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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군가를 감동시킨 적이 있습니까? (마 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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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동안 그 누군가를 감동시킨 적이 있으십니까?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물질이 넉넉하거나 보이는 것이 다채롭고 화려해서 세상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감동케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감동이란, 인위적인 향수처럼 풍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향기처럼 우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의 기쁨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목사도 많은 성도들 가운데서, 특별히 감동을 주는 성도들을 만납니다.
사람이란 참으로 묘해서 냉수 한 그릇으로도 감동할 수도 있지만, 어떤 때는 금덩어리를 주어도 감동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동이란 아무나 끼칠 수도 없고, 또한 아무나 경험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두 가지를 놀라워하셨습니다.
하나는, 당연히 믿음을 가져야 할 선민인 유대인들이 믿음을 갖지 않는 것에 놀랐고, 다른 하나는, 믿음을 갖기 어려운 이방인들이 오히려 믿음을 갖는 것에 놀라셨습니다.
오늘은 이방인이었던 이 백부장이 주님에게 어떤 감동을 주었는가를 통해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이 백부장은 이웃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생략되고 있습니다마는 똑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눅7:3절을 보면 “유대 장로들이 발벗고 나서서 이 백부장의 간청을 예수께서 들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왜냐하면 백부장이 저들을 사랑했고, 존중했고, 배려했으며, 저들의 회당을 지어주었기 때문에 유대 장로들은 감동을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백부장이 예수님을 감동시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감동시킨 것일까요?
10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여기 “기이히 여기셨다”고 하셨다는 말씀은 “깜짝 놀랐다, 신기해 하셨다. 감동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믿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관계에서 믿음만큼 감동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뢰하고 믿어주는 거기에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 나를 안 믿어 주어도,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만 있다면 그는 감동 있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자기자신의 병 낫기를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가족의 병 낫기를 위해 간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당시 물건처럼 취급받던 비천한 종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가치한 것을 위해 자기의 체면과 위신을 다 접었습니다.

여러분, 중풍병이 어떤 병입니까?
중풍병은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치료하기 어려운 난치병입니다.
그러므로 백부장은 그 하인을 쉽게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이 일을 해야지 밥만 축내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면 그건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종이 회복된다고 해도 이젠 일꾼 노릇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그를 긍휼히 여기는 백부장의 이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것을 향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백부장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감동케 한 것은 예수님이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시자 그가 나타낸 반응입니다.
백부장은 말하기를 “예수님, 예수님을 어찌 저희 집에 모실 수 있겠습니까? 감히 주님을 맞을만한 처지가 아니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냥 여기서 말씀만 한 마디만 해 주세요. 그러면 제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저도 상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또 제 밑의 부하들도 제 명령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니 굳이 수고롭게 누추한 저희 집까지 오실 필요없이 여기서 한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제 하인의 병이 낫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하고 헷갈렸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생각하면 “장난치는 것”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당시 가버나움에 저만큼 유력한 자가 또 어디 있습니까?
로마 백부장이면 아마 그 사는 정도가 꽤 부유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맞을 수 없을 정도로 누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과 누가복음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백부장의 말이 결코 가식적이거나 즉흥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백부장은 정말 주님을 너무도 크게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자기가 너무도 작게 여겨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세상에서야 좀 산다 싶겠지만, 예수님은 너무도 크신 분이요, 너무도 귀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 예수님을 자기 집에 맞아들이기에는 너무 송구스럽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백부장의 마음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좀 잘 산다 싶으면 과시적이기 쉽습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이라면, 뭔가를 좀 보여주려고 예수님을 데려다가 은근히 과시하고픈 마음도 없지 않은 것이 인간심사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말 더없이 아름답고 순수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눅7:4-5절에 보면 유대 장로들이 주님께 백부장의 청을 들어줄 것을 요청할 때 “예수님, 저 사람의 청을 들어주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좀 비판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그것은 식민지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한 하나의 사탕발림일 수도 있지 않느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런 의도였다면, 유대 장로들이 감동을 먹고 주님 앞에 백부장을 추천하러 나왔을까요?
그렇습니다.
유대 장로들이 예수님께 백부장을 위해 간청하는 것이 쉽지 않듯이, 백부장 또한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짓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식민지의 얼을 키워주는 것으로, 로마의 얼을 새겨 넣어야 할 로마의 입장에서는 탐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당을 짓는다는 건 뭐니뭐니해도 금전적 뒷받침이 따르는 문제입니다.
그는 분명 회당 건축을 위해 많은 것을 드렸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100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백부장이라는 직위는 많은 돈을 만지는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가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기에 합당치 않다고 한 것은 실제로 그가 근검절약적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오늘 이 백부장의 처신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 드림이 아까운 사람은 하나님을 감동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계속해서 섬김을 통해 이웃과 주님께 감동을 드리는 가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이 백부장의 믿음은 겸손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서 고쳐 주겠다”고 했을 때,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다”는 백부장의 말에 대하여, 초대교회 교부였던 어거스틴은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맞이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동안에 그는 이미 그리스도를 그의 마음에 맞이할 자격을 갖춘 것이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높이고 자신의 무가치성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겸손은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좋다면서 겸손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가짜인 것입니다.

비록 백부장의 집은 누추하지도 않았고 초라하지도 않았겠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인식할 때, 자기 집이 예수님을 모시기에는 너무나 누추하고 초라하다는 그의 판단은 겸손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정확성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겸손하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겸손으로 자신이 작아질수록 하나님은 커지고, 교만으로 자신이 커질수록 하나님은 작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왜 모세를 들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습니까?
그것은 그의 가장 큰 자질이 겸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보다 그의 겸손이 뛰어났다고 증거합니다.
그런 모세가 평생에 딱 두 번 혈기를 냅니다.
한번은 애굽의 왕자로 있던 젊은 시절에, 그리고 또 한번은 물을 달라고 투정하는 백성들 앞에서 반석을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 달가워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지녀야할 겸손은 얼마나 완벽한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마11:29절에 보면 주님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남에게 잘하고 하나님께 헌신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만하면 그 모든 것은 없는 것만 못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감동케 한 이 믿음의 사람은 바로 겸손으로 무장한 사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힘이 좋고, 능력 있고, 재주 좋고, 돈 많은 사람이 흔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겸손한 사람이 흔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이 백부장의 믿음은 무엇보다 말씀을 붙드는 믿음이었습니다.

백부장이 “여기서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할 때, 예수님이 “네 믿은 대로될지어다”라고 하자 그는 그대로 그 말씀을 믿었고 그 하인은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믿으면 믿는 대로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의심하면 의심대로 될 것이고, 크게 믿으면 크게 작게 믿으면 작은 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말씀을 붙드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말씀을 여러분의 감정과 지식과 체험보다 앞세우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감정과 체험은 내 것이지만, 말씀은 하나님의 것이고 또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 이방인 백부장이 바로 주님을 감동시켰고 그로 인하여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결코 믿음을 갖기에 좋은 위치나 조건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감동케 했습니다.
백부장은 남을 돌아볼 줄 아는 긍휼의 사람이었고, 겸손했고, 하나님께 부요했고, 말씀을 붙들었던 그였기에 그는 주님까지도 감동을 주는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이와 같이 섬김을 통해 이웃을 감동케 하고,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말씀을 신뢰하는 가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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