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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떤 존재로 살 것인가?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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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존재로 살 것인가?
누가복음 16:19-31

지금 우리나라에는 모 대학 교수의 가짜 학위 문제로 떠들썩합니다. 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필요한 조건들을 억지로 갖추려고 하다가 생겨난 문제입니다. 이런 조건을 반드시 요구하는 사회도 문제요, 가짜로라도 충족시키겠다는 빗나간 욕망도 문제입니다. 성공위주의 삶, 더 나아가 애매하고 지극히 주관적인 성공의 개념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성공하고자하는 욕망 뒤에는 대조적인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우월감을 가지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깔보는 것을 즐기기 위해 성공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또 하나는 성공을 맛보지 못한 다른 이들을 위하여 그 성공을 돌려 주고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연히 전자보다는 후자가 아름다운 삶입니다. 사람들은 다 무엇에든지 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지식에 대한 부자가 되기를 원해서 박사학위를 사고파는 세상이요, 또한 세상은 명예에 대한 부자를 갈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목숨과도 같은 자기의 사명도 잃어버리고 본분이 아닌 늪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후회의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재물에 대한 부자에 목말라 하는 세상입니다. 돈을 가져야 비로소 부자가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온통 거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부자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거든요.

현대를 가리켜서<쿼터리즘>이라는 말을 합니다.  짧게 생각하고 빠르게 행동하는 것을 일러서 하는 말입니다. 이 quarter란 말이 1/4을 뜻하는 말입니다. 한 시간이 1/4로 줄어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보다 더 멀리 생각하는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큰 결점입니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다가오는 미래가 있고, 이 결정적 미래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사람의 생각이란 세 차원에서 설명됩니다. 첫째는 후회라고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지나간 다음에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미래는 더더욱 없고 꼭 지나간 다음에야 '그랬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나간 다음에 뉘우쳐도 별도리가 없는 후회의 고통은 무거운 고통입니다. 또 하나는 현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생각하고 기뻐하는 그런 생각이 현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미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소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전이죠. 결정적인 미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망이라고 하는 생각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사람은 두 종류로 나누어 봅니다.<소유 지향적인 사람>과<존재 지향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무엇을 얼마나 소유 했느냐"로 사람의 가치를 따지는 사람과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에 관심을 두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본문은 우리가 어떤 존재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그 내용을 더듬어 볼까요?

한 굉장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나라에서 가장 비싼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날마다 댄스파티를 열고 즐겼습니다. 그런 부자에게 언제부턴가 짜증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자기 집 대문간에 거지가 한 사람 오더니 가지도 않고 눌러 앉아 있는 겁니다. 처음에는 몇 번 대접도 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귀찮아 지기도하고, 거지에게 날마다 허비되는 재물도 아까워졌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더럽게 몸에 병까지 생겨서 고통하고 있던 이 거지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쇠하여지고 병세가 악화되어가지고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간에 앉아 있으니 영 불편합니다. 아마도 이 거지가 앓았던 병은 피부병인 것 같습니다. 피부병이란 참 괴로운 것입니다. 이 불쌍한 거지는 헌데를 개가 핥는 가운데 부자의 대문간에서 개와 더불어 지내면서 부자가 먹고 남은 찌꺼기나 얻어먹으면서 연명을 하는 처절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한 사람은 호화로이 연락을 하고 한 사람은 이렇게 비참하게 살았다는 것인데 중요한 문제는 이 두 사람이 모두 죽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죽는다는 것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여러분, 안 죽으려고 노력 하는 것 보다 잘 죽으려고 노력하는데 투자하십시오. 또 하나는 특히 여자분들 안 늙어 보려고 뜨거운 화로 앞에 앉아 지지기도 하고, 마사지도 하고 수술도 하고 하는데 늙어 보인다고 하면 아주 싫어합니다. 그러나 안 늙으려 한다고 안 늙습니까? 한 마디 더 합시다. 안 늙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신 곱게 늙으세요. 이게 훨씬 지혜로운 것입니다.

자, 본문으로 돌아가서 부자와 거지 중에 누가 먼저 죽었습니까? 가난한 거지가 먼저 죽었습니다. 아마도 굶주리고 병으로 고생한 거지가 먼저 죽었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이치에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그 후에 부자도 죽었습니다. 아마 굉장한 장례를 치렀을 것입니다. 거지의 장례식 얘기는 없습니다만 상상해 보건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대충 던져졌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지금 같으면 화장이라도 해 주겠건만 그렇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반면, 부자의 장례를 상상해 보십시오. 무덤도 굉장히 크고 화려한 장례식을 치렀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장례식 직후를 생각해봅시다. 거지가 막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체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의 영혼은 천사들에게 받들려 천국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장례가 치러지고 그 시체가 땅에 묻히면서 지옥에 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인생의 역전극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보이는 세상에서 출세하고, 여기서 잘 된다고 해서 영원한 성공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영원한 미래세계를 위해 어떻게 설계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돈이 세상에서는 무언가 힘을 주는 것 같습니다만 그 결과를 보면 궁극적으로는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것이 돈입니다.

돈이란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져 왔기 때문에 만지면 찬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한 여름에 동전에 손을 대어보면 시원한 느낌을 받습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부자가 돈을 많이 만질까요? 가난한 사람이 돈을 많이 만질까요? 부자들은 돈을 손에 쥐고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 금고나 은행에 모아 두기 때문에 그 부자들의 돈이란 사람과의 접촉이 없어 늘 금속만의 차가운 기운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동전 한 닢이 귀하여 만지작거립니다. 자연히 동전은 따뜻해집니다. 이렇듯 돈이란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 따라 따뜻하게도 할 수 있고 본래의 차디찬 대로만들 수도 있다는 탈무드의 교훈이 있습니다. 모두가 사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항상 돈 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금전의 싸늘함이 자신이나 자기 가족들에게 전해져 피와 마음까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음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가진 것이 많은 부자는 자식이 있어도, 그는 진정한 의미의 자식이 아니라 오직 재산을 물려받는 상속인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차가운 관계입니까?

유명한[카아네기]는"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불명예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부자란 부를 축적하는 때와 부를 환원하는 때가 분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자라고 할 때 부(富)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부란 곧 사명에 있는 것입니다. 결코 나 혼자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부가 아닙니다. 이 주어진 부를 가지고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돈이든 지식이든 묻어 두어서는 안 되고 잘못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주신 은사는 받은 바대로 쓰여 져야 옳은 것입니다. 여러분, 은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쓰는 것이 은사의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부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더군다나 이 부를 가지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히려 사치와 연락으로 낭비나 한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삶을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는 시간적인 낭비요, 물질적인 낭비요, 정욕 적인 낭비입니다. 이 모든 것은 나아가 죄가 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바로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문제 한 가지 더는 둘 다 하나님 앞에 섰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떻게 되느냐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거지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고 부자는 여기서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현세에 산 그 생활대로 내세에서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어지고 있더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까? 잘살고 의롭고 깨끗하고 좋은 일 많이 하고 선한 일 많이 하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기준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긍휼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이 부자가 어떻게 돈을 벌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부정 축재를 했는지 못할 짓을 했는지 율법을 지켰는지 안 지켰는지도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 긍휼함 즉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사람이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고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하겠습니까? 문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힘입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야 구원은 받습니다. 그러려면 내가 남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중 팔복에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그랬습니다. 살아가면서 생전에 남을 불쌍하게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남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나만 위해 살았습니다. 이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만족한 삶입니까? 지금 하나님 앞에 서도 문제없는 삶입니까? 하나님 앞에 서면 그대로 이어집니다. 내가 했던 말, 내가 일삼았던 행동, 내가 가졌던 마음까지도 하나님 앞에 그대로 가져가면 그대로 심판 받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어떤 존재로 살 것인가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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