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교회는 지금 치료중! (엡 2:19-22)

  • 잡초 잡초
  • 393
  • 0

첨부 1


교회는 지금 치료중!
에베소서2:19-22

I. 약점 없는 사람 없듯이

어떤 목사님이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여러 날 금식기도를 드린 후에 산을 내려오는데 몹시 배가 고팠습니다. 저만큼 원두막이 보였습니다. 원두막에 갔더니 주인이 없어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도 배가 고파 주인이 오면 돈을 주자 생각하고 토마토를 하나 따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참외 하나, 수박 하나를 쪼개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서산에 넘어가는데도 주인이 나타나지를 않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냥 내려왔습니다. 목사님은 본의 아니게 도둑놈이 된 것입니다.

그 다음날 새벽에 목사님은 교회에서 은혜스럽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을 다 보내고 묵상하며 기도하는데 자꾸만 하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네 눈이 범죄하거든 네 눈알을 빼 버려라." "하나님, 이놈의 눈이 토마토를 보니 주인은 없는데 그만 먹고 싶어서 먹었습니다. 수박도 쪼개서 먹었습니다. 이 눈을 빼야 할까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눈알만 뺄 일이 아니다. 네 손이 수박을 쪼갯으니 손도 잘라라." "하나님, 손을 자르면 어떡합니까?" "아니다. 네 발이 뚜벅뚜벅 남의 수박밭에 들어갔으니까 발도 잘라야 할게다." "하나님, 발까지 자르면 어떡합니까?" "아니다. 그 수박이 네 목을 타고 내려갔으니까 목도 잘라라. 아니다. 네가 먹은 수박이 온 핏 속에 지금 흐르고 있으니 네 피를 다 뽑아라." "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 결국 이 목사님이 금식기도 한 것보다 남의 밭의 수박 따먹고 더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완전해야 은혜 잘 받는게 아닙니다.

이 땅에는 완전한 사람도 없고 완전한 가정도 없고 완전한 교회도 없습니다. 약점 많고 허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이 땅 입니다. 그래서 서로 용서하고 서로 덮어주고 서로 감싸주어야 살 수 있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이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에서 중소기업을 하던 이 아무개 씨는 서울에서 전통적인 한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아내를 따라 교회를 다녔지만 신앙 생활이 깊어지면서 교회의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오면 사랑 받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친한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있었습니다. 사회적인 위치도 있고 하여 교회 임원의 역할도 해보고 싶은데 오래 다녔다는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안줍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직하게 살아야 되는 줄 알았는데 자신도 그렇게 살기가 힘이 들고 또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니 예수믿는 사람들도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안믿는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교회에는 용서가 있으리라 믿었는데 교회안에서도 투닥 투닥 싸움하는 소리가 가끔은 들려 옵니다.

아예 발을 쑥 빼고 냉소주의자가 되어 구경꾼처럼 신앙생활을 하던 차에 일산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집 앞에 마침 크지 않은 교회가 있어 등록을 하게 되었고 등록을 하자 마자 교회의 감투란 감투는 다 씌워 줍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일이냐? 목사님과 손발이 척척 맞습니다. 목사님을 도와 내가 바라던 그 아름다운 교회를 이제 만들어 봐야지. 그런데 웬걸 1년이 채 되지 못하여 상처를 받기 시작합니다. 목사님도 이 사람이 내 목회에 걸림돌이구나 실망을 합니다. 서로 기대치가 높았던 만큼 크게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지요.

딴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첫 예배 첫 설교부터 맘에 들지가 않습니다.
이 일로 부부 싸움이 잦아 졌고 부부가 합의하여 당분간 교회에 가지 않고 가정예배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 가정예배에 무슨 은혜와 임재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가정예배도 몇 주 드리다가 흐지부지 되고 맙니다.

그래도 교회를 버리기엔 신앙이 들었습니다. 교회를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딘가에 좋은 교회가 있겠지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천국에서나 있을 법한 그 이상적인 교회를 찾아 오늘도 헤매어 봅니다.

그러나 어디에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나를 반겨주는 교인들도, 목사님의 환대도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고 교인으로 잡아 두려는 위선으로 보입니다. 여기엔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또 문제가 보입니다. 하루는 냉소주의, 무관심 주의가 되었다가 또 하루는 불평분자, 비판주의자가 되어 불행한 성도로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에 행복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의외로 우리 주변엔 이런 실패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원 못받은 것 아닌데 인생살이 신앙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실패자들 말입니다.

II. 자기 중심의 교회관

이 아무개 집사처럼, 초대교회 성도들도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천국이 건설될 줄 알았는데 거기서 아픔과 상처를 겪게 되었습니다. 교회 분열, 소외감, 갈등을 겪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교회를 비판하는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려 옵니다. 그러다가 정작 쓰러지고 넘어지는 사람은 비판하는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들이나 교회의 일원이 되면서 나름대로 교회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 교회는 저래야 한다" 마음대로 평가하고 비판했습니다.

오늘도 성도들이 교회에 올 때 자기 나름대로 교회관을 하나씩 가지고 교회에 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어 주어야 할 만큼 친절해야 한다. 교회는 구제를 많이 해야 한다. 큰 교회는 작은 교회를 돕고 선교를 많이 해야 된다. 교회는 크게 성장해야 한다. 또 반대편에서는 교회는 작아야 교회답다. 교회에 모일 때 큰 소리로 기도해야 교회가 뜨거운 교회요 좋은 교회다. 또 한켠에서는 교회는 신사적이어야 하고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야단스러우면 안된다.

자기 나름대로의 교회관을 가지고 교회에 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과 맞지 않으면 거의 무차별 사격에 가까운 비판을 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교회생활과 신앙이 위험 상태에 빠져듭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너희들이 살아온 삶이나 지금 살아가는 가치관이나 헌신 등이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전체적으로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곳인지, 왜 교회안에 연약성이 있는지, 왜 교회가 내 생각과 다른지 배워야 할 위치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문제가 신앙생활, 교회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제 갓 결혼식장에서 걸어나오는 신부를 대하듯이, 지금 막 엄마 뱃속에서 나온 아기를 대하듯이, 경외감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대하지 않으면 그 고결함을 손상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생각입니다.

신학생 때는 세상 모든 교회들이 다 때묻어 보입니다. 선배 목사님들이 속물로 보입니다. 그래서 신랄하게 교회를 비판하고 목회를 평가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목회현장에 나와 목회를 해보면 목회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교인 10명만 모이면 거기 교회관 10개가 있습니다. 그렇게 쉽지 않은 것이 교회요 목회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성장하는 교회에 이유가 있구나. 겸손해 집니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회가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한 교회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 혼란을 겪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상의 교회, 지역교회가 완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서 생긴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천사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끊임없이 죄와 싸우는 부족한 죄인들이 초청받아 몰려온 곳이 교회입니다.

지상의 교회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교회에 허물이 있다고 연약성이 있다고 내 맘과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거기에 쉽게 화살을 쏘아대서는 안됩니다. 그 연약성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요? 그안에 모순되고 연약한 내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생활의 출발은 자기 생각 중심의 교회론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III. 교회는 병원이다

어떤 교회가 과연 이상적인 교회일까요? 신구약 성경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교회론을 다룬 책이 에베소서입니다.

교회를 몹시도 사랑했던 칼빈은 66권 가운데 에베소서를 가장 좋아했다고 합니다. 장로교회 창시자 죤 낙스는 말년에 칼빈의 에베소서 강해를 읽고 또 읽으며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콜릿지 같은 분은 "인간이 쓴 책 가운데 가장 신성한 작품이 에베소서다" 라고 말했습니다. 주경가 스코트는 "헨델이 영감을 받아 무릎꿇고 할렐루야를 작곡했다면 바울은 영감을 받아 무릎을 꿇고 교회가 무엇인가? 에베소서를 기록했다"고 격찬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 여러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는 이상적인 교회가 될 수 있는 소질을 가장 많이 갖춘 교회였습니다. 좋은 교회가 되려고 하면 창립자가 좋아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 창립자는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도였기 때문에 교회를 창립하고 또 다른 곳에 가서 세우고 다시 다른 교회를 향하여 떠나곤 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에베소 교회만큼은 교회를 창립한 이후 3년동안 목회를 했고 또 처음 멤버들에게 소중한 제자훈련을 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는 위치적으로 교회가 서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지역의 교통중심지였습니다. 당시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다이아나 신전이 세워질 만큼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고 당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가 에베소였습니다.

이처럼 에베소 교회는 훌륭한 교회론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목회자가 훌륭했습니다. 위치적으로 아주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가 보여주는 에베소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전혀 완전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에베소서를 읽는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을 주는 교회의 모습이 많았습니다.

교회는 빌딩이 아닙니다. 교단이 아닙니다. 조직이 아닙니다. 사람이 교회입니다.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바로 알려면 거기 모인 인간이 누구인가 바로 너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앞 귀절 2장 12절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오늘 본문은 그렇게 이어져 갑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19절)

(I) 주인 입장에서 보라.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천국의 외국인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교회의 손님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이 교회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손님은 권리가 없습니다. 책임도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관광객이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구경꾼이 아닙니다. 너는 무책임한 비판자가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고 책임진 주인이라는 겁니다. 이 교회를 섬길 하나님 나라 상급도 내 것이지만 이 교회를 섬길 책임도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II) 시민권자 입장에서 보라.

이어지는 말씀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소유했습니다. 천국의 좋은 것을 마음 껏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천국 영주권자(시민권자) 입니다.

미국의 영주권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중국에 있는 동포들 가운데에 우리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신약 성경이 기록될 당시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은 대단한 권세였습니다.

이 로마 시민권을 가질 수 있는 몇 가지의 길이 있었습니다. 첫째, 로마 시민권자의 자녀로 태어나면 자연히 로마 시민권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둘째, 로마 제국에 위대한 공헌을 해야 했습니다. 멀리 전쟁터에 나아가 영토를 점령합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바치고 영토확장의 공로를 인정받으면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습니다. 세 번째, 우리가 상상도 할 수없을 만큼 많은 재산을 로마 제국과 황실에 갖다 바치면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온갖 희생을 하고서라도 모든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로마 시민권을 얻기만 하면 대단한 권세를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권자는 로마 제국내에서만 보호를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의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나라에 있습니다. 이 시민권을 가지게 되면 금생과 내생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 시민권은 치안공무원이 있는 곳에서만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은 밤이나 낯이나 높은데 있으나 낮은데 있으나 고난 가운데 있으나 형통한 자리에 있으나 보호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면 억울한 일이 있을 때에 로마 황제를 찾아가 직접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의 시민권을 가졌기 때문에 천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그분, 역사를 운행하시는 그분, 만왕의 왕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찾아가 우리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 시민권은 그 당시만 유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천국 시민권은 영원히 우리 생명을 지켜 보호해 줄 것입니다. 천국에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권세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천국의 시민권을 얻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막대한 돈을 마친 것입니까? 우리에게는 그런 돈이 없습니다. 그런 돈을 가졌다 할지라도 천국의 시민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엄청난 공적이라도 쌓은 것입니까? 우리에게는 그런 공적이 없습니다. 그런 공적이 있다 할지라도 천국의 시민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천국 백성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죄 중에 태어나 죄를 먹고 마시며 죄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내가 구원받았습니다.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고귀한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 할지라도 황실의 가족은 될 수가 없습니다. 황제의 피를 받아서 이 땅에 태어나야 만이 황제의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거기엔 권세도 있지만 책임도 있습니다. 이 교회 안에서 당신은 가족으로서의 권세와 함께 가족으로서의 책임도 있습니다.

(III) 미완성

이에 더하여 오늘 본문 21절과 22절은 교회에 관한 놀라운 통찰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전이 되어가고(21절),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절)" 이 땅에 완전한 교회는 아직 없었습니다. 교회는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입니다. 미래형입니다. 이 땅에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그 완전한 교회,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중입니다. 교회는 성자가 모이는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여 성자로 인정받는 곳입니다. 교회는 천국이 아니라 병원입니다. 그래서 거기 모인 성도는 지금도 치료중입니다.

그렇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말하는 이상적인 교회는 병원이었습니다. 교회안에 아픈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 교만한 사람들, 혈기 많은 사람들, 거짓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입이 가벼워서 걸핏하면 다른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 교회 안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도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왜요? 내가 바로 그중 한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누구를 비판할 겨를이 없습니다. 교회에 흠이 있다고 마치 전교회가 다 타락한 것처럼 매도하거나 폄하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흠은 바로 당신 자신의 흠일 뿐입니다.

이제 교회에 대한 생각, 개념을 바꿉시다. 교회는 천국이 아니라 병원입니다. 만약 이 땅에 살아가다가 한 완전한 교회를 만나시거든 여러분들은 절대로 그 교회에 등록하거나 그 교회 교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 교회 한 멤버가 되는 순간 그 교회는 흠이 있고 아픔이 있고 갈등이 있는 교회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IV. 치료중

좋은 병원은 언제나 많은 환자들이 몰려와서 치료를 경험하는 곳입니다. 병원은 환자들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합니다. 딱히 돈을 많이 벌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병원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환자를 치료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환자들이 병원을 찾아와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병실만 차지하고 있다든지 오히려 병원에 갈때마다 병을 키워가지고 온다고 하면 그 병원은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그들이 교회에서 치료를 경험하고 변화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토막으로 짤라 놓고 보면 제대로 고침받지 못한 사람들 투성이 입니다. 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지상의 모든 교회들이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물론 교회는 흠이 있습니다. 부족함이 있습니다.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왜요? 이 교회 머리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갈기갈기 찢겨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지상교회는 하나입니다. 교파가 달라도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되게 하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연약하게 보여도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왜요? 그 교회안에는 영광스러운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너도 환자요 나도 환자입니다. 병원에서 안대하고 나오는 사람이 다리 부러진 사람보고 비웃지 않습니다. 팔 부러진 사람이 맹장 수술하고 나온 사람 비난하지 않습니다. 서로 용납하는 것이 병원입니다. 그것이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마지막 4장 32절에 보면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치료받는 분위가 되기 위해서는 가족적인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큰 교회안에서 은혜로운 예배를 경험함과 동시에 가족적인 소공동체 안에서 신령한 가족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엔 반드시 치료하는 사람들, 치료 받을 수 있는 치료현장이 있어야 합니다. 내 아픔을 자연스럽게 내어놓을 수 있는 자리 말입니다. 실수해도 용납이 되는 자리 말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바로 그 치료와 회복이 있는 소그룹 공동체를 셀이라고 부릅니다. 성공적인 교회생활을 위해서 성공적인 예배경험과 함께 성공적인 셀 경험이 당신에게 꼭 필요합니다.

V. 우리는 한가족(셀)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교회에 있는 사람들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고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한 몸이 되었습니다.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뿐만 아니고 영원한 가족이 되어 천국에서도 한 집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늘나라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의 몸입니다. 만왕의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교회는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 거룩하신 분의 신부의 얼굴에 상처를 낼 수는 없습니다. 신부의 옷을 찢고 더럽힐 수가 없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못나 보여도 소중한 주님의 신부입니다. 서로 귀하게 여기고 교회에 경외감을 가져야 합니다. 은혜스러운 예배, 은혜스러운 셀을 만들어 가는 것은 주님의 신부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를 극장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듯이 옆사람에게 신경쓸 필요없이 공연내용에만 집중하면 되는 곳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나 설교를 통해 나혼자 은혜를 체험하고 감동을 받으면 됩니다. 교회안에서 감동을 받는다는 것, 은혜를 체험한다는 것, 느낀다는 것,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그것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 혼자만의 은혜와 감동으로 끝난다고 하면 그 감동은 무책임한 감동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를 학원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 저것 여러 강좌를 개설해 놓고 내가 필요한 부분을 채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마치 백화점과도 같습니다. 좋은 물건 쌓아 놓고 손님이 필요한 물건을 사가도록 합니다. 교회가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 준다는 것은 귀한 일이지요. 그러나 교회의 본래의 모습, 본질은 아닙니다. 교회는 수단이 아니라 생명 걸고 지키고 섬겨야 할 내 인생의 목적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 나라 가족입니다(엡2:19). 모두다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한가족입니다. 가족은 위기 때에 서로 의지합니다. 아픈 사람들을 도와줍니다. 연약한 어린 자녀들을 잘 양육해 주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에 대한 이상이 분명해 졌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가족이다. 치료중인 병원이다. 서로 치료하고 서로 세워주고 서로 돌봐주며 만들어 가는 곳이다." 그래서 치료중입니다. 아직도 치료중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치료중입니다.

만일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 1년, 5년, 10년을 교회 다녀도 생활이 변화되지 않고 습관, 사고방식 가치관의 변화가 없다면 교회생활 잘못한 것이지요. 교회는 치료가 있는 병원입니다. 치료가 완성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머리를 치료하고 나면 손을 치료해야 되고 손을 치료하고 나면 다시 발을 치료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안에는 교회가 성장하고 대형화 되어지는 것을 원치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태도가 못됩니다. 성장을 원한다고 모두 성장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치않는다고 성장이 안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장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생명체가 건강하면 성장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속에 교회의 가족적인 분위기를 원하는 그 마음만큼은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름다운 마음이고 그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자리를 교회는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계속 커져야 하고 또 한편 계속 작아져야 한다고 외쳤던 릭 워렌의 말은 진리입니다. 교회의 공동체성, 가족경험, 심령의 치유 등은 작은 모임에서 가장 잘 이루어집니다. 셀 안으로 들어 가십시요. 당신의 셀을 만들어 다른 사람을 구원하고 도와주고 치료하는 자리까지 가십시요.

여러분 이 치유와 성숙을 경험하시기를 원하신다면 3명에서 12명 정도의 교우들이 모이는 셀의 일원이 반드시 되셔야 합니다. 아직도 셀 모임, 셀 생활의 행복을 모르고 교회생활을 하시는 분은 목사님들이나 우리 성도 누구를 붙들고라도 도움을 요청하십시요. 친절하게 도와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를 온전한 교회로 이해하지는 맙시다. 아직도 치료중인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치유가 활발히 일어나는 병원으로 만들어 가면 거기 아름다운 교회, 이상적인 교회가 있습니다. 목사도 치유를 경험하고 싶습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도 치유를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치부를 드러내고도 부끄럽지 않는 가족공동체를 만들어 가십시다.

이 자리에 모이는 큰 교회는 작은 셀교회가 감당할 수 없는 영광스런 예배와 찬양, 큰 힘이 필요한 선교, 성도들 훈련등을 담당할 것입니다. 이제 셀들이 저마다 흩어진 자리에서 온전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가도록 하십시다. 연약하고 모자라는 모습 그대로 신비한 교회입니다. 치료중! 그 모습은 지상교회의 이상입니다.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다가오고 나의 문제가 너의 문제로 함께 나누어지는 공동체, 셀 소그룹이 힘차게 살아서 움직이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 그 모습은 주님이 그토록 세우기를 원했던 바로 그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그 교회는 지금도 치료중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 치료를 맛보며 살 것입니다.
(류영모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