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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숨보다 귀한 일 (행 20: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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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보다 귀한 일(사도행전 20:17-24)

23명의 샘물교회 교인들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봉사 활동 갔다가 탈레반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아직까지 그들이 언제 풀려날지, 어떨지도 모르는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솔하여 갔던 배형규 목사의 죽임 당함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더욱 커졌습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나?” 하던 기대가 “죽일 수도 있다”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컴퓨터 들어가기가 겁난다는 생각입니다. 피랍사건을 둘러싸고 수많은 누리꾼들의 댓글들 마치 전쟁이라도 치르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그 댓글들은 기독교에 대한 비판 또는 공격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 생각에 어쩌면 크리스천들까지도 그들의 생각에 같이 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몇 가지로 정리 하자면 -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 이렇습니다.

1) 거긴 뭐 하러 갔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게까지 목숨 걸고 남의 나라에 가서 봉사활동 할 거 뭐 있느냐는 거지요. 우리나라 안에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얼마나 많으냐? 고 하는 겁니다.

2) 그리곤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대한 글들이 대부분입니다.
돈을 주고 피랍 자들을 석방시키려 한다는데 대해 찬반이 계속됩니다. 돈을 주어서라도 그들을 데려와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가 낸 세금 단 1원도 그런 일에 쓰게 하는 것 원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서까지 쓰고 갔다는 것은 죽기로 각오하고 갔다는 말인데, 그러면 거기서 죽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3) 비아냥거리는 것도 있습니다.
봉사 활동이냐 선교냐 하는 겁니다. 최근 박은조 목사는 공격적 선교가 아니라 봉사활동이라고 했습니다. 공격적 선교가 아니라는 것은 직접적으로 “예수 믿으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나 병원 봉사나 교육봉사를 통해 알게 모르게 예수님을 알린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 역시 선교가 아니냐는 겁니다. 그래서 선교라면 구차하게 봉사 활동 운운하며 살려하지 말고 복음 전하다 죽으라는 거지요.

이런 말씀 드리면 댓글 소개만으로도 몇 시간이 넘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뉴스에 보면 한나라당 경선을 위해 유세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필승을 이야기 합니다. 자기가 나가면 어느 누구도 자신을 이길 수 없기에 반드시 승리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반대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나가면 반드시 참패한다는 겁니다. 그 사람에 대한 비리를 들추어내면 한방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거지요.
하나의 사람을 보는 눈이 이렇게 다릅니다. 그러나 이건 다르다고 하는 거지, 틀리다고 할 수 없는 겁니다. 한 사람의 말은 맞고 한 사람의 말은 틀리다 할 수 없습니다.

정부에서 북한을 지원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찬성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반대 합니다. 둘 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둘 다 그 이유가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지원하면 안 됩니다.
그런 걸 가지고 ‘관’(觀)이라 합니다.

세계관, 경제관. 가치관...등으로 말입니다.
세계관이란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좋게 봅니다. 희망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쁘게 봅니다. 갈수록 악해지고 무기제조나 환경문제를 이유로 희망이 없다고 합니다.
경제관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국경제가 지금보다 훨씬 나아진다고 말합니다. GNP 2만 불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아니라는 겁니다. 곳곳마다 위험적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걸 가지고 ‘관’(觀)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보는 관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보는 관점이라는 결국 자기 생각이라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지요. 그것은 일종에 자기가 쓰고 있는 안경알의 색깔과 같습니다. 빨간 안경 쓰고 보면 세상이 다 빨갛게 보이고, 파란 안경 쓰고 보면 세상이다 파랗게 보이듯이 말입니다.
가치관도 그렇습니다.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이름 날리는데 가치를 둡니다. 그래서 출세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삽니다. 어떤 사람은 조용히 산이나 농촌으로 가서 텃밭 가꾸며 그렇게 소박하게 삽니다. 이럴 때는 이 사람도 옳고, 저 사람도 옳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최고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이 최고라고 합니다. 역시 맞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 역시 맞는 말입니다. 세상은 어느 것 하나 틀린 것 없습니다. 그쪽 입장에서 보면 다 맞는 겁니다.
사형제도는 어떻게 생각 합니까? 없애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환경이 중요 합니까? 개발이 중요 합니까? 환경을 살리기 위해 초가집에서 살고, 자동차나 전기제품 다 없애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께서 밀레도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 하시는 마치 유언 같은 겁니다.

22-24절, “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지 투옥과 환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서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다 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목숨보다 더 귀한 일이 있다는 겁니다.
사실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대해 많이들 반대했습니다.

21장에 보면, 어떤 사람은 바울이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과 발을 묶고서, “유대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허리띠 임자를 이와 같이 묶어서 이방 사람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고 성령이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고 성령께서 말씀하셨답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이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간곡히 만류합니다.

사도 바울께서 대답 합니다.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뿐만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에 이런 바보 멍청이가 어디 있습니까? 사도 바울, 그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얼마든지 세상 적으로 출세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꿈꾸었던 것은 산헤드린 회원이었습니다. 그것은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국회, 사법, 행정 등 다 담당하고 결정하는 막강한 곳입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바울, 거기다가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당대 최고로 손꼽는 스승 밑에서 공부하였기에 얼마든지 그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 버렸습니다. 예수 위해 그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배설물로 여긴다는 말은 그의 로마 시민권, 공부한 것, 이런 것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그의 꿈을 버렸다는 겁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어찌되었든 바울을 이야기 하면 바보 멍청이라고 할 겁니다.  그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그리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꼭 예루살렘으로 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요. 여태까지처럼 그냥 이방인 땅에서 복음 전하며 살며 되는 거 아니냐는 겁니다. 굳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잡힐 거 뭐 있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도 내가 살고, 내가 건강하고, 내가 돈 좀 있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께서는 “아니라”고 하십니다. 건강보다 귀한 일이 있답니다. 돈 보다 귀한 일이 있답니다. 심지어 목숨보다, 내 생명보다 귀한 일이 있답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인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지금 말하자면 전도하는 일입니다. 선교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전도하는 일이 목숨보다 중요한 일이라 생각 되세요? 목숨 걸고 선교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야스미나 카드라’라고 하는 알제리 사람이 쓴 <테러>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린아이를 비롯해 사람들이 가득한 텔아비브의 한 식당에 임산부 한 여인이 들어왔습니다. 잠시 후 그 식당은 큰 굉음과 함께 통째로 날아갑니다. 그 임산부 여인은 임산부가 아니라, 온 몸에 폭탄을 두르고 임신복으로 위장해 들어온 자살 폭탄 테러범이었습니다.
뒤이어, 팔레스틴 출신이지만 이스라엘로 귀화해 의사가 된 아민은 그 자살 폭탄 테러의 피해자들을 치료하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죽어가는 환자들을 살려내고 집에 돌아와 깊은 잠에 빠져드는데, 그 순간 병원으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그리고 병원에 가보니, 의사로서도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처참하게 날아가고 얼굴만 남은 자살 폭탄 테러범을 보게 됩니다. 그 여인은 바로 아민 그 의사의 부인이었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아내는 한 번도 팔레스틴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죽기 전에 자기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그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아민은 고민합니다. 왜 그랬을까? 그토록 행복해 보이던 아내가 왜 그랬을까? 그래서 아내의 삶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 여인 곧 아민의 아내에게서도 우린 목숨보다 더 귀한 일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몸에다 폭탄을 두르고, 어린아이들과 수많은 사람이 붐비는 식당에서, 그 폭탄을 터뜨려 자신도 죽고, 또 수많은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그 여인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야스미나 카드라’는 그 책에서 이렇게 단호하게 외칩니다.
“제아무리 숭고한 희생이라도 사람 목숨보다 숭고한 건 없다.”
그래요. 제아무리 숭고한 희생이라도 사람 목숨보다 숭고한 것은 없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기 원하는 사도 바울. 그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겁니다. <테러> 소설의 여자 테러범은 팔레스틴의 아픔을 전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죽음을 택했지만, 사도 바울은 수많은 사람을 영원한 죽음에서 살리고자 자신은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그것이 기독교 아닙니까? 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까? 결국 죽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당신 자신은 죽음을 택하신 것 아닙니까?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고, 그것이 예수 믿는 우리가 또한 따라야 할 예수 정신 아닙니까?

“기독교는 너무 배타적이다.”라도 말들 합니다. 그러나 배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4:12,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을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구약은 “하나님만 섬겨라.” 합니다. 그 외의 다른 종교, 어떤 신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신약은 “예수만 믿어라.”고 합니다. 그 외의 어떤 종교나 다른 신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사역지, 가는 곳곳마다 그들 나름대로의 종교와 신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테네에 가보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새긴 제단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입니다. 그걸 전한 겁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미음 때문에 생명 걸었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생명 걸었습니다. 스데반 이후 숫하게 박해 받고, 죽임 당하고, 그런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임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생명도 내어 놓았습니다. 그것이 목숨보다 귀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계속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재림으로 오시는 날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가까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요, 멀리 외국에 나가서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대림교회에서 필리핀 고산지대에서 선교하는 목사님을 도와서 교회를 건축하고 봉헌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님과 몇몇 교유들과 참석했습니다. 다섯 시간 이상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 작은 동네. 동네랄 것도 없습니다. 촌장이라고 하는 나이 드신 분이 마치 기저귀 같은 것 하나 차고 나와서 영접했습니다. 그 산꼭대기의 아이들, 영양실조로 눈이 멀어가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과자를 나누어주어도 서로 달라고 손 내미는 아이도 없고……. 선교사가 한국에서 구해 준 T셔츠 입었더군요.

거기서 하루를 잤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그냥 놔두면, 그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이들을 구원하실 것 아닌가? 괜히 예수 이름 전해서,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 거지만, 예수 안 믿으면, 예수 전해 주었음에도 안 믿었으니 멸망당하는 거 아닌가? 하는…….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끝내 승리하시는 날, 그날이 언제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던 예수님은 “먼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막 13:10)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종교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이전의 일입니다. 그것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느냐 묻기 이전의 일입니다. 복음은 어디든 정해져야 합니다.

또한 복음은 영원한 생명뿐만 아니라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한국 근대사를 이야기하면 기독교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 120년 전의 일입니다. 그 당시 한국은 그야말로 미개한 나라로 여겨졌습니다.

기독교는 이 땅에 들어와서 병원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까닭 없이, 이유 없이 그냥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기독교는 이 땅에 들어와서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볼 것을 보게 했습니다.
기독교는 복음뿐만 아니라 역사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을 우해 싸우는 사람을 양성했습니다. 이승만, 김구, 이준, 유관순, 최영신 이런 사람들은 감리교 교인들이었습니다.

감리교회는 정동제일병원을 세웠습니다. 나중에 상동병원이 되었고, 그리고 세브란스병원이 되었습니다. 여인들을 위한 병원을 세웠습니다. 민비는 이 병원을 ‘보구여관’이라고 이름 지어 주었습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등의 학교를 세웠습니다. 삼문출판사라는 출판사를 세웠습니다. 서재필 등이 이곳에서 독립신문을 찍어냈습니다. 1921년 태화여자관을 개관하여 여성과 아동을 위한 사회사업을 전개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그냥 되었습니까?
처음 이 땅에 온 선교사들이 환영 받으며 왔습니까? 그들 역시 이 땅에 발을 디딜 땐 죽기로 각오하고 온 겁니다.
여러분과 저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이 그냥 된 줄 아십니까? 크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심이 있었고, 작게는 수많은 복음 전하는 이들의 피와 땀과 고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받았습니다.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의료, 교육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거저 주어야 합니다. 아프가니스탄과 많은 나라들은 우리들 50년 대, 60년 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를 향해 자신은 복음에 빚진 자라고 합니다. 누군가 전해준 복음을 자기도 받은 겁니다. 그렇다면 나도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해줄 빚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안에도 전도하고 봉사할 곳이 많은데 뭣 하러 외국까지 가야 하나고요.
만일 미국이 복음화 다 되고, 그야말로 미국 내에서 더 이상 전도 하거나 봉사 할 곳이 없을 때 선교사들이 외국으로 나갔다면, 아직도 이 땅에는 복음이 들어오지 못했을 겁니다. 미국도 복음화 다 되지 못했거든요. 미국도 돕는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 많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누군가 물에 빠졌습니다. 그럴 때 왜 위험하다고 경고 했는데 들어갔느냐고 손가락질 하며 소리만 지를 겁니까? 그 사람의 종교가 나하고 같으냐 다르냐를 따지고, 다르다하여 죽으라고 말하겠습니까?

  연예인 차인표씨가 자신이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글을 올렸습니다.
  “악어가 득실거리는 어느 강가에 ‘위험’이라는 푯말이 써있는데 강을 건너다 작은 배가 뒤집혀 아이들이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그들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수가 없다”고 하며, 그 아이들에게 “위험이라는 푯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네 의지로 갔으니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할까요?  “지금 악어에 물리고 있는 사람이 나와 같은 종교인가 아닌가를 분석해야 할까요?”라고 되물었습니다. “유서 쓰고 갔으니 조용히 죽어라.” “내가 낸 세금으로 몸값 지불하지 말아라.”하고 말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물론 이런 표현도 트집 잡으면 한도 없습니다. 다만 종교가 어떻든 사람은 살려야 하는 거 아니냐는 겁니다.
물론 기독교도 잘못한 거 많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세상 사람의 욕먹을 짓도 했습니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왜 이렇게 기독교가 비판을 받게 되었나 싶습니다. 오히려 기도교인들이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야 한다는 소리를 왜 못 듣나 싶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가지는 진정한 그리고 궁극적인 것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구원 받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분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도, 숫한 믿음의 사람들이 박해 받고, 죽으면서도 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 역시 그 일 곧 복음 전하는 일이 목숨보다 귀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에 대해, 요한복음 1장은 빛이신 예수에 대해 어둠인 땅이 반가워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요 1:12)고 하십니다.

복음은 증거 되어야 합니다.
전도와 선교는 여전히 계속 되어야 합니다.
전도는 곧 생명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곧 목숨보다 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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