쳐서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한 늙은 개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나도 한때는 자네처럼 그랬지만 결국 실패하고 한 가지 사실만 깨달았다네! 꼬리를 잡으려면 어지러울 뿐이지만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리면 꼬리가 나를 따라왔어.”

그렇습니다. 행복은 자신의 방식대로 노력하고 탐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목표 즉 하나님을 섬기며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덤으로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三. 세겜에 머문 결과가 무엇입니까?

1. 야곱의 자녀들에게 화가 임했습니다.

야곱은 아들 열둘, 딸 하나를 두었습니다. 딸의 이름이“디나”였습니다. 외동딸 디나가 세겜 성에 친구를 찾아 나갔다가 그만 추장에게 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격분한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금지옥엽(金枝玉葉)같은 딸은 몸을 더럽히게 되었고, 아들들은 손에 피를 묻힌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세겜에 머물며 얻은 결과였습니다. 어디에 머물러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2. 야곱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창세기 34:30에 당시 야곱의 심정을 기록하기를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고 했습니다. 20년 넘게 쌓아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위기를 맞았습니다. 행복과 평안의 꿈은 사라지고 이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생존의 기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한 곳에 행복은 없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앞세운 삶을 살았을 때에는 언제나 승리했는데, 하나님을 등 뒤에 세웠을 때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삶의 전부로 삼았을 때에는 야곱을 당할 자가 없었는데, 하나님을 삶의 일부분으로 여겼을 때는 귀한 자녀들에게 무서운 화가 닥쳤습니다. 하나님의 집 벧엘을 향해 나아가던 야곱이 자기 집과 짐승의 우리에만 관심을 기울였을 때는 하나님의 보호도 멈추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품삯을 열 번이나 속인 야박한 외삼촌의 손에서 야곱을 지켜 주셨습니다. 400명의 적군이 야곱을 죽이고자 몰려왔을 때에도 야곱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지켜주셨습니다. 그러나 세겜에 머물며 자기 가정과 자기 가축에만 마음을 두며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떠났을 때 하나님도 야곱을 멀리 하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밖에 없던 딸은 욕을 당했고, 아들들은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사무엘상 2:3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야곱의 방심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베드로전서 5:8~9)하셨습니다.

야곱이 방심한 때가 언제였습니까? 평온한 날이었습니다. 부자가 되어 금의환향(錦衣還鄕)하던 중이었습니다. 20년 전 원한을 품었던 형의 위협이 사라진 때였습니다. 이제는 근심걱정이 없었습니다. 이때에 야곱의 마음은 하나님 중심에서 세상 중심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동안 지키시며 축복하신 하나님을 더욱 정성스럽게 열심히 섬겼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인데 안타깝게도 야곱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야곱에게는 평온한 때가 위기였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하루는 꿈을 꾸었습니다. 사탄이 자기 부하들을 모아놓고 전략회의를 하는 꿈이었습니다. 그 회의 주제는 지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전멸시킬 방안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일부행동대원들은 지상에 내려가서 여러 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을 전멸시킬 흉계를 꾸미다가 실패한 채 돌아온 부하들이 보고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부하는 보고하기를 “두목님, 저는 사막에서 혼자 걸어가는 예수쟁이 앞에 큰 사자를 한 마리 갖다 놓았습니다. 사자가 잡아먹으려고 으르렁 거리고 있는 데에도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조용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또한 부하가 보고하기를 “두목님, 저는 바다를 항해하는 어떤 예수쟁이 앞에 큰 풍랑을 일으켜 그가 타고 가던 배가 암초에 부딪히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부하가 보고하기를 “두목님, 저는 어느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모든 일이 잘 되도록, 또 편안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교회도 가정도 평안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보니까 그 교회 교인들의 심령은 썩어지고 마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꿈을 꾸었던 루터는 종교개혁에 나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멀리한 때가 언제입니까? 모든 역경 다 지나고 평온한 때였습니다. 이때가 위기였습니다. 방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야곱만이 아니라 인간의 공통된 약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지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신명기 31:20~22)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예언처럼 “먹어 배부르고 살지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하신 말씀은 그대로 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울 땐 하나님을 찾아 울부짖어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고난에서 건져주셨을 뿐만 아니라 평화와 번영을 누리도록 축복하셨습니다. 하지만 간사스러운 인간은 얼마 후 다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구약성경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 상하는 이러한 인간의 변심의 역사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모든 인류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오늘날 유럽교회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일찍 복음을 듣게 되므로 하나님을 알고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그들은 넘치는 축복을 받아 세계역사의 중심에 우뚝 섰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축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영국교회의 경우, 조상들이 온 정성 다해 건축한 하나님의 성전은 텅텅 비어 건물을 유지할 수가 없어 헐값에 팔려 나가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웅장한 예배당 건물이 피자 가게로 팔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던 강단에 피자를 굽는 화덕이 얹혀있는 신문보도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교회들도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해마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교회를 멀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성급한 민족의 특성답게 하나님을 멀리하는 속도도 빠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교회는 역사의 꽃을 활짝 피워 마음껏 누리기라도 했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기도 전 벌써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머물러 계십니까? 하나님의 집 벧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일부분으로 사고 있는 세겜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이 꿈꾸는 행복의 주관자 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승리케 하시는 유일한 능력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목표이며, 존재의 목적입니다.

이토록 존귀하신 하나님을 온 정성,
온 마음 다해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이토록 존귀하신 하나님을 온 힘 다해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이토록 존귀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은 그를 지키시며, 인도하시며,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삶을 거울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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