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음의 사람들의 사람관리 (딤후 4:9~18)

  • 잡초 잡초
  • 265
  • 0

첨부 1



어느 분이 인터넷에 ‘여자’를 이렇게 표현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닙니다. 오해 하지 마세요. 여자는 처녀 때에는 비둘기고, 신혼 초에는 양이고, 10년 지나면 여우가 되고, 30-40년 지나면 능구렁이이가 된답니다. 그리고 늙으면 호랑이로 바뀐답니다. 그래서 나이 드시면 호랑이 할머니, 호랑이 시어머니 등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다 맞다 고는 할 수 없지만 일리는 있다고 봅니다. 환경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고, 스스로 둔갑하는 바람에 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찌 여자뿐이겠습니까? 아이들도, 남자들도, 심지어 신앙인도 바뀌지 않습니까? 사람은 세월 따라 다 바뀌게 됩니다.

그러니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이 사람인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도 역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는 인간이 최고 멋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니 가장 무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목회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상대해야 하고 천차만별인 사람도 상대하는 사역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목회가 제일 재미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은 하나님에 대해 연구하는 만큼 사람에 대해서도 많이 연구를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 알아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회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야 올바로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역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이 똑같은 사람이 한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쌍둥이도 어딘가 모르게 다릅니다. 성격도 다르고 성품도 다르답니다. 그러니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살펴봅니다.
바울 사도 바울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사도가 하나님의 일을 잘 하도록 수많은 사람을 그에게 붙여 주셨습니다.
그들은 여러 지역, 여러 환경, 여러 성품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여 아름다운 사역을 하게 하였고 수많은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그에게는 사람을 관리하는 몇 가지 자세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도 이 원리를 잘 배우시어 쓰임 받는 사람 되시고, 또한 여러분도 사람을 잘 관리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자기 주변의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관리했을까요? 


1. 그는 믿음의 사람을 불러서 함께 일을 했습니다.

9절 말씀을 보세요.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여기서 너는 누구일까요? 디모데 후서의 수신자 디모데입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는 영적인 아들이고 동역자요 제자입니다. 그는 참으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에베소에서 목회를 잘 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왜 속히 오라고 할까요? 그것도 21절에 보니 겨울이 되기 전에 오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겨울 전에 오라는 것은 1)자신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기에 죽기 전에 만나보고 싶어서입니다. 2)또 하나는 바울의 옆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옥중에서 자신이 얼마 후에 죽을 것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고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로마에서 할일이 많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다 못한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을 누구에게 맡길까 생각해 보니 그중에 디모데가 제일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속히 오라고 한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주변에 믿음의 사람들이 늘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혼자 못합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셨고 그 교회 안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모아 주셨습니다. 그들과의 함께 열심히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관계의 끈을 놓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주변에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을 불러서 함께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믿음의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찾았듯이 지금도 주를 위해 죽을 장소를 마다하지 않고 올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이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하나님이 쓰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그는 간혹 세상에 속한 사람은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10절을 보세요.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여기 “데마”라는 사람은 처음에는 바울을 잘 따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원일인지 그는 바울을 떠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는 환락의 도시요, 항구도시입니다.
제가 예전에 루마니아를 갔을 때 가 보았는데 해안 도시로 그곳은 사람이 북적대고 사람 냄새가 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죄가 관영하고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그는 바울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왜요? 이 세상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사람에 대해 아쉬워하거나 속상해 하지 않습니다. 그냥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표현하고 넘어갑니다.
왜 속상하거나 가슴이 아프지 않았겠습니까?
“나를 버리고 갔고” 이 말에 바울의 서운함이 찐하게 담겨 나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를 과감하게 포기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도 세상에 속한 사람은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그들에게 미련을 갖지 않았습니다. 가롯 유다에게 미련이 없었습니다. 그를 붙들려고 설득하거나 붙잡지 않으셨습니다. 몇 번 경고를 하시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냥 버리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음의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과는 미련 없이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골로새서에서도 빌레몬서에서도 이름이 거론된 데마, 그는 오늘 이 사건 후 성경에서 사라집니다.
세상을 사랑함의 결말은 멸망입니다. 그게 마귀의 계략의 목적입니다. 가롯 유다도 망했고 창세기의 롯과 그의 부인도 소돔성에서 재산 다 잃고 망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혹시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아주 작은 것이라도 세상을 사랑하는 끼가 있습니까? 교회 다니는 것은 원지 모르게 답답하고 고리타분합니까? 세상에 나가면 너무 행복할 것 같고 좋게 보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사탄의 계략에 걸려들면 멸망이 눈앞에 다가 옵니다. 오직 하늘나라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하나, 바울은 사역에 대적자들도 하나님께 맡겨 버렸습니다.
14절~15절을 보세요.
14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15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그는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라는 사람에게서 많은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었고 사사건건 바울 사역에 방해를 놓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한 번도 그를 저주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께 맡겨 버렸습니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갚아 주시리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교회를 핍박하고 신앙생활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 맡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주님은 성도를 핍박하고 교회를 대적하고 주의 종들을 대적하는 사람을 주님을 대적하는 자로 여깁니다.
바울이 그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자기가 직접 체험했습니다. 과거 자기가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 잡으러 갈 때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주님이 뭐라 하십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십니다. 사울은 주님을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교인들을 잡아 가두었고 교회를 무너뜨려습니다. 주의 종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주님을 핍박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대적하거나 주의 종을 대적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인정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목회 대적자를 자기 개인의 적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가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뒷전에서 비방하고 욕하는 사람, 참 가슴이 아픕니다. 그리고 사사건건 제동을 겁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못하면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남들이 하는 것도 막아 버립니다. 
내가 그런 사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 소리를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내게 와서 다 말해줍니다. 그러니 말조심해야 합니다.
뜻이 안 맞아 그럴 수 있습니다. 이해를 못해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제게 직접 찾아와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해가 풀어지고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러지도 못하면서 계속 그러다 보면 대적자가 됩니다. 그런 사람을 마귀는 이용합니다.

혹시 그런 사람이 여러분 옆에 있습니까? 조심하세요. 빨리 그런 사람에게서 떠나십시오. 그는 목사의 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게 됩니다. 
바울은 자기를 너무도 힘들게 하던 그 사람을 자신이 보복하거나 자신이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께 맡겨 버립니다. 이것이 해결책입니다. 


3. 그는 회개한 사람은 과거를 용서하고 불러 썼습니다.

사도 바울이 과거 전도여행을 떠나려다가 바나바와 대판 싸운 적이 있습니다.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엄청나게 싸웠습니다. 행15:39절에 보니 서로 심히 다투었다고 했습니다. 왜 싸웠냐하면 ‘마가 요한’ 때문이었습니다.
이 마가가 1차 전도여행에 참여했었는데 도중에 힘들어서인지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것 때문에 바울이 매우 속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2차 전도여행을 다시 출발하면서 바나바가 그 마가를 데려 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안 된다고 했고 결국 그 일로 대판 싸운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팀이 깨어져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떠났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떠났습니다.

두 사람의 기질과 성격 때문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격이 강직하고 한번 불의한 것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불같은 성격이었고 바나바는 사람의 허물을 잘 감싸고 세워주는 성격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정말 놀라운 기록이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 마가 요한을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세요.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마가를 어떤 사람이라고 합니까?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언제는 그 사람 때문에 대판 싸웠는데 이제는 나의 일에 유익한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의 용서를 보게 됩니다.
그때와 이때가 약 20여년 흐른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마가 요한을 용서하고 다시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제 추축해 봅니다. 제가 보기에는 바울이 마가라는 사람 자체를 싫어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다만 마가는 전도여행에는 적성이 안 맞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선교여행을 다녀 보면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데려가지 않으려 했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에는 유익한 자이기에 데려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과거를 다 잊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마가를 용납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마가는 그렇게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쓰임 받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유익한 사람이라면 다 받아들이시기를 축원합니다.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멀리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비록 내 마음에는 안 들어도 하나님의 일에는 유익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시기를 축원합니다.

 
4. 그는 생명을 건 동역자를 늘 칭찬해 주었습니다. 

저는 오늘 한사람을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는 누가입니다.
11절을 보세요.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다른 사람은 다 떠났습니다. 데마도 떠나고 그레스게와 디도는 바울이 선교지로 파송을 해서 떠났습니다. 그런데 정작 바울에게는 이때가 사람이 제일 필요할 때입니다. 감옥에 들어가 있으니 얼마나 힘들고 외롭겠습니까?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끝까지 함께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의사 누가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사도 바울에게는 이와 같은 믿음의 동역자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로마서 16장 3~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동역자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소개합니다. 거기서 그들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롬16:4절을 다 같이 보세요.
4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그들은 바울을 위하여 목이라도 내어 놓았던 사람입니다. 대단한 칭찬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문장을 잘 보세요.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내어 놓았나니” 라고 합니다.
실제 그런 사건이 있었던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저는 깊이 생각해 봅니다. 과연 내가 만약 신장에 이상이 생겨 신장 이식을 해야 할 상황이라면 우리 교인 중에 누가 내게 신장을 기증할 수 있을까?

2000명쯤 모이는 교회 담임목사님이 목회를 하다 신장이 상해 기능을 전혀 못하게 되어 신장이식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목사님이 그 사실을 통보받고 너무나 당황했습니다.
목사님이 하루는 용기를 내서 설교 중에 이 사실을 밝히면서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러분과 동역을 하다 신장이 못 쓰게 되었습니다. 신장 이식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워진다고 합니다. 날 여러분들이 동역자로 생각해 준다면 누가 내게 신장 하나 기증해 줄 분이 있습니까? 혹 내게 신장을 하나 기증해 주실 분이 계시면 손을 들어 보세요."
순간 긴장, 침묵이 잠시 흐르고 여기저기서 한 사람, 두 사람 손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그 예배에 참여했던 2000명이 다 손을 들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너무 감격이 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혹 이 중에 내가 어느 분 한 분을 택하면 나머지 분들이 상심할 수 있을테니
한 주간 기도하고 한 분을 택하겠습니다."
드디어 한 주간이 흘러 주일이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지난주에 나왔던 분들이 한 분도 빠지지 않고 다 나왔답니다.
이제 목사님이 강단에서 한 사람을 선택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한주간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내가 직접 선택하는 것 보다는 제비뽑기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고는 점버속의 오리털 하나를 꺼내 보이며 "내가 이제 이것을 불겠습니다. 이 오리털이 떨어지는 분의 신장을 이식받겠습니다." 하고는 오리털을 후하고 불었습니다.
그 오리털이 날아가서 앞자리에 앉았던 장로님 머리 위로 날아가 내려 앉게 되려하자 장로님은 "아부(푸)~지" 라고 외쳤습니다. 아랫입술을 내밀고 윗 입술은 최대한 당겨서 바람을 뿜으면서... 내려앉으려던 오리털이 다시 날아 뒷줄에 앉은 권사님 위로 날아갔답니다. 그것을 확인한 권사님이 "오 주(추)여" 하고 외쳤습니다. 다시 그 오리털은 날아올랐다. 지금도 그 교회에서는 아푸지와 추여가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농담입니다. 

왜 누가는 바울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하고 있을까요?
여기서도 몇 가지 추축해 볼 수 있습니다.
1)하나님이 그를 붙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2)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누가는 의시였습니다. 바울이 육신이 연약하기에 의사로서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바울의 마지막을 지키는 것이 자기 사명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바울을 지켰습니다.

그렇게 헌신할 수있었던 그 배경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울이 그 수고와 헌신을 늘 격려하고 칭찬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 첫걸음부터 끝까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늘 따라 다녔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그리고 바울을 위해, 자기를 버린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복음 전도자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생명을 건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를 늘 인정해 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이것이 대단한 칭찬이고 격려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의사였던 누가, 사도의 축에도 끼지 못했던 누가가 ‘누가 복음’의 기록자 됩니다. 할렐루야 후대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그 누가의 이름을 모든 사람이 기념합니다. 오늘날도 누가 병원, 누가 의원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자기도 하나 제대로 통제가 안 된다면 누구를 관리 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으로 자신의 믿음을 철저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을 붙여 주시고 그 사람들을 통해 위대한 일을 하게 해 주십니다.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사도 바울, 그는 믿음의 사람으로 주변 사람을 잘 사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믿어주고 사랑하고 협력하는 일에 전문가였습니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늘 사람이 붙었습니다. 하나님이 붙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고 섬김의 대상이지 위지할 대상은 절대로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17절, 18절에서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17절~18절을 보세요.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그렇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 사람을 의지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은 의지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 분이 내 곁에 서 계신다. 그분이 나를 강건케 하신다. 그분만이 악한 사자의 입에서 나를 건지시는 분이다. 믿습니까? 그분만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배신, 고독, 아픔, 죽음도 무섭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먼저 그 길을 가셨기에 그 주님을 바라보고 견딜 수 있습니다.

사람은 믿을 수 없으나 주님은 영원히 함께 합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을 위하여, 주님 때문에 삽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