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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 (행 4: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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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국민들이 너무도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사건이 있다면 아프칸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선교를 하다 지금 피랍 되어 목사님 한 분이 순교를 당하고 또 22명이 생사를 보장받지 못한 채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주님의 사랑을 안고 길을 떠날 때만해도 누구하나 이런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리라고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막상 당하고 보니까 엄청난 아픔들이 우리 속을 파고드는 것, 사실입니다.

오늘 여기 계신 여러분 가운데 예수를 왜 믿고 살아갑니까? 물어본다면 아마 누구나 오늘 보다 내일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예수 때문에 고난이 온다면 야 어느 누가 선뜻 예수를 위해 살아가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가 힘들어하고 또 싫어하는 고난과 환란을 주십니까?

이것을 답하기 전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십시오. 골고다를 향하는 잔인하고도 무서운 저 십자가의 길! 그것은 너무나 견딜 수 없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하셨겠습니까? 죄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서 전 인류를 위하여 피 흘리게 하시고 그 처절한 십자가를 통해서 죄 용서함을 받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는 고난의 섭리였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방법이 고난이라는 방법이었다면 한평생을 세상에서 살아야할 우리를 하나님이 세우신 최상의 목적에 합당한 존재로 만드는데 선택하신 방법 역시 고난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본문을 보면 자신들에게 당한 고난의 현장 앞에서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저들이 성전 미문 앞에서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친 일로 소요를 일으켰다고 산헤드린 공의회에 잡혀왔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종교재판입니다. 심각한 종교적인 문제를 최종적으로 재판하는 곳입니다. 여기서 출교를 선언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매장 당하는 것입니다. 사형을 언도 받으면 그 생명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불려갔다는 것은 모두가 두려워 떨 사건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저들의 서슬퍼런 핍박 앞에서도 뭐,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탄 없이' 말했다 에서 헬라어로 기탄 없이란 '파레시안'입니다. 이 단어가 29절에 동일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담대히(파레시안)!' 이 사도들에게 어떤 마음이 있었습니까? 세상 어떤 것에도 추호의 두려움이 없는 태도가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시다시피 이들이 원래부터 이렇게 담대한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베드로를 보세요. 그는 주님의 수제자로서 3년 동안 주님을 따르며 주님으로부터 직접 제자훈련을 받았을 뿐 아니라, 5병2어를 가지고 5,000명을 먹인다든지, 물위를 걷는다든지, 죽은 아이를 살려낸다든지, 각종 질병에 걸린 사람을 고친다든지 하는 초자연적인 기적과 이적을 수도 없이 많이 목격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던 그 입술로,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세 번째는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면서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하며 주님을 부인했습니다(마26:74). 베드로, 그는 실패했습니다.

그는 도저히 주님 앞에 다시 설 수도 없는 부끄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풍성하신 주님께서는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실패한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이 변함 없는 사랑을 깨닫자 그는 더 이상 예사람에 매이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자신의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못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믿어주신 주님의 사랑 앞에 자신을 내어드립니다.

앞으로 보시겠지만, 예루살렘 교회에 부딪힌 핍박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재산을 몰수당합니다. 형제가 끌려나가 비참하게 죽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고, 야고보가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사도들이 나가서 억울하게 매를 맞고 쓰러지며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옵니다. 왜 이런 고난이 옵니까? 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라는 그 한 가지의 이유 때문에 그들은 핍박을 당하며 죽어야했고, 옮겨 다니는 도망자로 방랑의 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를 믿으면 잘 살 줄 알았고, 복 받을 줄 알았지, 예수 믿어서 이렇게 된다면야 그 누가 믿겠습니까? 그런데 저 예루살렘 초대 교인들은 복 받는 것은 두고라도 예수를 믿자마자 이렇게 엄청난 핍박을 맞게 된 것입니다.

이런 환란이 오면 대부분 주저앉고 말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기 18-20절을 보십시오. 세상이 저들의 입을 막으려하지만, 오히려 세상 앞에 무엇이라 이야기합니까?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여기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도대체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기에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세상 앞에 이처럼 담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마져도 내놓을 만큼 세상 앞에 담대히 당당히 외쳤던 그들의 모습 앞에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도대체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첫째, 올바른 지식을 가질 때 담대해진다는 사실입니다. 13절에 보면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베드로가 글을 몰랐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대필이긴 하지만, 베드로 전·후서를 쓴 것으로 봐서 그는 글을 알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베드로를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자기들과 같이 구약과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는데, 신학을 제대로 하지 않아 학문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잘 얘기하는가에 대해 놀랐다고 합니다. 이들의 담대함은 올바른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지식에서부터 나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왜 담대했습니까?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우주를 알고, 나를 알고 하나님의 진리를 알면, 우리는 담대해질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사실, 성경을 통해 이 세상이 무엇이고,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두려울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우리의 담대함이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담대함이 올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리 안에 담대함이 찾아올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현대인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은 두려움입니다. 질병과 사고에 대한 두려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혹시 내 사업이 부도나지 않을까, 아름다운 가정을 가진 사람들은 이 행복이 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나는 이번에 인질 사건을 보면서 2001년 9월 탈레반에 열흘 간 억류됐다 풀려난 영국 '선데이 익스프레스' 기자인 '이본 리들리'의 자신이 당했던 상황을 들어보면 지금 억류되어있는 그들이 얼마나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겠는가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한낮에는 기온이 40도까지 오르는 불볕더위가운데 경비들은 화장실 가는 것을 빼고는 외부 출입을 금하는 현실도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목욕은 상상도 할 수 없고, 주식으로 먹는 빵에선 누린내가 나고 모래가 씹히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에 빵을 먹는 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식수는 석회질이 많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뿌옇습니다.

그리고 인질들을 자주 옮기기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그 두려움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는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저녁이 되면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데 오늘이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일지 모른다는 공포가 자신을 얼마나 초라하게 만드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시 눈을 붙인 것 같은데 벌써 동이 터 오르면 또 하루가 시작되는구나하는 막연한 기대감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자신은 목숨을 구걸하는 비참한 또 하나의 자신을 본답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우리의 모든 것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이 너희를 먹이지 않겠느냐?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이 너희도 입히지 않겠느냐?" 우리가 이 지식을 가질 때에 쓸데없는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줄 믿습니다.

둘째, 예수님과 동행할 때 담대해집니다. 13절을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사도 베드로는 3년간 예수님과 동행했어요. 같이 먹고 잤어요. 그런데 그는 두려워서 범죄하고 말았어요. 로마 군인이 칼을 들이대고 "너 예수 알지?" 하고 물은 것도 아니고, 계집종이 와서 "너 예수와 함께 있었지?" 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했어요.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요. 그런데 그가 여기서는 왜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까?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깨닫고, 그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한 줄 믿습니다. 정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그 예수님과 날마다 동행하게 될 때, 일어날 때나 잠들기 전 항상 예수님과 대화하며 동행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기는 담대함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걱정, 근심이 찾아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주님이 내 곁에 계시면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없이 체험했습니다. 이런 주님과의 동행을 체험하며 살아가십니까?

셋째, 믿음의 체험이 있을 때 담대해집니다. 14절에 보면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믿음의 체험!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간증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면, 관념적인 믿음입니다. 체험적인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담대하지 못하고 믿음대로 살지 못하는 겁니다. 왜? 남의 얘기는 많이 들었고, 성경 얘기도 많이 압니다. 그러나 나의 체험이 없는 겁니다.

사도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주님과 함께 다닐 때, 눈먼 소경이 눈뜨는 것을 보았어요. 죽은 자를 살리는 것도 보았어요. 그런데 그는 그저 관념적으로 믿었을 뿐입니다. 막상 그 앞에 시험이 닥쳐오자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어요. 그러나 이제는 베드로가 담대해질 수 있었어요. 왜요? 관념적인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얘기가 아니었거든요. 바로 내 얘기였어요. 내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켰더니, 그가 일어났어요.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은 이런 체험을 가지고 계십니까?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체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는데, 남의 다리를 긁고 있는 겁니다.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얘기 들으면서 좋아합니다. 성경 읽으면서 그저 좋아합니다. 그러나 나와는 상관이 없는 얘기입니다. 믿음이란 뭡니까? 크리스찬이 누구입니까? 내 상식으로 사는 겁니까? 아닙니다. 내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를 붙잡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겁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을 체험하는 겁니다. 내가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얘기합니다. 오늘 우리는 왜 이 능력을 다 잃어버리고 이렇게 무능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우리 모두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저들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18절과 19절입니다.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신앙이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왜 죄를 짓습니까? 하나님 앞에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내 인격적으로 믿지 않는 겁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머리로는 압니다. 하나님은 모르는 것이 없다고 다 인정하면서, 실상 우리는 늘 그 분을 소경의 하나님으로 압니다. 내가 은밀하게 죄를 지을 때는 하나님이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사십니까? 왜 타협합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환경을 바라보기 때문에 타협합니다.

여러분은 누구 앞에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혹 친구들의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닙니까? 사람을 의식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혹시 돈 앞에서 사는 것은 아닙니까? 돈이 바로미터입니다. 돈 앞에서는 신앙이고, 뭐고 필요 없어요. 얼굴이 환해져서 물어보면 돈이 잘 벌리는 겁니다. 죽상을 하고 있으면 사업이 안 되는 겁니다. 돈 앞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여기 19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가를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옳은 줄 믿습니다. 이왕에 눈치를 보려면 하나님의 눈치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십시오. 목회 하면서 이것이 관건입니다. 저도 사람이 즐거운 설교를 하고 싶어요. 제가 능력이 없는 줄 아십니까? 자료가 없는 줄 아십니까? 설교 준비 할 때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목회를 하고 싶은 마음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면 좀더 부흥될 것 같고, 좀더 유익이 생길 것 같아요. 그러나 저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목회하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신앙인들이 모인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늘 하나님 앞에 살아가십시오.

지금 베드로는 자신들의 입을 막으려는 자들에게 20하반 절에 외칩니다.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이 세상에 두 가지 삶이 있어요. 하나는 쫓기면서 사는 삶, 다른 하나는 부름 받아 사는 삶입니다. 쫓기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늘 쫓겨요. 일, 돈, 환경, 시간에 쫓깁니다. 그 사람들의 특징은 늘 바쁩니다. 늘 만족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갑니다. 내가 환경을 지배하기보다 환경이 나를 다스립니다. 돈과 시간이 나를 다스리고 늘 쫓깁니다. 그렇게 수동적으로 살아가다가 쫓겨서 죽습니다. 부름 받아 사는 삶을 볼까요? 능동적인 삶입니다. 목표가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부름을 위해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시고 구원하셨을 때에 내게 주신 소명이 있다는 겁니다.

나는 오늘 아프칸에 억류되어있는 우리의 형제들의 이야기로 시작을 했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편협 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몰아 부칠 지 모릅니다. 왜 그렇게 지혜롭지 못하느냐고 믿는 사람들도 핀잔을 줄지 모르겠습니다. 또 꼭 그렇게 해야 신앙 생활하는 것이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번 일로 많은 사람들에게 염려를 끼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개신교의 선교방향의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지금부터 57년 전에 이 땅에 6.25가 터졌을 때 유엔의 16개국의 무수한 청년들의 죽음이 과연 무모한 행동이었겠습니까? 또 전쟁은 끝났지만, 그 전쟁의 휴유증으로 인해 이 땅에 전쟁으로 버려진 고아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들을 누가 돌보고 거두어 주었습니까? 그 당시 얼굴도 다르고 피부 색깔도 다른 이웃나라의 젊은이들이 이 땅에 들어와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위험도 불구하고 온 저들의 섬김과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이 이 만큼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대부분이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무릎 쓰고 희망의 불씨를 지폈던 것입니다.

이번 22명의 억류된 일행 역시 누구보다 자신을 구원의 자녀로 받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았기에, 자신들이 다니던 직장도 사직서를 내고, 자신의 전공을 살려 자비량으로 위험한 불구덩이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길바닥에 혼미하게 내동댕이쳐진 그 불쌍한 영혼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간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매우 심한 심리적 공황 상태를 겪고 있습니다. 이번 억류된 임현주 자매의 육성이 보도되었지만, 2003년부터 그곳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온 힘을 쏟던 자매입니다. 심지어 양팔이 잘려나간 아이를 한국까지 데려와 치료를 해 줄 정도로 그 나라를 사랑한 자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배형규 목사님의 순교와 22명의 아픔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크고 작은 어려움에 절망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고 계실까요? 우리가 오늘 무엇을 묵상해야 할까요? 오늘 베드로 일행이 외쳤던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 는 이 질문 앞에 우리도 서야하지 않습니까? 이번 억류된 22명의 아픔은 어쩌면 선교의 비전과 꿈들을 잃어 가는 이 땅과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수많은 아귀다툼 속에 선교의 불길과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시작이 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여름도 어김없이 우리 교회는 단기선교 팀들을 파송하며 선교 공동체로서의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아야 할 시간입니다. 이제 우리 청년들이 이번 금요일부터 5박6일 예정으로 그 동안 준비해왔던 일본 선교를 떠납니다. 50여명의 일행이 영적인 불모지인 일본 땅에 이 일본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세계 경제대국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속을 들어가 보면 쉽게 표현하면 기독교인이 1%도 안 되는 온갖 귀신이 ?끓는 나라이고, 성 윤리가 무너진 타락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일본은 없다고 까지 그들의 미래를 어둡게 보았습니다. 그런 나라에 우리가 길을 떠날려고 하는데 보통 각오 없이는 우리 역시 그들의 문화 속에 빨려들어 영적 전쟁에 지게 되는 결과를 만날 지도 모릅니다. 이제 길을 떠나는 우리 가슴속에 영혼 사랑하는 마음과 복음을 증거 하는 담대함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 땅에 영적인 지진을 일으켜야 할 줄 믿습니다. 이를 위해 함께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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