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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셈의 계보 (창 11: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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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의 계보 (창 11:10-26)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서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존재했고, 그때가 만물과 인간이 최상의 행복을 누리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낙원을 상실하고 창조의 질서가 깨어진 세상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죄는 강력하게 인간을 파괴했습니다. 아담의 첫 범죄를 뒤이어 그의 아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대적했고, 셋의 후손들 역시 가인의 후손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심각하게 타락하여 마침내 홍수 심판을 당했습니다. 홍수심판 이후에도 인간은 바벨탑을 쌓으면서 다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죄는 하나님에 대해 ‘반역’하고 ‘대적’하는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아가려 하기보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의 기뻐하는 뜻대로 살기 원한다는 점이 아담의 첫 범죄 이후 모든 죄인들이 가진 공통점입니다. 인류가 보여준 다양한 죄의 현상들은 이 공통된 뿌리로부터 생겨난 각종 열매들에 불과했습니다. 모든 범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 사단이 심어준 ‘자기 생각’을 따라서 산다는 본질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대다수의 인류가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살다가 결국 파멸했습니다.

하지만 죄의 강력한 영향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소수의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분의 뜻대로 살려는 구별된 특징을 가졌습니다. 아벨이 죽임 당한 후 셋의 후손들이 그런 모습으로 구별되었고, 셋의 후손들조차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타락하여 홍수로 심판당할 때에도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모습으로 구별되었습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모두 타락했으나 셈의 후손 가운데서 다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당신님의 역사를 줄기차게 이어오셨습니다.

창세기 11:10-26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셈의 후예들을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노아의 아들인 셈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르박삿, 셀라, 에벨, 벨렉, 르우, 스룩, 나홀, 데라를 거쳐 마침내 아브라함까지 연결해서 자연스럽게 12장의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이 계보를 통해서 아담의 범죄 이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여자의 후손’(창 3:15)은 셋의 후손 중에서도 노아의 아들인 셈의 후손(창 9:26)을 통해 ‘아브라함의 씨’(창 21:12)로 점차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후로는 이삭과 야곱을 거쳐 ‘유다의 후손’(창 49:10)을 통해서 ‘다윗의 자손’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연결될 것입니다(마 1:1).

이 계보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의미가 있는 계승자들만 선별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성경이 그저 인류의 역사를 기술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셈의 시대로부터 아브라함의 시대까지 수많은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영웅적 존재와 스타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속사에서 중요하게 취급될 그런 영웅호걸들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역사에서 제외됩니다. 반면에 세속사에서는 취급되지 않을 한 집안의 사소한 이야기가 상세하게 언급되기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 곧 그분의 ‘언약’이 ‘구속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계보의 특징은 창세기 12장 이후의 이야기 역시 믿음의 영웅이라는 측면으로 접근하지 않아야 할 것을 가르쳐줍니다. 역사의 주인공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지 생각할 필요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분의 언약을 성취해 나가셨는지를 배우는데 초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선택 받은 인간의 영광과 그들의 삶과 그들의 위대함에 매료되지 않고,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그분의 인도하심을 바라보며 이를 통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셈의 계보에는 의인들만 기록되지는 않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선택된 셈의 후손들이라고 해서 탁월하게 경건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그는 수메르(Sumer) 문화가 꽃피고 있었던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ldees)에서 살았습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우르는 지금 이라크의 바그다드 남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중산층은 많은 방이 딸린 이층집을 소유하고 있었고, 학생들은 제곱근과 세제곱근에 대해서도 공부할 정도로 도시 문화가 발달해 있었습니다. 데라는 발달된 도시 문명 속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며 살았습니다(창 31:53, 수 24:2).

셈의 계보에서 우상 숭배자의 출현은 죄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한지 생각하게 합니다. 셈은 홍수 2년 후, 곧 그가 100세이던 해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그 후에도 500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 후 홍수로 인해 기후환경에 큰 영향이 생긴 탓인지 사람들의 수명은 점점 줄어들어서, 나홀은 29세에 데라를 낳고 119년을 더 살았습니다. 만약 이 계보가 한 세대도 빼지 않고 기록했다면 셈은 아브라함이 태어난 이후에도 150년을 더 살았고, 이삭이 50살이던 해까지 살았습니다.

홍수 심판을 직접 체험한 셈이 얼마나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힘을 썼을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고 누누이 가르쳤을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을 때 인간은 결국 부패하고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귀가 따갑도록 교훈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경건한 셈의 후손 중에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버렸습니다. 혈통이 신앙을 보장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경건한 집안의 후손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 후손이 경건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경건한 자들을 무너뜨리려는 죄의 세력이 우는 사자처럼 돌아다니기 때문입니다(벧전 5:8).

하지만 죄의 세력이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죄악으로 넘쳐나고 온 천하가 불신자로 가득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계보는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자의 아들이었던 아브람을 선택하셨고 그를 통해 세계 만민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우상 숭배자 데라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와 같은 말들이 허황됨을 폭로합니다. 하나님은 죄의 저주를 깨뜨리는 분이시며, 죄의 왕국 속에서 영원한 은혜의 왕국을 건설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이기고도 남습니다.

어느 시대라도 성도는 많은 불신자들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알긴 하지만 실제로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셈의 시대나 아브라함의 시대나 오늘날이나 차이점이 없습니다. 죄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힘없는 소수에 불과한 모습처럼 존재할 때, 성도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특히 죄의 세력이 사람을 사로잡아 파멸로 몰아가는 실제적인 힘이 있음을 경험한 성도들은 죄와의 싸움을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가 아무리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묶여 있는 사자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에 세력과 죄악 된 세상에 함몰될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주님을 신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눈앞에 피할 구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양이에게 잡아먹히는 쥐는 먼저 고양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 잡혔기 때문입니다. 죄가 두려워서 계속 죄를 주시하다보면 결국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시대의 죄악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시대의 죄악에 함몰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감당치 못할 죄에 대해서는 충분히 피할 길을 열어놓으셨음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죄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고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그분의 양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안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죄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내가’ 죄를 짓지 않는 것, ‘내가’ 온전한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내 힘’으로 죄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내 힘’으로 죄의 늪에서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내가’ 절망하기를 반복합니다. 그는 여전히 ‘내가 중심’인 사람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근본적으로 내가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중심에는 죄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약속에 신실하신 분, 당신님의 뜻에 실패와 실수가 없으신 주님이 계십니다. 나를 죄로부터 지키실 분도 주님이시며, 죄에 빠진 내게 은혜를 베풀어 건져내실 분도 주님이심을 압니다. 그러므로 ‘죄와 나를 중심’으로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그분의 영광이 어떠한지를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대의 넘치는 죄악 가운데서도 언제나 소수의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당신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당신님의 은혜의 왕국을 이 땅 가운데서 세워나가셨습니다. 선택하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어떤 뜻과 계획 가운데 세상을 경륜하시는지에 대해서 증언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계시를 맡기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은혜라고 해서 아무에게나 계시를 맡기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인생길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셔서 계시를 바르게 깨달아서 순종하며 바르게 전수할 수 있도록 연단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백성의 이러한 일들을 신약의 교회가 계승하도록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셈과 아브라함의 때처럼 불신 세상 한 가운데 소수로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하지만 실제로 우상 숭배하는 거짓 교회들 속에서 참 교회는 우리 주님의 나라를 바르게 드러내야 할 사명을 가졌습니다. 이제 믿음의 조상들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구별된 삶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왕국이 어떻게 드러나게 되었는지를 배우고 잘 실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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