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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빼앗길 수 없는 더 좋은 몫 (눅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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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빼앗길 수 없는 더 좋은 몫
본문 : 누가복음 10:38-42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눅 10:41하-42상)

  마케팅 전문가이며 비올라 대학의 교수인 ‘죠지 바너’는 21세기를 예견하는 특성중 하나로서 ‘너무 바빠진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도 바쁘고 분주함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주하고 바쁜 생활은 많은 염려를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마르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 살고 있는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집을 찾으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일행을 접대하는 일에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준비하는 일의 규모가 너무 크고 많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중에도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이러한 마리아를 보고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마르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신앙생활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바쁜 생활의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과 나누는 즐거움입니다.
  나의 분주함은 무엇 때문입니까? 나의 분주하고 바쁜 생활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분주한 생활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즐거운 시간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좋은 편은 하나님과 함께하며 그분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지키는 의의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배의 시간이나 기도하는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명상하는 시간들과, 주님을 위하여 충성하는 시간들의 의의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될 때에 소중한 것들이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 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은 가치 있는 일을 행하기에 앞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역사입니다. 위대한 일을 성취하고자 하는 노력이전에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더욱 중요한 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며 함께하는 삶이 먼저입니다. 그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부모의 꿈의 성취 대상으로만 여길 때에 그 관계는  목적성취의 과제만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함께하는 즐거움입니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잃어버릴 때 가정의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함께하시는 관계이고 나눔이고 교제입니다. 함께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시는 관계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먼저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엇을 하라는 말씀이전에 함께하는 관계성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1)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사55:3)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사55:6,7)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사36:6,7)

  이러한 모든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관계 속에 사귐과 교제를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먼저 원하십니다. 마르다의 분주한 접대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먼저 있어야 할 ‘족한 한 가지’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함께 말씀을 나누시면서, 함께 기쁨을 나누시고 즐거움을 나누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우선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미국 남북전쟁 시에 링컨 대통령의 참모가 “하나님이 우리 편(북군)에 계시기 위해 기도합시다.” 고 요청했습니다. 이 때, 링컨은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하여 기도하도록 합시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함은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만들어주는 요인이 되기에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즐거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림과 함께 섬김의 삶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하는 즐거움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한 섬김의 삶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눔의 즐거움이 없을 때, 섬김의 생활이 불평과 원망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마르다의 문제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동생에 대하여 불평하고 원망하였습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옵소서.”(새 번역)

  하나님과 함께함의 즐거움은 불평과 원망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함의 즐거움은 기쁨으로 참여하는 섬김의 일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전해주는 말씀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2:44-46)

  초대교회 교인들의 생활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소유를 팔아 나누어주고, 기쁨으로 교회를 섬기는 희생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떠난 수고는 염려와 불평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으로 발전되기에 자기과시에 예민한 자기 섬김이 되게 됩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드러나지 못할 때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신앙은 기쁨의 섬김으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겸손과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즐거움은 우리로 섬김의 생활을 이루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가치 있는 사람으로 승화시켜 줍니다. 나의 장점이자 단점까지도 가치 있는 것이 되게 해 줍니다. 베드로의 급하고 과격한 성품, 바울의 냉철한 성품, 요한의 불같으면서도 침착한 성품, 모든 것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성품이 될 때, 가치 있는 특성이 되었습니다. 이사야와 아모스는 대조적인 성품과 환경을 가지고 있었을 지라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될 때, 모두가 소중한 것이 되었습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알링톤 국립묘지(Arlington National Cemetery)에 가보면 ‘죤 F. 케네디’ 대통령의 묘가 있습니다. 미국의 35대 대통령으로 43세에 암살된 ‘죤 F. 케네디’ 묘소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상징하는 불이 있고, 맞은편 왼쪽에는 동생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의 묘가 있는 데, 그곳에는 솟아 흐르는 물이 있습니다. 이 불과 물은 두 사람의 성품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의 성품이 대조적인 성품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치 있게 쓰여질 때, 역사에 귀중한 것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마르다에 비해 이기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언니의 일을 돕지 않고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었기에 그것이 ‘족한 한 가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성품이 모가 나는 지나친 것일지라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될 때, 그 성품의 특성은 가치 있고 귀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하지 못할 때, 그 성품 자체가 그 대로 남아 추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즐거움은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필요한 것이 되게 하기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은 어느 무엇에도 빼앗길 수 없는 지속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쁘고 분주한 집안분위기를 알면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하는 관계의 삶을 다른 무엇에 빼앗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아버지가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관계의 삶을 빼앗기지 않으시고자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는 그 일도 하나님과 함께하심으로 감당하는 일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시간보다 예수님을 접대하는 일에 더 분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앞서야 할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얄미울 만큼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자리를 떠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마리아의 모습을 더 중요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강조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즐거움을 빼앗겨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은 절대로 빼앗길 수 없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함의 즐거움은 신앙의 생명이자 출발이며. 우리의 섬김의 삶을 바로 붙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마르다와 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기도하기만 하면 뭘 해, 교회 나가기만 하면 뭘 해,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하는 말을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곳에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잊어버린 모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즐거움의 관계를 상실한 형식적인 예배나 신앙의 행위도 우리는 배격해야 합니다. 물질모음, 명예획득, 목표성취나 성공보다 앞서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즐거움은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과 함께 생각하고, 하나님과 함께 느끼고, 하나님과 함께 행동하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활이 되도록 하십시오. 우리의 삶에 하나님과 관계하는 즐거움의 시간을 중요시 하십시오. 이것을 빼앗기거나 잃어버리지 않고 지속하도록 하십시오.

  우리교회가 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표현하는 공동체임과 동시에 섬김의 곳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드러내는 곳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곳에 하나님과의 즐거움이 생활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즐거움을 드러내는 것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솝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토끼가 야자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우르릉 쾅 하는 소리에 토끼는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서 달아나기 시작 했습니다. 무르익은 야자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졌던 것입니다. 토끼는 무슨  영문인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세상의 종말이 왔나보다 생각하고 도망을 친 것입니다. 토끼가 달리는 것을 보고 여우도 달리고, 그 뒤를 사슴이, 그리고 원숭이가 뒤따랐습니다. 이리하여 산짐승들은 모두 다 토끼를 뒤따라 죽을힘을 다하여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한 짐승이 무슨 일로 이렇게 달리느냐고 물었습니다. 원숭이는 사슴이 달려가기 때문이라고 했고, 사슴은 여우가 달려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토끼에 이르자 토끼는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소리를 듣고 도망치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위는 뛰기 전의 모습그대로요, 아무런 종말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짐승들은 토끼가 낮잠을 자던 곳으로 함께 가보았습니다. 그때야 그 소리는 야자열매 떨어지는 소리였음이 밝혀졌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바쁘다 바빠, 하면서 바쁘고 분주하게 뛰고 있습니다. 왜 바쁜지도 모르면서 바쁘니까 덩달아 바빠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경제위기다. 경제위기다, 하니까 덩달아 경제위기의 숨 가쁨 속에 염려와 근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그리고 좋은 편을 택할 것과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많은 일로 분주하고 바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십시오. 그리고 내게 만족한 한 가지, 하나님과 함께하는 관계와 나눔의 즐거움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인하십시오. 우리에게 족한 한 가지, 더 좋은 편, 더 좋은 것 찾으십시오. 그리고 간직하십시오. 이것을 결코 빼앗기지 않고 지속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행복자이며 승리자가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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