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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에녹은 (히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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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으로 에녹은
▣ 본문∕ 히브리서 11:5~6

에녹의 믿음

오늘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에 등장하는 두 번째 인물은 바로 에녹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1장 5절과 6절이 말씀하는 에녹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5절 첫머리에 나온 것처럼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는 사실입니다. 어디로? 하늘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녹을 산 채로 하늘나라로 옮기셔서 세상에서는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진 사람은 단 둘뿐인데 바로 엘리야 선지자(왕하 2:11)와 에녹입니다. 대단한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요즘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신천지 이단 이야기를 제가 몇 번 했는데 이 신천지 이단의 교주는 이만희라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 이만희라는 사람이 항상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기는 절대 죽지 않는다고요. 절대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히 산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예언 하나 할까요? 제가 좀처럼 예언을 잘 안 하는데 오늘은 예언을 하나 하겠습니다. 이만희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언제인지 몰라도 반드시 죽습니다. 왜? 당연하지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한 히브리서 9:27 말씀처럼 이만희라는 교주도 사람이니까 한 번 태어나면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이치가 통하지 않은 단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엘리야와 에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이치, 자연의 순리까지도 깨는 이 놀라운 일을 겪은 두 사람은 정말 대단한 특권, 누구도 누려보지 못한, 심지어 예수님조차 누리지 못한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만 누린 특권을 또 누릴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 오실 때, 재림하실 때 이 땅에 살아 있는 성도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 했습니다. 즉 죽지 않고 살아서 주님 다시 오시는 재림을 맞는 성도들은 재림 때 울리는 나팔소리에 순식간에 다 변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옮겨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놀랍지요? 그래서 에녹과 엘리야는 마지막 때 이렇게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질 성도들을 예표(미리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 5절 뒷부분에 에녹이 이렇게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지는 엄청난 특권을 누리게 된 이유가 나옵니다. 그것은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설교를 통해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고 이제 창세기 5장으로 넘어갑니다. 창세기 5장을 펴세요.

에녹의 족보

창세기 5장에 보면 족보가 하나 나옵니다. 바로 아담 후손의 족보인데 가만히 이 족보를 읽어보면 지극히 평범한 족보입니다. 여러분 집안에도 족보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대개 족보에는 우리 조상님이 무슨 벼슬을 하고 얼마나 대단한 분이었는가를 소상히 적지 않습니까? 그래야 좀 자랑할 만한 족보가 되는데 창세기 5장에 나온 아담네 집안 족보는 그에 비해서 너무나 평범한 족보라는 말입니다.

이 족보에 보면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대손이고, 또 6장 9절부터 보면 노아부터 아브라함까지 10대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창세기 5장 족보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일정한 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네 가지 기본사항에 따라서 일정하게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첫째, 이름은 무엇이다.
둘째, 장자를 낳은 나이가 몇 살이다.
셋째, 그 후에 몇 년 살면서 자녀들을 낳았다.
넷째, 몇 살에 죽었다.

달랑 이것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묘지 비석에 이렇게만 써있다고 한다면 너무 단순하고 밋밋하지 않습니까. "아무개, 스물일곱에 장자를 낳고 60년을 더 살면서 자녀를 낳고 팔십 일곱에 죽다." 좀 이상하지요? 그런데 이 밋밋한 족보 가운데 아주 독특한 인물이 하나 눈에 띕니다. 바로 에녹이라는 사람입니다. 사실 에녹도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이 네 가지 기본사항에 따라 살았습니다.

첫째, 이름은 에녹입니다. 이름의 뜻은? 이름의 뜻도 잘 모르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입니다.
둘째, 육십 오세에 장자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셋째,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더 살면서 자녀들을 낳았다.
넷째, 삼백 육십 오세를 살았습니다.

지금이야 이만큼 살았으면 대단히 장수한 것이지만 창세기 5장 족보를 보면 제일 장수한 노아의 아들 므두셀라가 969세를 살았고, 전체 평균 912세를 살았으니 에녹이 오래 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명한 것입니다. 유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오래 살지도 못한 그냥 그렇고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에녹이 이렇게 삼백 육십 오세를 살다가 죽었답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틀리지요. 다시 한 번 정확히 봅니다. "삼백 육십 오세를 살고 죽었다"가 아닙니다.

에녹도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이렇게 기본 인생만 살다가 갈 번했는데 바로 이 한 가지 점에서 인생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과 달라졌습니다. 안 죽었다는 것입니다. "삼백 육십 오세를 살고 죽었더라."가 아니라 "삼백 육십 오세를 살았더라."입니다. 왜요? 진짜 안 죽었으니까요. 24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즉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옮겨 간 것입니다.

동행(同行)

그렇다면 이 죽음을 보지 않는 놀라운 특권을 에녹이 누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것도 22절과 24절에 두 번이나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동행'한다는 낱말은 히브리말로 '할라크'로 그냥 걸어가는 것 혹은 산책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간단하지요? 그냥 에녹이 하나님하고 함께 걸어간 것만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가는 엄청난 특권을 얻었다는 말입니까? 예, 맞습니다. 그냥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면 됩니다. 대단한 일 안 해도 좋고 남들과 아주 다르게 요란한 일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 인생길을 그냥 쭉 걸어가되 나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냥 하나님하고 너무 친하게 손 꼭 붙잡고 내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아주아주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평생을 함께 산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는데 남편이 늙어 쪼글쪼글해진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너무 고마워요." 아내가 힘없는 소리로 반문합니다. "고맙긴요. 나는 당신을 위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데도요?" 남편은 고개를 저으며 말합니다. "아니, 나와 함께 내 평생을 동행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이것이 바로 동행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유행한 최성수의 <동행>(同行)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지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 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찬송가는 아니지만 참 괜찮은 노래 가사입니다. 이게 바로 동행이라는 것이지요. 동행한다고 해서 뭐 대단한 일 안 해줘도 됩니다. 그냥 함께 인생길을 걸어가다가 옆 사람이 슬퍼하면 같이 울어주고, 옆 사람이 추워하면 몸을 가까이 해서 체온으로 따뜻하게 해주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대단한 일, 특별한 일 하는 것보다 그냥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요, 내가 슬프면 하나님이 함께 울어주시고, 내가 추우면 따뜻하게 감싸주시고, 또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말동무도 되어 드리고 그 분이 말씀하시면 그냥 들어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기도, 동행

기도도 마찬가지예요. 인도의 성자라고 하는 테레사 수녀가 인터뷰를 하는데 앵커가 이렇게 질문했답니다. "당신은 기도할 때 뭐라고 말하나요?" 테레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냥 듣고만 있지요." 그 다음에 앵커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기도할 때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나요?"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도 들으신답니다." 멋진 말 아닙니까? 기도가 뭐 대단한 것인가요? 유창한 말, 미사여구로 내 하고 싶은 말만 실컷 하고 끝내는 것이 좋은 기도일까요? 나는 기도하면서 하나님 음성을 듣고, 하나님도 내 음성을 듣고, 뭐 대단한 말을 해서 좋은 게 아니라 그냥 서로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좋아하는 것이 기도지요. 늙은 아버지가 멀리 사는 아들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얘야, 오랜만이다." "예? 아버지세요? 혹시 집에 무슨 일 있어요? 이렇게 전화를 다 하시고... 혹시 무슨 일 생겼어요?" 그런데 늙은 아버지는 조용히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무 일도 없다. 그냥 네 목소리가 한 번 듣고 싶었다." 바로 이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목소리만 들어도 좋은 것입니다. 특별한 말, 중요한 말 아니어도 좋으니 그냥 말만 들어도, 목소리만 들어도 좋은 법입니다. 이게 기도라는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 음성을 그냥 듣고, 하나님은 내 음성을 그냥 들으시고요.

동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같이 걷는 것입니다. 산책하듯 천천히 하나님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가는 거예요. 그러다가 서로 말동무도 되어 주고, 서로의 음성을 듣고 말이죠. 이게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가 뭐 대단한 것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가 가고 싶은 곳만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그 분을 많이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분께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디로 갈까요?" 그러면 하나님이 가자고 하시는 방향으로 가면 되고요. 이게 바로 순종입니다. 순종이 뭐 대단한 것 아닙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하나님 손 붙잡고 그 분 가시는 길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행'이고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에녹은 이런 삶을 365년 동안 산 것이지요. 믿음이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특별히 좋아하고 예뻐하셔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여행도 누구와 가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아모스서 3:3에 재미있는 말씀이 나오는데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라고 했습니다. 이왕 좋은 여행 가는데 불편한 사람과 함께 가면 여행길 내내 마음이 편치 못하지요. 그래서 대부분 내가 좋아하는 사람, 마음이 잘 맞는 사람과 함께 여행을 가곤 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정말 잘 믿고 잘 순종했던 사람들이 무수히 많지만 그들 중에서도 이 에녹을 특히 좋아하셨나 봅니다. 그러니 에녹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인생 여행을 하신 것이지요. 묵묵히 그 길을 잘 동행해 준 에녹이 너무 좋아서 너무 예뻐서 그렇게 아무나 받을 수 없는 엄청난 특권과 축복을 주셨나봅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 11장 5절과 6절이 말씀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다시 히브리서로 돌아갑니다. 5절 뒷부분을 보지요.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그것 보세요. 하나님이 에녹을 특별히 좋아하셨다니까요. 그래서 6절이 나온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이제 정리합니다. 믿음은 무엇이냐? 특별히 에녹이 보여준 믿음은 무엇이냐? 간단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너무 친해서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인생의 여행을 말입니다.

믿음, 동행, 상급

계속해서 히브리서 11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즉 믿음은 "그가 계신 것을 믿는 것" 즉, 하나님이 계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어려울 것 없지요. 지금 내가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는데 믿고 뭐 하고 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냥 내 옆에 함께 손잡고 걸어가시는 하나님만 쳐다보면 되는 것을요.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즉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 자기와 친하게 지내는 자, 자기와 함께 인생길을 기꺼이 동행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인생 여행길 끝날 때 상급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이 또한 어려운 일 아니지요. 에녹은 이 두 가지를 잘 했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장 믿음 좋은 대표선수로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에 두 번째 인물로 올라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한 또 한 사람이 바로 뒤 6장 9절에 나오는 노아입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러니 노아도 비록 증조할아버지 에녹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가지는 못했지만 방주를 만들어 세상을 휩쓴 무서운 홍수에서 살아남는 엄청난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노아도 그냥 증조할아버지처럼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하고 너무 친하니까, 그를 너무 좋아하시니까 그냥 죽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어서 방주를 짓고 살아남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녹과 노아라는 믿음의 인물들을 통해 창세기가 가르쳐주는 믿음이란 무엇이냐? 단순합니다. 그냥 하나님과 함께 내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렇게 삽시다. 에녹처럼 삽시다. 다른 누구와 내 인생길을 함께 하기보다 하나님과 인생길을 함께 걸어가고(이것이 '동행'이라고 했지요?), 다른 어느 누구와 말하기보다 하나님과 대화하길 좋아하고(이것이 '기도'라고 했지요?), 다른 어느 누구의 말을 듣고 그 사람 뜻대로 사는 것보다 우리 하나님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이것이 '순종'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다른 어느 누구와 친하게 지내기보다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시고, 나 어떤 유명한 사람과 친하다고 자랑하기보다 하나님과 친한 것을 자랑하기 바랍니다. 포항 시내 어떤 목사님 서재에 가보니 유력한 대선후보인 모 장로님과 악수하는 사진을 크게 뽑아 걸어놓았습니다. 또 어떤 목사님은 한국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어떤 목사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걸어놓았습니다. 그분들과 친하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게지요. 하지만 우리는 세상 그 누구보다 하나님과 친한 것을 자랑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것을 기뻐하며 살기 바랍니다. 그러다가 인생 여행길이 끝날 때 그분에게 이런 말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무개야, 너무 고맙다." "하나님, 고맙긴요. 저는 하나님을 위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데도요?" "아니다, 네가 나와 함께 동행해 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그러시면서 우리에게 고맙다고 너무 좋은 상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행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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