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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외로움 (호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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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한 말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가 되시며 사랑 때문에 존재하시고 사랑 때문에 사람과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랑의 영원성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사랑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으며 사랑 없이는 진리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여기서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것은 죽음까지 당하시면서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분으로 성경에 조명되고 있습니다. 마치 너무나도 외로워서 사랑의 열병을 앓는 여인처럼 사랑할 자를 날마다 찾아 헤매시는 그런 분으로 나타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소원이 있다면 여러분과 나를 만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제발 나를 만나주고, 제발 나를 떠나지 말고 나와 함께 영원히 같이 살자고 애원하듯 인간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내가 누구를 만나 내 사랑을 줄 것인가? 어느 날 하나님이 외로워지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어찌 내 사랑을 싫다고 도망가느냐! 제발 내게로 돌아와다오.” 그러한 하나님의 모습이 예수님의 비유에서 충분히 나타났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어린 양이였는데 그 하나를 잃어버린 하나님은 견디지 못하시고 험산 계곡을 미친 듯이 소리치며 다니다가 그 사랑의 대상인 어린 양을 발견했을 때 너무 기뻐서 다시는 잃어버리기가 싫어 놓치지 않으려고 품에 안고 돌아오시는 예수의 모습을 우리가 예술 작품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 싫다고 버리고 나간 탕자를 절대 포기하지 못하시고 밤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분이라서 돌아온 사랑의 대상을 책망할 능력을 상실합니다. 살아 돌아왔다는 그 한 가지 사건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해서 큰 경비를 아까워하지 않고 최고의 품위 있는 잔치를 베풀고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표현으로 외로워서 혼자 못사는 그런 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어느 날 큰 잔치를 배설하고 사랑의 대상자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사람들이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참을 수가 없어서 종들을 시켜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데려오라고 하시며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대상이 날마다 필요하신 하나님, 혼자 계시면 외로워서 못 견디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이런 속성으로 조명되어 있습니다.

“만약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온갖 좋은 것으로 너를 채워줄 것이며 네가 영원토록 살 수 있는 영생을 선물해 주고 영원히 누릴 수 있는 행복의 하늘나라를 네게 줄 것이니 제발 내 말을 믿고 나와 함께 살아다오.” 이렇게 하나님이 애원하고 계십니다. 버리고 떠난 인간을 절대 버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자존심을 다 버리시고 인간을 찾아오신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요, 그 절대적 실천 행위가 십자가 사건이 됩니다. ‘나는 죽으면서라도 너를 사랑해야 돼!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 내가 죽을 터이니 이제 네가 내 마음을 인정해 주겠니?’

이 호세아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 인간끼리 나누는 사랑도 자존심 때문에 깨어지는 경우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관계에서 언제나 일 순위를 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 속에 내가 일순위로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원합니다. 제가 심방 다니면서 들은 소리인데, 요즘에 며느리들이 사랑의 순번을 정하는데 일 순위는 자기 자신이고  이 순위는 자녀이고 3번은 남편이고 4번이 강아지고 그래도 애교로 봐주시니까 시어머니가 5번이고 시아버지는 제일 마지막이라고 합니다. 제가 아들집에 들렸다 오면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3번아 잘 있어라. 6번은 간다.”  이 사랑의 관계에서 자존심 부리는 사람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지 절대로 전화도 먼저 하지 않습니다. 미안한 일을 해 놓고 미안하다는 말도 먼저 하지 않습니다. 만나자는 말도 더욱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정말 만나기가 싫은가하면 또 그렇지는 않습니다. 간절히 간절히 기다리고 있으면서 자존심을 부리는 것, 이것이 사랑의 상대성입니다. 그런대 하나님은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자존심은커녕 날마다 부르시고 찾아오시고 사랑한다고 하시고 도망가도 따라 오시고 죄를 졌다고 해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찬송가를 부르지 않습니까? “♬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  혹시나 내 사랑이 돌아오지 않을까 동서남북을 보며 내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방황치 말고 오라고 하십니다. 이 호세아 성경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그 표현을 현실감 있게 하기 위해 호세아 선지자를 희생양으로 삼아 하나님의 백성, 즉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대상자들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왕 중 13대 왕이었던 여로보암2세의 통치시대에 활동한 예언자였습니다. 이 성경의 시작은 그의 불행한 결혼 생활이 조명되고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의 신분은 본래부터가 매춘부였는데 호세아와 결혼을 합니다. 고멜이라는 이름의 여자로 결혼 전부터 문제가 있는 여자로 나타나는데 왜 그렇게 됐는가? 이것이 곧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에덴동산을 떠난 후부터 문제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 역사라는 것은 이미 버려져서 구원 능력은 전혀 없어진 완전 타락의 문제아들로 내버려진 매춘부와 같이 그렇게 되었다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을 하나님이 절대적인 사랑으로 제자리로 되돌려서 ‘나는 이렇게 해서라도 너를 사랑해야 돼. 사랑을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게 나야!’ 사랑의 절대적 대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 나타난 하나님의 외로움을 몇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호세아는 부인 고멜에게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는 고멜과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호세아는 가족을 위해 매우 성실하고 좋은 가장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잘 살고 있는 행복한 가정을 깨트리고 고멜이 남편과 세 자녀를 버리고 정부한테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가정은 고멜의 타락적 성품 말고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마 이 호세아뿐만 아니고 모든 남성과 여성의 심리는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가장 자존심이 상할 때가 언제인가? 내가 최고로 신뢰감을 주고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 버림을 당할 때라고 봅니다. 특히 이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 누구나 최고로 두려워하는 문제가 사랑하는 자에게 버림당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남자들은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인간관계가 있는데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랑의 대상에게 인정받기를 기다리고 비로소 인정을 받았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감정을 가집니다. 또한 여자들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일생을 걸고 헌신하는 존재요, 남자들은 훌륭한 남편이라는 소리 한번 들으려고 평생 피 땀을 흘리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 인간이었으니까 호세아도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내 고멜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열심히 노력하고 살았는데 결국 타락적 성품 때문에 버림당한 외로운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쯤 되면 예언자도 낙심합니다. 심각한 고민에 빠져든 호세야가 절망적 자기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괴로워할 때 하나님은 그의 영혼의 문을 두드려 하나님의 마음을 지금 보여줍니다. “호세아야 네 마음이 내 마음이다. 네가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마음이 곧 나다. 나는 처녀 이스라엘을 내 백성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랑했고 내 사랑의 모든 것을 주어서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가르치려고 계획했다. 아내를 사랑하듯 사랑하고 너와 함께 살면서 내 사랑의 모든 대상을 만들어 가려고 했는데 이스라엘이 나를 버리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정부에게로 도망갔다. 너의 가정의 비극이 다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고멜의 성품과 똑같이 이스라엘이 나를 버리고 내가 아닌 바알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타락성 때문이다. 네가 버림을 당해 슬퍼하듯 나도 내 사랑의 대상자 이스라엘에게 버림을 당해 너와 같이 슬퍼하고 있음을 알라.”

사실 호세아가 예언자가 된 것은 이것 때문에 그 영혼의 문이 하나님께로 열린 동기가 됩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든지 어떤 계기를 만나면 인생을 정리해보는 심각성을 가져 봅니다. 고뇌를 통해서 성숙해지는 면도 있습니다. 실패나 좌절의 사건이 닥치면 더욱 자기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깁니다. 그럴 때 정리가 잘못되면 막가는 인생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잘되면 보다 나은 새로운 인생의 길을 출발하는 성공적 인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호세아의 고민은 버리고 떠난 고멜을 잊어버리고 정리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새로운 길이 주어질 텐데,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자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하나님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고민이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 버리고 떠난 인간! 그러나 하나님은 정부와 함께 달아난 이 택한 백성을 절대 잊을 수 없는 마치 순정파 남편과 같이 괴로워하고 있는 겁니다.

당시는 하나님의 인간 사랑을 가장 방해하고 있는 마귀적 세력이 있었습니다. 바알 종교였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마치 하나님과 바알의 전쟁터와 같은 인상을 줄만큼 하나님 백성의 정신사를 가장 강력하게 흐리게 한 것이 바알 종교의 세력이었습니다. 이 바알 종교의 세력이 얼마나 컸었는가 하는 것은 엘리야 사건에서 아주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호렙산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을 버리고 다 바알을 따라갔는데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엘리야라는 선지자 한 사람만 남고 모두 바알 신자가 되었다고 했으니 이 택한 백성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웠던가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해석할 수 있는 좋은 말이 우리 문화에 글자 하나로 있습니다. 한이라는 말입니다. 이 한이란 말은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말이 됩니다. 즉 사랑과 증오가 함께 있으며 좌절과 미련이 서로 모순되는 감정의 충돌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한이 들어와서 해결이 되지 않으면 병이 됩니다. 이때의 하는 말은 말 뒤에 숨어있는 뜻이 따로 존재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한이 많았기 때문에 한 많은 백성으로서 문화적으로 마음을 감추기 때문에 직설적 표현을 하는 서구 사회같이 생각하고 말을 들으면 큰일 납니다.  이런 말을 합니다. “미워죽겠다.” 그 뒤에는 너무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표현되는 말 자체 뒤에 따로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정말 바라는 것은 님을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이 보내드린다고 마음을 감추는 문화의 언어로 변질되었습니다.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도 죽어도 안 하겠다고 말하는 애증의 갈등 문학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마주 보면서 얘기할 때는 그 눈빛을 잘 보고 그 말 뒤에 숨어있는 말을 집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인류의 시작을 보세요. 하와는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주었는가? 사랑하기 때문에 나누는 기쁨으로 준 것입니다. 아담은 받아먹고 나니 하나님의 저주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면 아담은 “너 때문에 다 망한 거야!” 지독한 원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없이는 또한 살 수가 없습니다. 아담은 사랑과 증오의 갈등을 안고 하와의 외로운 손을 잡아주며 하나님에게 야단을 맞고 그토록 아름답던 에덴에서 서글프게 쫓겨나서 이마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살 수 있는, 해산하는 고통을 두려워하며 출산해야 하는 인간 고난의 최초 순례자의 길을 떠납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이러한 관계는 계속되고 있는데 오늘 말씀에 호세야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호세아의 고통은 계속됩니다. 자기를 떠나버린 고멜이 차라리 행복하게 산다면 그 행복을 자기 것으로 알고 인내로 견딜만합니다. 그러나 호세아를 떠난 고멜은 다시 매춘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호세아를 더욱더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매춘부라는 위치는 만인의 노리개요 장난감 취급을 받습니다. 선지자의 사랑을 받던 아내였던 고멜이 어둠의 길가에서 몸 파는 잡초로 타락한 현실을 호세아가 참을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처녀같이 아내같이 사랑했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도망가서 온 세상을 어지럽히는 바알 종교에 몸을 팔고 만국의 장난감 같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하나님이 지금 괴로워하신 겁니다. 예레미야의 말대로 “슬프다. 이성이여. 본래는 공주 같던 자가 조공 드리는 자와 같이 되었도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호세아에게 큰 고통스러운 작업을 시키십니다. 가서 고멜을 다시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데려오되 포주에게 빚이 있으니 그것을 네가 갚아주고 자유롭게 해서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고멜이 진 빛 은 15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배반한 죄인이지만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값을 지불해주고 해방의 선물을 주실 때 비로소 인간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와 능력입니다. 인간이 지은 죄의 빚을 하나님이 대신 갚아주시고 용서하여 주신 그 자체를 우리는 은혜라고 하고 이 개념은 거저 받았다고 하는 뜻입니다. 고멜같은 여자는 구원할 가치가 없다고 모두 생각할 터인데 하나님은 인간을 고멜로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남성들과 유대 남성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민족들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현재보다 과거를 더 중요시 한다는 것’입니다. 여인들은 현재 만족하면 과거 같은 것은 크게 문제를 삼지 않는데 남자들은 과거가 나타나면 그것 때문에 현재의 행복을 깨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존심의 문제인데 한국 남성과 히브리 남성의 자존심은 세계에서도 첫째, 둘째 갈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게일 선교사의 논문에 이것이 잘 반영되고 있습니다. 호세아도 유대 남자이니 자존심이 강합니다. 고멜을 다시 데려다 산다는 것은 죽기보다 더 싫은 치욕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호세아에게 그것을 명하셨는가? 하나님의 마음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돌아와도 그때만을 기다리신 듯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어떤 과거도 묻지 않으십니다. 돌아온 그 자체만이 기쁘신 것입니다. 우리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의 사랑은 분명한 철학이 존재합니다. 이기주의라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소원대로 될 때만이 사랑이니 정열이니 떠드는 것이지 실망을 주었을 때는 사랑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사랑하기로 선택한 대상을 향해서는 영원합니다. 그래서 언약의 하나님이요, 불변의 하나님입니다. 어떤 경우에 있다하여도 끝까지 찾아가서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그를 다시 사랑의 대상, 제자로 회복시키시는 그 자체가 구원입니다.

호세아는 이 일을 치르고 나서 히브리 민족에서 외칩니다. 6장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버리고 떠난 인간을 찾아나서는 하나님의 외로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존심은 십자가에 이미 다 못 박았습니다. ‘이래야 내 마음을 알겠니? 나는 너를 사랑하기 위해서 죽는 거야. 이것보다 더 큰 고통이 있다면 그것을 내가 당하겠는데 이것이 제일 큰 고통이라서 십자가를 지는 거야. 이제 내 마음을 보았으면 내게로 와. 나하고 함께 살아. 나와 함께 있으면 네가 있을 곳을 예비할거야. 다시 너를 데리러 올께.’ 이것이 기독교 진리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을 했을 때 내 마음은 어떤가? 그런데 ‘괜찮아! 오기만 하면 돼. 그것은 다 잊었어.’ 하나님은 나를 향하여 수백 번도 더 심각한 고통을 겪으신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내 품으로 돌아온 사랑하는 자여! 나와 사랑을 나누자.” 거기에 대한 인격적 응답을 “하나님! 저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 사랑이 영원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켜주옵소서.” 호세아는 이것을 우리에게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다소 힘든 부분이 있을지라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강한 손에 붙들려서 세상을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호세아를 통해서 들려주신 하나님 사랑의 속성을 저희들이 잘 깨닫게 하옵소서. 어떠한 힘보다도 가장 강열한 힘의 손으로 우리를 붙잡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세상을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또 한 주간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순례자의 길을 걷겠습니다. 저희들의 손을 붙잡아 주시며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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