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겸손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라! (출 3:1-12)

  • 잡초 잡초
  • 263
  • 0

첨부 1


겸손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라! (출 3:1-12)

어느 날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과 말을 하지 못하는 농아인이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말을 못하는 농아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사람아, 그래도 자네는 행복한 사람이야!"
이 말을 듣고 농아인이 물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아니, 자네는 말은 못하지만 그래도 볼 수 있지 않나?  아름다운 산과 푸른 바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마음껏 볼 수 있지 않나 말일세.  보라구, 내 앞에는 온통 컴컴한 어두움뿐이지 않나?"

이 말을 듣고 있던 농아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무슨 소리야?  자네가 나보다 몇 십배, 아니 몇 백배나 행복한 사람이야?  생각해 보라구.  자네는 앞을 보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마음껏 말할 수 있지 않나?  아무리 아름다운 산을 본들, 맑고 푸른 바다를 본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본들 무엇하나.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을 할 수 있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을 할 수 있나?  어디 그뿐인가?  자네는 앞을 보지 못할 뿐이지만 나는 말을 못하니까 듣지도 못하지 않는가.  그러니 자네야 말로 나보다 훨씬 행복한 사람이야."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누구의 말이 옳은가를 생각하겠지만 그러나 제 생각에는 두 사람이 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에게는 그래도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을 보지 못하는 농아인에게는 앞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잃어버린 것보다 가지고 있는 것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것만을 생각하면서 한탄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에게 없는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께서도 나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지금 나에게 있는 것으로 감사하십시오.  지금 나에게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십시오.  내 옆에 못나도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내 자녀가 그냥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시간 옆 사람에게 이렇게 축복의 인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제 옆에 앉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한 민족이 위대한 역사를 창출하지 못한 민족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한 사람이 이 땅에서 복을 누리지 못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시대 속에서 위대한 역사를 창출한 민족은 언제나 하나님을 가까이 했습니다.  역사 속에서 이름을 남기고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던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저가 너희를 가까이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지금은 우리가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오늘 이 땅에 술 먹고 방탕하는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이 나라의 풍토는 자연히 바뀌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황무한 이 땅에는 다시금 생명의 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죄인이 변하고 원수가 변해야 합니다.  탕자가 변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할 때입니다.  하늘의 은혜를 받아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이 민족이 살고, 이 사회가 삽니다.  그래야 내 가정이 살고, 내가 삽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 민족 위에 에스겔 골짜기에 불었던 생기의 바람이 사방으로부터 일어나리라"
"이 땅에 북풍이 불고 남풍이 불어서 여호와의 동산에 하늘의 향기를 날리리라"

그렇습니다.  지금 이 민족 위에는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생기의 바람이 동서남북 사방으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타락과 죄악으로 썩은 냄새가 나는 이 땅 위에 북풍이 불고 남풍이 불어서 하늘의 향기가 날려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이 땅에 생기의 바람을 일으켜 주옵소서.  하늘의 향기가 날리게 하옵소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염려와 근심을 합니다.  노사간의 극한 대립으로 이 땅의 수많은 기업들이 공장을 해외로 옮기고 있습니다.  길거리에는 온갖 거짓과 탐욕이 난무합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공동체의 관계가 깨어지고 있습니다.  과연 죄악에 무너진 이 땅에 내 자녀들을 맡겨도 될 것인가?  불신과 정죄와 분열로 갈갈이 찢겨진 이 민족에 희망은 있는 것인가?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닫으면 열자가 없고, 열면 닫을 자가 없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 민족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나와 내 가정을 사랑하신다.  사랑하시되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다.  문제는 이것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오늘 혼돈과 혼란과 무질서가 세상에서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에게는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위기감이 팽창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에 평화를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선택된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 민족을 세우실 것입니다.  동일하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저와 여러분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이 이 민족 위에 다시 나타나게 하옵소서.
만군의 여호와여,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의 복을 나와 내 가정 위에 부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막노동꾼입니다.  아주 멋드러지게 옷을 차려입고 도도한 듯이 폼을 잡고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이 아니라 옷소매를 걷어부치고 땀흘려 헌신하는 막노동꾼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이 막노동꾼이 되어야 합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이 세상에는 잘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들도 너무 많습니다.  일은 하지 않고 폼만 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결국 이들 때문에 사회가 거짓과 탐욕으로 혼탁해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믿음의 사람입니까?  막노동꾼입니다.  우리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낮아져라.  섬겨라.  겸손하라.  먼저 대접하라.  자기 십자가를 져라.'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에 실천적인 삶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지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섬기는 자로서 막노동꾼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과거에 우리 부모님들은 가슴에 참을 인자를 쓰고 살아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 여정에서 참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 순간 참지를 못해서 인생을 망치는 경우를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무릇 사람은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참으면 모두가 약해져 버리고 맙니다.  너무 참는 데만 애쓰다보면 성격이 소심한 사람으로 바뀌고 맙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의(義)도 중요합니다.  모름지기 인생을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의로워야 합니다.  그러나 의라는 명분에 묶이게 되면 융통성을 잃어버리고 딱딱하게 됩니다.  그래서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대개 융통성이 없고 딱딱합니다.

예(禮)도 중요합니다.  우리 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예의를 중요시했습니다.  아무리 다른 것을 다 잘해도 예의가 없으면 돼먹지 못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보면 돼먹지 못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자고로 우리는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지나치게 되면 자기 위선이나 아첨으로 오해받게 됩니다.

지(智)도 중요합니다.  현대 사회는 지식의 사회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지나치면 언어 유희와 논쟁자가 되고 맙니다.  결국 지식이 지나치면 말꾼만 늘어나게 됩니다.

용기도 중요합니다.  겁이 많아서는 안됩니다.  단호하게 결단하고 씩씩하게 일어나는 기개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강하고 담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너무 지나치면 폭력자가 됩니다.

믿음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덕이 없는 믿음은 혼돈과 혼란을 가져올 뿐입니다.  극단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믿음은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그런 믿음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잘못된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더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덕을 쌓으십시오.  덕이 없는 믿음은 독선이 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덕이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행하는 막노동꾼이 되어야 합니다.  삶의 내용이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복음은 아는데 있지 않고 누리는데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아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누리는데 있습니다.  많이 아는 것으로 이 땅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 땅을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능력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대와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막노동꾼이 되십시오.  가만히 앉아서 뺀질이가 되지 말고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헌신의 자리에로 들어가십시오.  그래서 이 땅을 변화시키는 우리들의 믿음의 모습이 하늘의 천사도 흠모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질병이 일어나는 것은 체질 때문입니다.  체질이 바뀌면 그 바뀜에 따라 여러 가지 질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병을 고치려면 그 사람의 체질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육류를 좋아하던 사람은 채식으로 체질을 바꾸어야 합니다.  짜고 매운 음식을 좋아하던 사람은 싱겁고 부드러운 음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무릇 자신의 질병을 고치기를 원하는 사람은 싫든 좋든 체질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회도 매 한 가지입니다.  병든 사회의 체질이 달라지면 문제 많은 사회의 여러 가지 악과 무질서와 파괴와 혼돈의 일들이 고쳐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인 제도나 사회 구성요소나 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일시적인 효과 밖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를 이루고 있는 생명은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사람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고쳐져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가 고쳐지고 역사가 고쳐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내가 변해야 합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변하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다 지나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해야 합니다.  변하지 않으면 역사 속에서 도태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변화와 변질은 구분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변해야 하지만 변질되면 안됩니다.  변질이 무엇입니까?  고유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래적인 본질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변해야 한다고 하면서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고 세속적으로 변하는 것을 우리는 변질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변화가 무엇입니까?  발전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거룩한 복음의 본질 안에서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내 가치관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고, 삶의 내용이 거룩하게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변질되어서는 안됩니다.  변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변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이 시간 성령의 능력을 받으셔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셔야 합니다.  이 시간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십시오.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를 받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성령의 능력으로 뿔난 사람은 뿔이 없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이 강퍅한 사람은 온유해지기를 축복합니다.  시기와 분쟁과 음욕과 질투와 더러운 육신의 열매를 따라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달라지고 변해지기를 축복합니다.

어떻게 변할 수 있습니까?  형제들아 내가 어찌할꼬?  어떻게 해야 내가 변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인생의 팔자를 고쳐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인생 팔자는 타고났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사주팔자라고 하면서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인생의 팔자는 고쳐집니다.

보십시오.  유대 땅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나 잡던 무식한 베드로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팔자가 고쳐졌습니다.  그는 예수를 만남으로 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오고 오는 세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칭송을 받을 것입니다.

죄 가운데 몸을 팔던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를 만남으로 인생의 팔자가 고쳐졌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손가락질을 당하면서 저주 가운데 살던 인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거룩한 삶을 살면서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성 막달라 마리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돈만 알고 돈을 많이 벌던 세리장도 예수를 만남으로 인생에 살맛이 났습니다.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 여정에서 살맛을 모르고 살던 모든 사람들이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살맛이 났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고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삶의 열정이 살아났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만나십시오.  만남의 체험이 없으면 그 신앙은 밋밋합니다.  체험의 신앙이 없다면 참으로 불행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진리의 능력이 지금도 우리 속에 운행되고 있습니다.  땅이 공허하고 혼돈할 때에 이 땅 위에 운행하셨던 하나님의 신이 지금 우리들 가운데도 운행하고 계십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던 이적과 기사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내 속에 경험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을 호흡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는 곳입니다.  살맛이 없던 사람들이 와서 살맛을 얻는 장소입니다.  삶의 희망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와서 거룩한 희망을 발견하는 장소입니다.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와서 열정을 회복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생기의 바람을 맞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곳에서 성령의 능력을 탐내십시오.  주님을 만나십시오.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을 붙드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여, 나를 만나 주시옵소서.
내 영이 주를 사모합니다.  주여, 성령으로 내게 임하시옵소서"

시대가 악할수록 하나님은 더 사람을 찾습니다.  시대가 어둡고 암담할수록 하나님은 더더욱 사람을 찾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타락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성을 멸하기로 말씀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은 의인 열 명이 있다면 그 성을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성을 용서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아브라함보다 하나님이 더 간절하셨을 겁니다.  그 성에 의인 열 명을 찾기를 원하는 것은 아브라함보다 더 간절히 원하셨을 겁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셨는데 사람들이 외면했다는 겁니다.

기억하십시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위해서 당신의 준비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문제는 겸손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도망을 가야만 했던 모세, 그의 부모도 형제도 포기했던 모세,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모세를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렀던 때가 언제입니까?  왕궁에서 화려하게 이름을 날릴 때가 아니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처가살이로 자신의 생명을 겨우 연명할 때였습니다.  직업도 변변치 못하고, 가진 재산도 없고, 이 산 저 산으로 양을 몰고 다니며 실패와 좌절 속에 40년의 세월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준수한 체격 조건도, 왕실의 특수 교육도, 애굽의 높은 학문도, 숭고한 자기 관리도 사막의 모래 바람 앞에서 다 무너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에 못 마땅한 것은 고사하고, 내가 나를 보더라도 별로 쓸모가 없어 보입니다.  잘난 구석이 없어 보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다 부셔졌을 때, 다 무너졌을 때, 이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을 그때에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모세를 들어서 쓰시겠다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실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자기 힘으로, 자기 지식으로, 자기 노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에게는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낮아지고 겸손한 사람에게 찾아오시고 그에게 역사를 맡기십니다.

그 초라한 떨기나무,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떨기나무에 하나님께서 임하셨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떨기나무에 하나님의 불이 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떨기나무 같은 인생이라도 여호와의 불이 임하면 됩니다.  그 심령에 하나님의 불이 타는 자는 힘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하늘의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호렙산 중턱 떨기나무에서 일어난 그 불은 나무를 태우는 불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태우는 불이었습니다.  희망도 내일에 대한 비전도 싸늘하게 식어진 모세의 마음을 뜨겁게 한 불이었습니다.  사명의 불이요 성령의 불이었습니다.  믿음을 회복하고 사랑을 회복하는 불이었습니다.  그가 겸손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겸손히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다시 말해서 겸손하라는 말입니다.  교만하면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교만하면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교만하면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도 교만한 사람은 거들떠보기가 싫습니다.  잘난 척하는 사람은 함께 하기도 싫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다릅니다.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와 함께 걸어가고 싶습니다.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를 만나면 내 마음에도 기쁨과 평안이 넘치게 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로부터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랑하는 여러분, 겸손하십시오.  더 겸손하십시오.  더 더 겸손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겸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겸손하면 하늘의 불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겸손하면 성령의 능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겸손하면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겸손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겸손하여 하늘의 불을 받으십시오.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으로 하늘 역사에 주역이 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을 위해 일어나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하고 마음껏 구원의 십자가 깃발을 흔들어보십시다.  우리의 남은 때가 얼마인지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남은 때가 얼마이든지 간에 나에게 남은 때를 주를 위하여 멋지게 한번 쓰임 받아 보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체질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 땅의 거짓과 탐욕과 죄악의 씨앗들이 뿌리째 뽑혀나가게 될 것입니다.
내 남은 때를 오직 주를 위하여 살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가 잘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모세에게 어떤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겸손하여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온유하여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처음부터 겸손했습니까?  처음부터 온유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애굽의 왕궁에 있었을 때에는 아주 거만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때리는 애굽의 관리를 때려서 죽었지 않습니까?  그만큼 그는 성질이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교만하고, 성질이 불같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겸손하고 온유해졌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찾아오셨고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떨기나무같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이 자기를 태울 수가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결코 자기를 태우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오히려 연기만 피웁니다.  교만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려고 할 때에는 연기를 피우고 다닙니다.  마음속에서 향기를 뿜어내지는 못할지언정 시꺼먼 연기만 피우고 다닙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눈에 눈물만 흐르게 합니다.  목만 케케하게 만듭니다.  짜증만 나게 합니다.  그리고 쉽게 꺼집니다.

그러나 떨기나무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보십시오.  불이 계속해서 피어오릅니다.  떨기나무는 아름답게 탑니다.  그러나 연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 인생에 연기를 피우지 말고,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성령의 불을 태우십시오.  어떻게요?  겸손하셔야 합니다.  더 겸손하셔야 합니다.

아십니까?  교만의 상징이었던 웃시야가 죽던 해에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 안의 교만이 죽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웃시야가 죽었더니 이사야는 하나님의 비전을 마음에 품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안의 내가 죽어야 하나님의 비전을 품을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겸손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달려가십시다.  그것이 나와 내 가정과 이 민족을 어둠과 죄악으로부터 살릴 수 있습니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