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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는 더 큰 축복의 시작입니다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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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난주일 “감사는 행복의 시작입니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여러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면 감사를 배우셔야 합니다. 아니 감사를 연습하셔야 합니다. 또 감사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들을 때는 “그래 감사해야지”라고 생각하는데 예배당 문만 나서면 불평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감사를 잃어버리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놀라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일 잘 잃어버리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연습하고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저주는 목마름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에 생기지 않는 메마름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저주는 내 마음에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감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저주입니다. 그럼 가장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누가 무엇 하나를 주어도 감사합니다. 밥을 먹어도 감사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를 느낄 때 그 사람은 가장 축복된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행복의 시작입니다. 감사가 없는 행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꼭 두 군데 계신다고 합니다. 천국에 계시고, 감사하는 마음속에 계십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성령으로 임재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불행할 때 감사하면 불행이 끝나고, 형통할 때 감사하면 형통이 연장된다. 불행할 때 감사하세요.” 그럼 불행이 끝납니다. 병들었을 때 감사하면 건강을 얻게 됩니다. 잘되고 형통할 때 감사하면 형통이 연장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칼일테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의 유명한 책이 ‘행복론’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감사하라. 그러면 젊어질 것이다. 감사하라. 그러면 발전할 것이다. 감사하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든 행복과 기쁨은 감사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어서 “감사는 더 큰 축복의 시작입니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감사에 대해서 아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올라가실 때 한 동리에 들르셨는데 그 동리 입구에 서 있던 열 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향해 소리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긍휼이 여기소서.” 부르짖습니다. 여러분 문둥병자는 나병입니다. 지금도 곤욕이지만 그 당시에는 저주 받은 병입니다. 가족과 격리되어 살아야 합니다. 동리 안에 살수가 없고 동리 밖에서 따로 살다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습니다. 소리를 높여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이 여기소서.”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긍휼한 마음이 생기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명령하십니까? “너희들은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제사장은 예배 집례 자이었지만 또 의사였습니다. 부정한 병에 걸린 사람들은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아야 가족에게 갈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에게 가다 보니 자기 몸이 깨끗이 나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더럽고 진물이 흐르던 몸이 깨끗한 피부로 바뀌어 진 것이 얼마나 좋았을까요? 춤을 추고 법석을 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열 명 중에 9명은 제사장에게 가서 자기 몸을 검사를 받고 자기 가족에게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은 자기 몸의 병이 난 것을 알고 예수님께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례했다고 합니다. 사례란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열 명중에 감사하는 사람이 한 명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오늘 기사는 감사할만한 조건에 있는 사람은 많지만 감사하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열 명중에 한 명, 십분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고 말하면서도 형식적인 감사가 더 많습니다. 체면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인 한 사람 만이 예수님께 와서 감사했습니다. 그들이 절박 할 때는 얼마나 간절히 주님께 기도하였을까요? 그런데 병이 낳고 나니 예수님은 깨끗하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하는 말 중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 들어 갈 때는 갈급한 마음으로 들어가지만 나올 때는 고마움을 잃어버립니다.

여러분 화장실을 찾는데 없을 때 고민입니다. 이번에 태국의 방콕을 가는데 목사님 한분이 설사가 나셨습니다. 차가 막혀서 꼼작도 안하는데 배가 아파서 어쩔 줄 모릅니다. 길에 내릴 수도 없고 화장실도 없습니다. 그러다 겨우 겨우 식당 앞에 서서 화장실을 갈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화장실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작은 일에 감사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열 명중에 한 사람만이 돌아와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어떤 마음을 가지셨을까요? 감사하는 한 사람 때문에 너무나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섭섭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열 명이 깨끗함을 받았는데 다른 아홉 명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이 이방인 중에는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자가 없었느냐? 예수님 마음 한편에는 섭섭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들은 감사할 줄 모르냐 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지만 감사를 잃어버리고 형식적인 감사에 머무를 때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느냐? 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이만큼 감사에 인색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1880년대 미국 미시간 호수에서 유람선이 침몰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 스펜스라고 부르는 한 대학 수영 선수가 타고 있었습니다. 수영 선수이니 얼마나 수영을 잘하겠습니까? 그는 자기를 구출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열심히 구출을 했습니다. 무려 17명이나 구출을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토레이 박사님이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집회를 인도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마침 그는 설교 하면서 미시간 호수에서 오래전에 있었던 희생적인 한 젊은이의 봉사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그는 구출해 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한 사람이 와서 이야기 합니다. “그 스펜스가 여기에 와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토레이 박사님이 만나고 싶었습니다. 젊은이인 그분이 시간이 지나서 노인이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이 구해준 그 17명 가운데 당신에게 감사한 사람이 몇 명이 있었습니까? 스펜스가 웃으면 말합니다. 17명중에 어린 소녀 한 사람만이 저에게 감사했습니다. 그 어린 소녀는 어른이 되어서 지금까지 성탄절이 되면 작은 선물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인색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구속함을 얻었지만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감사는 큰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마음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에게 이 몸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신 적 있습니까? 거울 앞에 서서 “이렇게 코도 예쁘게 하시니 참 감사하고, 이렇게 귀도 멋있게 만드시니 참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해 보십시오.

종종 어떤 분들이 저를 처음 만난 인상을 말해 보라고하면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목사님은 설교할 때 웃으면 보기가 좋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인상에 대해서 한 번도 감사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번에 친구 목사님과 태국에 여행을 가면서 한 목사님과 방을 같이 쓰는데 이분이 일어나서는 아침에 운동을 합니다. 앉아서 머리를 두드리고, 얼굴을 쓰다듬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이것도 몰라 내가 가르쳐 줄게.” 건강하게 살려면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를 만져주고 때려주라는 것입니다. 눈가를 만 저주고 그러고 코를 쓰다듬고, 그리고 인종을 누르고 귀를 잡아당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슴을 쳐 주라고 합니다. 배의 오장 육부를 만져주고 허리를 안마하고, 자기 무릎을 안마하라는 것입니다. 머리를 두드리며 “하나님 아버지 이 몸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자기 몸을 매일 만집니다. 그 말을 들으니 그를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에 대해서 감사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이 몸 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일 일어날 때마다 건강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저도 배웠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어날 때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 이 몸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여러분 주신 몸에 대해서 감사해본 적이 있습니까? 감사하며 자기 몸을 만져줄 때 그곳에 놀라운 건강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오늘 주님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 한 사람! 사마리아인의 감사에 대해서 예수님은 너무 너무 기뻐하셨지만 동시에 섭섭한 마음도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어떤 축복을 주셨습니까?

여러분 19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놀라운 축복입니다. 여러분 문둥병에 있다가 고침을 받으면 영원히 사나요? 살다가 죽겠죠? 그러나 이 한사람,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영원히 사는 축복을 입었습니다.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는 병만 고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영원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구원받았습니다. 더 큰 축복입니다. 감사는 더 큰 축복의 시작입니다. 여러분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더 놀라운 축복을 끌어당깁니다. 감사는 절망을 몰아냅니다. 감사는 희망을 잡아당깁니다. 감사는 위대한 언어입니다. 세계 어느 곳을 가도 다른 말은 몰라도 “Thank you!”만 알면 다 됩니다. 태국에 가니 가이드가 “감사합니다.” 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코큰캅”입니다. 그것이 “감사합니다.”라를 말입니다. 여러분 감사는 건강을 가져오고, 축복을 가져오고, 행복을 가져오는 놀라운 언어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가운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 오천명에 무리가 굶주려 있을 때 그들을 돌려보내실 수 없어서 무언가 그들에게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때 안드레가 오명이어 도시락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도시락을 높이 들고 축사하시고 때어주셨습니다. 축사라는 말은 감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병이어를 들고 감사했더니 오천명을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기적의 배후에는 놀라운 주님의 감사가 있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죽었는데 예수님이 늦게 도착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슬퍼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돌문을 열어라.” 그리고 “하나님 제 기도를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를 마치시고 “나사로야 나오느라.” 외치실 때 죽었던 나사로가 베옷을 동인체로 걸어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의 배후에는 감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감사는 기적의 출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바울과 실라가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쫒고 나서 오해를 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모진 매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면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합니다. 찬미했다는 것은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감사할 수 없는 상황가운데 감사하며 찬양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옥문이 열리고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감사는 기적의 코드가 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 간수가 구원받고, 간수의 가족이 구원받고 그들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감사는 늘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다니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니엘이 페르시아 제국에 끌려가서 나중에 성공해서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왕 외에 다른 사람에게 기도하거나 절하는 사람은 사자 굴에 집어넣는 법을 만들도록 간신들이 왕을 충동질을 했습니다. 다니엘은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집에 돌아와서 예루살렘 쪽을 향해 창문을 열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합니다. 어떤 결과가 일어났나요? 그는 사자 굴에 던져 졌지만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그를 다시 등용하고 그를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감사는 기적의 시작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결코 낙오자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축복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기적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오하이오 주에 가면 할레이 푸르터 라는 사장이 있었습니다. 그가 비누공장을 운영했습니다. 한번은 직원이 기계를 잘못 조작해서 비누를 만들 때 필요한 원료들을 배합을 하는데 한 원료가 더 많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생산된 비누들이 못쓰게 되었습니다. 그 직원의 과장은 그 직송상관을 꾸짖고 그에게 사표를 받았습니다. 이 푸르터 사장은 큰일 났습니다. 그는 늘 감사하는 사람이었는데 오늘 이 엉뚱한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무엇인가 길이 있을 것 같아 기도하면서 고민을 했습니다. 그 비누를 잘 연구해 보았더니 그 비누가 가벼운 것이 특징입니다. 잘못 만들어진 비누인데 물에 넣으니 물에 둥둥 떠는 것입니다. “아! 비누가 물위에 뜨는구나! 물에 뜨는 비누! 멋있다.” 그래서 그는 그 상품을 버리지 않고 시장에 팔았습니다. 그것이 아이보리 비누입니다. 그래서 그 비누가 인기 폭발해서 팔려나갔습니다. 그가 바로 세계적인 아이보리 비누의 창업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도 감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감사가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 놓은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능력인 것입니다.

제가 전에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6.25 전쟁 때 황해도에 믿음 좋은 성도님이 살았는데 교회만 다녀오면 남편이 늘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매를 때리고 밥도 안 주고 잠도 못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인이 핍박을 받고는 골방에 들어가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남편은 그 찬송이 듣기 싫다고 또 매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남편이 인민군으로 참석을 해서 미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포로가 되어서 이제는 다시 북한으로 가느냐? 아니면 남한에 남느냐? 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문에 자기 가족들이 1.4후퇴 때 남한으로 다 내려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도 남한에 남아야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남한에 남는 조건이 있습니다. 미군들이 예수 믿는 사람만 남한에 남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남자를 불러다가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외어보라고 하니 외울 재주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딱 하나가 기억이 납니다. 찬송한가지가 기억이 납니다. “나는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은 모르지만 찬송은 하나 아는 것이 있습니다.”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합격!” 그래서 남한에 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내는 매를 맞으면서도 찬송을 부르고 감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남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는 늘 유익한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일본이 2차 대전에 패전하고 군인들이 전쟁 후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저놈들이 잘못 싸워서 우리가 패전국이 되었어.” 한 해군 장교가 이제 퇴역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니 울분이 터졌습니다. “내가 생명을 걸고 싸웠는데 나에게 이런 대우를 할 수 있느냐?” 울분이 가득차서 결국은 화병이 생겼습니다. 그 병이 심해져서 전신마비 증세가 생겼습니다. 온몸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의사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당신이 건강해지려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루에 만 번씩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를 외치세요” 이 사람은 할 일 없이 앉아서 “감사합니다.” 를 외쳐야 합니다. 그런데 “감사합니다.”를 반복하면서 자기 마음속에 울분과 화가 녹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마음속에 평안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아들이 잘 익은 홍시 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아빠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아빠! 이거 드세요.” 그런데 이 사람이 그것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보고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울컥 쏟아집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그것을 받는데 자기 손이 쑥 나가는 것입니다. 전신마비환자가 손이 움직여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어버렸습니다. 여러분 감사는 병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질병이 왔습니까? 하나님 앞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우리의 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감사를 드리겠습니까?

오늘 이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앞에 영광을 돌리며 그 앞에 사례를 했습니다. 사례를 했다는 것은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몸을 엎드리었습니다. 최고의 감사였습니다. 그는 가족도 만나야 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예수님 앞에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최고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한 선교사님이 인도에 가서 선교를 하고 있는데 인도에는 흰두교도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켄지스강을 아주 성스러운 강으로 여깁니다. 그곳에서 목욕을 하면 축복이 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희생의 재물을 바칠 때도 그 켄지스 강에 던지면 신이 받는 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루는 이 선교사가 산책을 하고 있는데 한 여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켄지스 강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한쪽에는 아주 총명하고 건강한 아이가 있었고, 한쪽에는 장애인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병들고 잘 걷지도 못합니다. 그런 아이를 양쪽에 데리고 켄지스 강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 여인이 자기 신에게 두 아이를 바치려고 하나보다.” 생각을 하고 그 여인을 만류했습니다. 그런데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 여인은 끝내 두 아이를 데리고 켄지스강으로 갔습니다.

얼마 후에 또 만났습니다. 돌아오는데 보니 한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똑똑하고 건강한 아이는 안보이고 병들고 장애가 있는 그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똑똑하고 건강한 아이를 자기 신에게 바쳤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님이 “아니 이왕 바칠 것이라면 장애가 있고 병든 아이는 살아도 짐이 될 것인데 왜 똑똑하고 건강한 아이를 신에게 바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떻게 가르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믿는 신은 가장 똑똑하고 최상의 것을 자신에게 바치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고, 우리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님의 얼마나 부끄러움을 가졌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정말 자녀를 바친다면 똑똑하고 건강한 아이를 바칩니까? 아니면 장애가 있고 좀 부실한 아이를 바칠까요?  우리의 모든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정말 주님께 드리는 감사가 최고의 감사인지 주님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감사는 행복의 시작이고, 축복의 시작입니다. 감사는 기적이 시작입니다. 이런 감사가 여러분의 삶에 늘 차고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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