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복과 꿈의 초점 (창 11:27-12:9)

  • 잡초 잡초
  • 350
  • 0

첨부 1


복과 꿈의 초점 (창 11:27-12:9) 

‘하나님의 백성’ 특강은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람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7장 4절은 데라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옮기셨다고 말합니다. 데라는 205세에 죽었고(11:32) 아브람은 75세에 하란을 떠났으므로(12:4), 아브람은 데라가 130세에 낳은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26절은 데라가 한 해에 삼형제 모두를 낳았다는 뜻이 아니라 70세부터 자녀를 낳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데라의 후예는 맏형과 60년 터울이 있는 아브람부터 언급되는데(27), 모세는 계보를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사람부터 언급했고 아브람의 삶도 의미 있는 사건을 중심으로 75세 이전의 삶은 생략하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매우 의미 있게 기록하게 하신 아브람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기 시작한 때부터였습니다. 12:1-3절 말씀은 “너는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명령과 “내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는 약속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 무조건 살던 곳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삭에게는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26:2) 하셨기 때문입니다. 지연과 혈연의 모든 터전을 떠나는 것은 아브람에게 명령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해야만 한다는 점에서는 아브람이든 이삭이든 동일했습니다. 그들은 현실적 보장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언약만 믿고 순종할 것이 요청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전적인 신뢰는 아브람의 믿음의 후손들인 모든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동일하게 요청됩니다.

아브람은 75세까지 불신 상태로 있다가 갑자기 이 말씀을 들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7:2-3절을 보면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으며 고향과 친척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일 땅으로 가라는 지시를 하셨습니다. 아브람의 고향인 우르는 이교적 풍속의 수메르 문화가 융성한 대도시었고, 그의 아버지 데라도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의 오물 속에 있던 아브람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참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아마 셈의 후손들을 통해서 구전되어온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의 도리를 배우고 익히게 하셨겠지요. 아브람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본토 친척을 떠날 만큼 신앙이 있었습니다.

11:31절을 보면 하란까지의 길은 데라가 주체가 되어 본토 친척이 있는 우르를 떠납니다. 반면 12:4절부터는 아브람이 주체가 되어 아비집까지도 떠납니다. 그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살았지만 자식 하나 없는 상태로 늙어버렸습니다(11:30). 하나님께 순종했더니 하나님께서 출세하게 하셨다고 내세울만한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하란에서 자신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다시 확인하고 변함없이 순종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으며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4-5).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때 따르는 약속이 히브리어로는 “너는 복이 될 것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복을 준다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를 복덩이가 되게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 시대 가나안 사람들의 관점으로 보면 아브람은 끝내 복을 받지 못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겨우 묻힐 무덤 몇 평을 얻었을 뿐이며 아들 한 명과 손자 두 명을 보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링컨처럼 마침내 대통령이 되거나 워너메이커처럼 백화점 왕으로 이름을 날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아브람은 참으로 복덩이가 되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의 눈에도 그는 참으로 복덩이입니다.

아브람의 믿음의 후손들인 성도들 역시 예수님 믿고 복을 받는 다기보다는 예수님 믿는 복을 받은 존재입니다. 불신 세상 속에서 성도는 ‘골칫덩이’요 ‘우환덩이’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복덩이’입니다. 불신자들은 신앙을 가진 후에야 성도가 참으로 복덩이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때까지 성도는 불신자들 틈바구니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믿음의 험난한 길을 인내하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아브람이 마침내 도착한 땅은 탁월한 신앙인 공동체가 아니라, 사악한 우상 숭배자들이 몽땅 차지하고 있는 땅이었습니다(6).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번듯한 정착지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불임이라는 아픔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텃세 속에서 하나님을 신앙하는 삶은 힘겨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비위를 맞추며 함께 있기도 원치 않았습니다(잠 24:1, 19).

7절을 보면 시련과 아픔의 때에 아브람은 더욱 하나님을 말씀에 집중한 듯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약속하셨습니다(7a). 또 다시 언약만 주어지고 눈에 보이는 증거나 가능성은 없었지만, 아브람은 그 약속을 감사하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았는데(7b), 공개적으로 여호와를 예배하기 시작한 모습입니다. 벧엘 동편으로 옮긴 후에도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구별된 모습을 보입니다(8). 그러면서 계속 남방으로 옮겨갔습니다(9). 아브람이 계속 거주지를 옮겼던 이유는 신앙을 감추지 않고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우상을 섬기는 가나안 사람들의 배척을 받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늘날 복이라는 말이 너무 남용되어서 성경적 복의 의미가 상실되었습니다. 내 힘으로도 약간 얻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훨씬 많이 얻게 되는 돈이나 명예 등을 복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내 힘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소유’를 통해서라기보다는 ‘존재’의 변화를 통해서 누리게 되는 삶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브람처럼 어떤 형편과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그분의 언약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복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알고 그분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여 성취한 가운데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복입니다.

젊은이들은 ‘복’이라는 말보다 ‘꿈’이라는 말에 더 매료됩니다. ‘비전’이라는 종교적 옷을 입혀서 세속적인 야망을 추구하도록 젊은 신앙인들을 선동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대도 말입니다(요일 2:15). ‘자기 부인’은 배우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에서 못다 이룬 ‘자기 야망’을 종교적 수단을 통해 충족시키려는 성도가 많아지는 이유 중 하나는 이처럼 초점이 빗나간 복, 혹은 초점이 빗나간 꿈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요즘 링컨과 워너메이커가 신앙인들의 꿈의 모델로 뜨고 있습니다. 그들처럼 되는 것을 복이라 여깁니다. 훌륭한 모델임에는 틀림없지만 여기에 올바른 초점과 빗나간 초점의 꿈들이 공존합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어서 그들처럼 대통령이나 백화점 왕이 되려는데 초점을 둔다면, 종교적 수단을 통해 자기 야망을 이루려는 빗나간 꿈입니다. 반면에 그들처럼 어떤 삶의 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말씀을 사랑하고 신실하게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데 초점을 둔다면 참된 꿈입니다. 성도의 꿈은 불신자들의 꿈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꿈의 초점’이 성경의 관점과 분명하게 일치해야만 합니다.

적어도 링컨과 워너메이커 자신들은 출세하려는 잘못된 초점으로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었던 것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주어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런 복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고서도 겸손히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었고, 백화점 왕이 되고서도 주일학교 교사의 직분에 성실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낙선하고 사업에서 망했을지라도 변함없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신실한 성도로 살았을 것입니다. 형편과 상황이 아무리 변해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그분의 뜻에 순종해서 사는 존재가 참으로 복된 존재입니다.

성도는 ‘지금 여기’(now and here)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지시하심을 사모하며 마침내 순종해내기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시는 모습에서 벗어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드러날 때마다 괴로워하면서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내일 저기’에서는 좀 더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맡겨주신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함으로써 더 큰 일을 맡겨주실 때도 충성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성도는 나의 꿈을 이루는 것보다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꿈에 관심을 두는 사람입니다.

아브람에 대한 첫 기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기로’ 결단할 때부터 하나님 백성은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이 시작되며,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로 했다면 75세의 늙은 나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위대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리석은 세속적 욕망을 복과 꿈으로 혼동하지 않고, 참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좇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