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의 말씀을 듣더니 (암 8:11-14, 골 1:15-23, 눅 10:38-42)

  • 잡초 잡초
  • 328
  • 0

첨부 1


제목 : 그의 말씀을 듣더니
본문 : 아모스 8:11-14, 골로새서 1:15-23, 누가복음 10:38-42

1.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 땀 흘리며 철야 기도하실 때 동행했던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3제자는 피곤을 이기지 못하여 주님의 그 피땀의 기도는 아랑곳 하지도 않은 채 잠에 빠졌습니다. 우리 주님은 기도하시다 제자들에게 오셔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 나중에는 “한 시간 동안만이라도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할 수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우리가 단 한 시간만이라도 주님과 함께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루를 살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시간을 단 한 시간이라도 할애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또는 게으르기 때문에 주님과 한 시간도 같이 있는 시간을 마련하지 못합니다. 그때 제자들이 단 한 시간도 주님과 함께 있어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제자들은 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여기에 오늘 우리들도 역시 신앙 실패의 이유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가 일년을 살아갈 때 교회력을 기준으로 진행해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교회력을 중심으로 살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주님과 동행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교회력은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첫 주일이 일 년의 시작입니다. 대림절 4주간이 지나면 성탄절입니다. 그러므로 대림절은 마치 아침을 기다리는 새벽시간과도 같습니다. 성경의 특징,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특징이 기다림에 있습니다. “오시는 이”라는 말이 예수님을 지칭하듯이 우리는 지금도 날마다 순간마다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대림절 성탄절이 지나면 동방박사들이 주님을 알현한 주현절이 있습니다. 주현절기가 끝나면서 성회수요일부터 사순절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사순절의 클라이맥스는 종려주일, 고난주간, 성금요일입니다. 그리고 부활절입니다. 부활 후 40일째가 승천일이요, 그날부터 10일이 지나면 오순절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강림절 다음주일이 3위1체 주일이요 그때부터는 왕국 절이라고 해서 다음 대림절까지 성부의 계절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력은 성 3위 하나님과 함께 1년이라는 여정을 살아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교회력을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주인이시요, 역사의 주인이시요, 시간의 주관자이시요, 알파와 오메가로서 역사를 완성하실 분이라고 우리 신앙을 고백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주님은 우리가 단지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에서도 역시 주님과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몸을 성전삼고 거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어디 있든지 거기에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옛날 모세가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모세야,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사는 곳 어디나, 내가 있는 곳 어디나 거기가 바로 주님이 함께 계시는 거룩 한 성소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도 주님이 거기 계시고, 바다 밑에 우리 자리를 펼지라도 주님은 거기도 계신다고 했습니다. 옛날에 야곱이 벧엘에서 꿈에 주님을 뵙고 나서 뭐라고 했습니까?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 하였도다”라고 하면서 “여기가 하늘의 성전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한 주간을 단위로 세상을 살게 되는데 매일매일 주님의 은총을 기억하면서 주님과 함께 한 주간을 살수 있다면 이보다 더 복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럴 테면 주일에는 크신 은혜를, 월요일은 죄에서 건져주심, 화요일은 유업을 주심, 수요일은 구속하심, 목요일은 용서하심, 금요일은 화목하게 하심, 토요일은 소망을 주심에 대해서 묵상하며 감사하고, 기도하면서 산다면 그런 인생은 비록 이 땅에 살면서도 거기가 바로 천국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찬송가에 “이곳과 저곳 멀잖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함께 살면 이곳이 바로 저곳 즉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산다고 하면 주님 말씀대로 천국은 이미 내 안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곳과 저곳은 정말 멀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입니다.


2.  오늘 누가복음 10:38에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노정은 목적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시면 거기 우리 주님의 구원의 역사가 따르게 됩니다. 사람이 살고 나면 발자취가 남게 됩니다. 일생을 마치고 나면 우리 한평생에 대한 평가가 따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일생 살아온 노정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걸어 온 한 평생의 발걸음이 얼마나 주님과 동행한 것으로 나타나겠습니까? 이미 지나가 버린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이제부터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내 짧은 삶의 끝 날에 반드시 주님을 만나야 한다면 나는 이제부터 어떤 삶의 길을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38절 하 반절에 보면 “마르다라 이름 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 하더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뭐라고 했습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일들이 숱하게 많겠지만 가장 옳고 보람된 일이 있다면 주님을 영접하는 일입니다. 내가 다른 일을 다 실패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일단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해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마르다의 집에 가셔서 쉬시고 대접을 받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3남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 시몬, 이 일가족은 여러 사람의 눈총과 당국의 감시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예수님을 그들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또 전설에 의하면 그 아버지가 나병환자였는데 예수께서 고쳐 주셨다고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마음에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거기서 주님이 놀라운 일을 이루어주십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을 온전히 모십시오. 주님이 거기 임재하시면 놀라운 일을 여러분 가정에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정말 주님을 우리 교회의 주인으로 제대로 모시면 주님은 우리 교회를 통해서 우리 모두의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3.  그런데 여기 주님을 영접한  마르다와 마리아가 막상 주님을 모셔놓고서 주님을 대하는 방법은 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역시 주님을 섬기는 방식이 이 두 사람 중 하나에 속하게 될 것입니다.

(1)  먼저 마르다를 보십시다. 38절에 “마르다라 이름 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고 했습니다. 지나 번에는 바리새인 시몬이라는 사람이 주님을 만찬에 초대한 말씀을 살핀바가 있습니다만 오늘 본문에는 한 여성 마르다가 주님을 초대했습니다. 객지에 오신 주님에게는 매우 반가운 초대이겠습니다만 당시 관습으로 볼 때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 마르다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신 주님이시니 그야말로 반가운 초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다의 실패가 어디 있습니까? 물론 그녀가 한 일은 주님을 접대하기 위한 음식준비였습니다.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 자기들에게는 은인이요 또 주님이신데 최고의 접대를 위해 분주하게 수고하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무엇입니까? 마르다는 주님을 자기 집에까지는 초대했지만 주님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시간만이라도 좋으니 나와 함께 있을 수 없더냐?” 이렇게 물으시는 주님이신데 자기 집에 주님이 오셨는데도 함께 있지 못한 것이 마르다의 실패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구주로 영접하신 일은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여러분이 오늘 주일을 맞이하여 주님 전에 나왔다는 것은 얼마나 장하신 일입니까? 그런데 주님과 함께 하십니까? 주님은 주님대로 버려두고 나는 나대로 처신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한다면 다른 것을 아무리 열심히 하고 아무리 잘 한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문제에 실패를 한 것입니다.

(2)  그럼 주님께서 칭찬하신 마리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마리아는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오늘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는 긴박감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을 놓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이 기회를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으로 최대한 활용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서 잠시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시선을 주님에게서 잠시도 뗄 수 없었습니다. 그의 귀를 주님 음성에서 잠시도 돌릴 수 없었습니다. 마르다가 “오늘 아니라도....”라고 하는 “여느 때 의식”이었다고 하면 마리아는 “오늘 아니면...”이라는 “종말의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 신앙이 이래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주님이 오실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 날일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예배가 어쩌면 마지막 예배가 될 수도 있다는 긴박감을 가지고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직 주님께만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것을 다 잃는다고 할지라도 주님만은 잃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4.  마르다에게 붙어 있는 수식어가 무엇입니까?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고 했습니다. “준비하는 일이 많다”고 했습니다. 더 중요한 한 가지 것을 재처 놓고 덜 중요한 여러 가지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매우 분주하고, 복잡하고, 소란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분주한 삶이 정말 중요한 문제 때문입니까? 여러분의 수첩에 메모되어있는 스케줄의 대부분을 한번 삭제해 보십시오. 그 때문에 여러분 삶에 엄청난 손실이 올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중요한 일을 위해 덜 중요한 여러 가지 스케줄을 대폭 가지치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도 마르다처럼 중요한 것을 잃으면서 동시에 불평불만 원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 “마음이 분주하다”는 말은 “사방에서 끌어당긴다”는 뜻입니다. 복잡한 스케줄을 말합니다. 이런 일들이 영적 생활을 하는데 결정적인 장애요인입니다. 신앙 실패의 원인이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적어도 우선순위를 알았던 여인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는데 마리가 선택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라고 할지라도 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택한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그의 발치에 앉아서 그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듣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선택을 “탁월한 선택”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구약 아모스서 8:11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육적이고 물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영적인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또 오늘 봉독한 서신 골로새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유일성을 강조합니다.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 “만물보다 먼저 계신 이”, “만물의 으뜸이신 분”, “몸인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 “먼저”, “으뜸”, “머리”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삶과 신앙에 주님보다 우선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대로 정말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마침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이 모든 것을 (넉넉하게) 더하여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