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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위해 대가를 치룬 자 (눅 18: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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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위해 대가를 치룬 자
누가복음18:28~30

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동문서답이란 말이 있습니다. 동쪽을 묻는데 서쪽을 가르쳐 준다는 말로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 앞부분을 보면 동문서답이 몇 번 오갑니다.
예수님께 어떤 청년 관원 한사람이 나와 질문을 합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때 예수님이 참 이상한 대답을 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악하다는 말일까요? 그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이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계명을 지키라고 가르쳐 줍니다.
20절을 보세요.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성도 여러분! 정말 계명을 지키면 영생을 얻습니까?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얻어지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은 엉뚱하게 대답을 하십니까? 참 이상하지요? 왜 예수님이 정답이 아닌 대답을 하셨을까요?

하나 더 살펴봅니다. 주님이 계명을 지키라 했더니 이 관원은 뭐라 대답합니까? 21절을 보세요.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간음, 살인, 도적질, 거짓말, 부모 공경, 이것들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과 부모 공경을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라~ 나뿐 놈 하고 책망을 하지 않고 한수 더 뜨십니다. 
22절에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십니다.
정말일까요? 내게 있는 것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주님을 따라야만 영생이 있고 하늘의 보화가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영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일까요?
결국 그 관원은 부자인고로 이 말을 듣고 심히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과 이 관원은 동문서답을 서로 하게 된 것일까요?
왜 예수님은 이 관원에게 영생의 비법인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영생을 얻으리라” 하는 정답을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일까요?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이 관원의 질문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물음에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1)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으로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나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관원은 예수님을 선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대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가 나를 선한 선생으로 본다면 나는 선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선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네가 나를 선한 선생으로 믿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2)또 하나는 영생이 ‘행함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알고 무엇을 행해야 얻느냐고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뭔가를 행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관원은 뭔가를 해야만 얻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은 행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계명을 거론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1계명에서 4계명까지의 하나님에 대한 계명은 다 빼고 사람에 대한 계명 5계명서부터 10계명까지 6개중에 마지막 것은 빼고 5개만 거론한 것입니다.
주님이 계명을 언급한 이유는 지켜 영생을 얻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계명을 말할 때 ‘도저히 지키기 어렵습니다.’ 라는 답을 얻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 관원이 그렇게 답을 했다면 그때 주님은 “그렇다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네가 나를 믿으라. 그러면 네가 영생을 얻으리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관원의 대답은 정말 안타까운 대답이었습니다. 
뭐라고 했지요?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정말 다 지켰을까요?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이 청년은 그것이 거짓말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왜요?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정말 믿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자기는 철저하게 지켰다고 착각을 한 것입니다. 율법주의가 그래서 무섭습니다. 현실에서는 지킬 수도, 아니 지켜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외식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22절에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정말 한 가지만 지키면 완전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한 가지가 지켜져야 진짜 지킨 것이기에 그것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에 무엇입니까? 이웃 사랑입니다.
10계명의 요약이 뭐지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 둘째는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웃 사랑의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하니 한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요?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이 동문서답하신 이유를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행함으로 영생 얻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확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 믿음을 가장 크게 가로 막는 것이 탐심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가르치십니다.
왜요? 부자가 믿음생활하기가 정말 어렵기 때문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부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시대에 누가 부자일까요? 돈이 한 10억은 넘어야 부자소리 들을까요? 아마도 요즘은 50억에서 100억은 있어야 부자 소리 들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윗도 솔로몬도 다 부자입니다. 그분들은 천국에 못 들어갔을까요?

오늘 주님이 말하는 ‘부자’란 이 관원처럼 탐심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소유의 많고 적음이 부자와 가난한 자의 기준이 아니라 소유가 적어도 탐심이 많으면 하늘나라 들어가기 어려운 부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던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을 합니다.
“보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베드로가 말하는 게 뭡니까? 주님이 관원에게 말한 내용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들은 다 버리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번에는 정색하시고 말씀하십니다.
29절~30절을 보세요.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왜 주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른다.’고 하시면서 이런 무서운 말을 하시는 것일까요?
정말 주님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 부모, 지식을 버려야 할까요? 정말 그런 사람에게 금세의 복을 주시고 내세의 영생을 받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냥 해보는 소리일까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 자식을 버리셨습니까? 그러지 못했다면 우리는 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일까요?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일까요?

왜 가장 소중한 가정, 부모, 자식을 버리라고 하실까요?
이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가치의 우선순위를 올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는 우리 성도의 삶에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누리도록 세우신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왜 버려야 한다고 하실까요? 중요한 것은 누구를 위해 버리라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누가 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내 이름을 위하여’라고 했고 마가복음에서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결국 다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곧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버려야 한다면 버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치의 우선순위를 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버린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우선순위를 앞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성도가 일의 우선순위와 가치의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기를 원하시는 말씀을 성경에서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마10:37~39절을 보세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합당치 않다’는 말이 뭡니까? 올바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비나 어미보다 주님을 더 귀한 분으로 여겨야 하고 아들이나 딸보다 주님을 더 귀한 분으로 여겨야 한단 말입니다.
심지어는 자기 목숨보다도 더 귀하게 여겨야 할 대상이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여러분은 누가 우선입니까?
내 생명과 하나님? 아내와 하나님? 부모와 하나님? 그렇게 말하면 하나님이 우선이라는 것을 기본 상식으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러나 가치의 우선순위가 성경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분은 우리를 보고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내가 있어야 하나님도 있는 것이고 부모가 있어야 하나님도 있는 것 아니냐’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가치관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내 생명의 주인, 내 가정의 주인,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나도 없고 가정도 없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성경적 가치와 우선순위를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런 가치관이 정립된 사람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그는 비록 어부였고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바닷가에서 그를 부르실 때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도 애굽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왜요? 더 좋은 것과 덜 좋은 것의 가치가 분명하게 정립되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24~26절을 보세요.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여기 “거절하고”“더 좋아하고”“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라는 표현이 모세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이 자칫 잘못하면 가정파탄을 조성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뜻은 우리 성도가 돈을 의지하고, 권력을 의지하고, 부모와 형제와 가족을 의지하는 데 그런 곳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구원은 예수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따르는 자에게 있다는 말이다.

2. 가치정립의 가장 큰 방해 요소는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대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 가치관을 뒤흔드는 가장 강력한 요소는 뭘까요? 집, 아내, 부모, 자녀입니다. 어찌 보면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성도가 성경적 가치관을 올바로 세우는데 최고의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왜요? 내가 사랑하는 존재이고 내가 제일로 여기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내, 부모, 자식... 이것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실상 또 다른 면으로 보면 이것처럼 허무한 것도 없습니다.
아내? 수틀리면 이혼하고 원수 되잖습니까? 남남되어 버립니다.
부모요? 마찬가집니다. 어려서는 부모 없으면 죽을 것처럼 여기다가도 부모가 늙으면 귀찮은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온갖 것 다 주는데 자식은 부모를 귀찮은 존재로 여기는 시대입니다.
자식은요? 마찬가지입니다. 죽으라 기르면 다 자기 잘나서 성장한 줄 알고 떠납니다.
그런데도 다들 내 자식만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 착각하고 온갖 정성 다 바쳐 목숨 걸고 가르치고 수고하고 계십니다. 그러다가 나중에서야 헛되고 헛되다고 고백하며 후회합니다.

세상에서는 가장 소중한 것이 가족이고 부모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소중한 것은 하나님인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말 소중한 존재가 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분별치 못하면 어리석은 사람 되는 것입니다.
왜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버렸나요?
왜 에서가 팥죽 한그릇에 장자권을 야곱에게 팔았나요?
다 가치 문제입니다. 가롯 유다도 예수님이 하시는 행동이 가치 없어 보이니 은30에 팔아버린 것입니다. 에서도 배고파 죽게 되어 장자권보다 팥죽 한 그릇이 더 귀해 보이니 그 짓을 한 것입니다. 결과는 망했습니다. 잘못된 가치를 따라 가다가 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미친 사람처럼 보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현시가로 1500만원어치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버린 사람 마리아를 보세요. 주님은 그 행위를 뭐라 하시나요?
마26:10에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애굽의 부귀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광야로 들어간 모세.
가말리엘의 제자요. 바리새인으로 총망 받던 젊은이로서 가문과 영예를 버리고 주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한 사울,
어찌 보면 전부 미친 사람들이지만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선교지에 나간 선교사들을 볼 때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국내에 머물고 살면 가족과 친척과 함께 넉넉히 평안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인데 왜 다 버려두고 언어 다르고 문화 다른 그곳에 와서 살고 있을까요?
이번에 순교한 배형규 목사와 그 일행, 한국에 있으면 그런 일 당하지 않고 편하게 살고 있었을 텐데 왜 비싼 돈 들여가며 그 무식하고 도적놈 같은 나라에 가서 그런 일을 당했을까요?
이유가 하나 있다면 이것이 주님이 귀히 여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귀하게 여기는 일이기에, 주님이 이 일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셨듯이 그들도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이 정신없는 짓이라 하고 무분별한 짓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과연 주님도 그러실까요?

갈 형편이 되면 가고, 갈 형편이 안 되면 가지 말아야 할까요? 그렇다면 우리나라 옛날 조선은 더 위험한 나라였고 더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와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했기에 이렇게 우리가 구원을 누리고 복을 누리는 것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합정동 선교사 묘지에 가보신 분들은 아시지요? 그들이 왜 그렇게 이 땅에서 숨을 거두었을까요? 그들이 세상적 기준으로는 미친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사명을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치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에게 있어서 주님과 복음 그리고 교회는 어떤 존재입니까?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하고 여러분의 목숨보다 귀한 존재로 여기시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나 부모지식이 그 가치관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이것만 바로 세워지면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어떤 복을 주나요?

3. 가치의 우선순위가 바로 되면 금생과 내생에 엄청난 복이 있음을 약속하십니다. 
금생은 이세상입니다, 내생은 다음 세상인 하늘나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대가를 치른 자에게 엄청난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왜요? 그분은 가치관이 바로 된 자에게 상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셨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상을 주신다고 얼마나 많은 약속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누구에게 상을 주십니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요. 하나님께 온전한 충성을 한 사람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알지 못하면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가치를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코드가 맞아야 합니다. 생각이 일치 되어야 하고 목표와 가치가 일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치 공유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차고 넘치도록 주시고 30배 60배 100배 이성의 복을 주십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만물이 하나님 손안에 있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차고 넘치도록 부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6:38을 아시지요?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똑같은 내용인데 막 10:30 에서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공하는 지름길은 노력이 아닙니다. 공부 많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 가치를 올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정말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그것에 내 시간과 생명과 정성을 쏟으며 대가를 지불하면 하나님은 그를 세우실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최일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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