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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칭찬받는 교회 (살전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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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제 2차 전도 여행 중에 실라와 함께 세운 교회입니다. 당시에는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도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악한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울과 실라를 쫓아내기까지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그곳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바울이 떠난 뒤에도 데살로니가 교회에 핍박은 계속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한 번 데살로니가에 가려고 했으나 사정이 허락되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대신 디모데를 그곳에 보내어 사정을 알아본 결과 디모데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환란 중에서도 신앙의 동요를 받지 아니하고 인내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더욱이 저들은 형제를 사랑하는 형제애와 바울을 향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반대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근심거리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도덕적인 타락과 교직자를 존경하지 아니하는 것과 게으른 것과 재림에 대한 문제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돌아온 직후에 이 서신을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고린도에서 쓴 것으로 생각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아가야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고 있다는 데 대해서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울 때 일어났던 일들을 회상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로부터 데살로니가 교회는 칭찬받는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Ⅰ.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표징이 있는 성도들의 교회입니다.

본문 1장 4절에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에 대한 구약적 사유(思惟)는 선민으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의미가 초대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영적 공동체에 대한 호칭이 되었습니다.
택하심을 입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는 바울의 선택사상입니다. 선택 역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와 함께 병행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신약에 와서는 이 선택사상이 개인의 구원문제로 구체화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4-5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선택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다음과 같은 역사(work)가 있었습니다.

1)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믿음).
본문 1장 3절에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믿음에 의해서 영감된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선한 행위가 따르는 믿음입니다. 그들에게는

2)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사랑).
본문 1장 3절에 『…사랑의 수고와…』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랑의 수고』라는 말은 '절단하다', '채찍질하다', '애쓰다', '부수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랑의 기쁜 마음으로 수고하는, 넘치는 수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수고로운 봉사를 거절하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소유한 자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한 성도는 기쁜 마음으로 수고하기를 즐겨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어쩔 수 없는 고집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3)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과 인내가 있었습니다(소망).
본문 1장 3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소망으로 충만한 인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인내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고 해도 소망으로 인하여 계속해서 유지될 수밖에 없는 인내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궁극적으로 나타나는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믿음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수고하면서 소망 가운데 인내합니다. 칭찬받는 교회는 바로 이러한 역사가 충만한 교회입니다. 칭찬받는 교회는

Ⅱ. 주를 본받는 교회입니다.

본문 1장 6절에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본 받는 자』는 '모방하다', '따르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주님을 따르는 자'라기보다 '주님을 본 받는 자'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신약에서는 6회나 사용된 단어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 사도를 본 받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바울을 본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종으로서의 바울의 행위를 본 받는 것입니다. 그 행위는 복음으로 인한 바울의 열정과 수고를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을 본 받아 복음을 행동화 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환난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대주의 수구세력들에 의해서 그들은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경건한 삶에 대한 핍박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데 선동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기 동족들에게까지 핍박을 당하는 이중고를 겪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4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러한 외적 환경에 굴하지 아니하고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 어려움을 이겨내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24장 3절에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도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7절에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본 받는 것은 결국 주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본받고 주님에게 순종한다고 해도 잘못된 말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일에 앞서 달리는 주의 종을 따르는 것은 성도들의 지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으니』라는 말을 병행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환란 가운데서도 주와 사도의 가르침을 본받는 것은 칭찬 받는 교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칭찬 받는 교회는

Ⅲ. 소문이 나는 교회입니다.

본문 1장 8절에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고 했습니다.
여기 『소문』(잌스에르코마이, )은 '뛰쳐나오다'라는 의미입니다. 소문에 대한 사전적인 의미는 '전하여 들리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소문입니까?

1)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전파되는 복음의 소문입니다.
본문 1장 8절에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은 곧 복음입니다. 복음의 주제는 구원입니다. 구원의 결과는 기쁨입니다. 따라서 기쁨으로 인하여 구원이 확증을 받는 것입니다. 어떤 소문입니까?

2) 잘 믿는다는 소문입니다.
본문 1장 8절에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라고 했습니다.
잘 믿는다는 소문이 나는 교회가 칭찬받는 교회입니다. 기독교는 은닉되고 감추어진 어두움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공개되고 많은 사람 앞에 자신의 정체가 분명히 드러나는 밝음의 종교입니다. 어떤 소문입니까?

3) 각처에 퍼지는 소문입니다.
본문 1장 8절에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정치적으로나 상업적으로 각처에 소문이 퍼지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선행들이 드러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현대교회의 소문은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 정도가 아닙니다. 발달된 통신문화와 각종 매스컴의 대중 정보매체를 타고 얼마든지 각처로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소문이 나기에 너무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좋은 소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소문입니까?

4) 기대 이상이라는 소문입니다.
본문 1장 8절에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들의 신앙생활의 모범적인 것과 복음에 대한 열정에 대해 당분간은 더 이상 권면이나 걱정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복음전파의 열정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연보에 대한 칭찬을 연상케 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3절에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라고 했습니다.
힘에 지나도록 하니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소문입니까?

5) 여러 교회에 자랑으로 전해지는 소문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4절에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환란 중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수준을 여러 교회에 자랑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최근에 '칭찬은 고래도 춤 춘다' 는 책으로 인해 칭찬에 대한 기대가 유행병처럼 지나가고 있습니다. 무분별한 칭찬은 욕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누가복음 6장 26절에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미운아이에게 밥 한 숟가락 더 준다" 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칭찬할 것이 있어도 침묵하는 부모의 깊은 속을 아십니까?
옛말에 "도오선자 시오적(導吾善者 是吾賊)이요
도오악자 시오사(導吾堊者 是吾師)니라" 고 했습니다.
"나에게 착하다고 하는 자는 나에게 해로운 사람이고 나에게 나쁘다고 깨우쳐 주는 자는 곧 나에게 스승이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칭찬은 결코 가벼운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입에 발린 값싼 대중적 칭찬은 함정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잠언 27장 21절에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를 향한 사도 바울의 칭찬은 그의 속에 있는 감사가 기쁨으로 토해지는 진정한 칭찬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당했던 환란과 핍박은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는다고 했습니다(딤후 3:12).
반대로 경건하게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핍박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핍박이 많은 개인이나 교회는 그만큼 경건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원하는 대로 하면 아무런 핍박도, 장애도 받지 아니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성도라고 칭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칭찬 받는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택자들이 모여서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교회입니다(믿음). 사랑의 수고로 풍성한 봉사가 있는 교회입니다(사랑).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과 인내로 충만한 교회입니다(소망).

주께로부터 칭찬을 받는 교회는 주를 본받는 자가 있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주의 종을 본받는 성도들이 순종의 덕을 이루는 교회입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믿음의 소문이 나는 교회입니다. 각처에 퍼지는 소문입니다. 종들의 몸과 마음을 통하여 각처에 자랑으로 전해지는 소문입니다. 개인이나 교회가 잘 되려고 하면 소문이 잘 나야 합니다. 사람이 망하려고 하면 이미 소문이 잘못 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숨길 수 없는 목표를 향한 과정입니다.
환란과 핍박이 올 때는 그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러한 핍박과 환란을 피한다면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앞서간 신앙의 조부들은 그 누구라도 핍박과 환란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된다면 기꺼이 모두가 그 길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아야 합니다. 칭찬받기 위해 모든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① 그 칭찬은 복음으로 인한 칭찬이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18절에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칭찬 지향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② 그 칭찬은 하나님의 칭찬이어야 합니다.

로마서 2장 29절에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5절에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오직 갈보리교회는 그리스도 앞에서 칭찬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아 멘 -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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