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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눅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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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누가복음 12:13-21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큰 힘을 붙들었느냐?"하는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힘의 원천이 돈인 줄 알고 있습니다.  물론 돈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이 힘의 원천이 될 수는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돈을 가리켜서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이 힘의 원천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도 힘의 원천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능력은 이것이니 여호와 하나님이시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힘의 원천이십니다.

다윗과 골리앗을 보십시오.  거대한 장수 골리앗이 보기에 다윗은 얼마나 가소로운 존재였겠습니까?  자신과 싸우러 나온다고 나온 것이 갑옷은 입지도 않고, 칼도 들지 않고, 그냥 아이들 장난감 같은 것 하나 달랑 들고 자신 앞에 서 있는 다윗.  그냥 한 손가락으로 툭 밀치면 나가서 떨어질 것 같은 가냘픈 어린 아이 다윗.

그에 비하면 육중한 체구에 엄청나게 위력적인 칼과 갑옷을 입고 떡 버티고 서 있는 골리앗.  육중한 체구와 목소리만으로도 이스라엘 군사들을 질리게 했던 거인 골리앗.

그러나 여러분, 골리앗에게는 세상의 권세와 힘은 있었을는지 몰라도 그에게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다윗에게는 세상의 권세와 힘은 없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결국 칼과 단창으로 나온 골리앗 앞에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갔던 다윗이 승리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전부를 가졌어도 하나님이 아니 계신다면 그는 전부를 잃은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의 엄청난 권세와 힘은 없지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힘을 붙잡으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탐내십시오.  하나님의 손길을 사모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을 사모해야 하는 이유는 역사를 이끄는 것도 하나님의 손길이기 때문입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도, 한 생명이 가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에 달려 있습니다.  한 국가가 일어나는 것도, 한 정부가 넘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에 달려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높이기도 하며 낮추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쓰시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버리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힘을 내 힘의 원천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힘의 원천을 소유할 수가 있겠습니까?  방법은 간단합니다.  능력이 있는 분과 교제하면 능력이 생깁니다.  힘을 가진 사람과 가까이 하면 힘이 생깁니다.

세상의 권력가를 조금만 알아도 안되던 일이 풀릴 수 있습니다.  명함 뒤에 소개 말 몇 자로 해결을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 세계도 매 한 가지입니다.  영적 세계는 특별히 능력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과 교제를 가진 사람은 깊은 능력과 힘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에게는 놀라운 힘이 있었습니다.  그 힘은 빌립보 감옥을 무너뜨렸습니다.  로마를 무너뜨렸습니다.  사람을 휘어잡았습니다.  환난과 궁핍과 고난 가운데 있었던 바울은 오히려 하늘로부터 온 놀라운 힘으로 훌륭한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늘의 힘을 가지고 있었던 사도 바울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 힘은 당대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의 힘 앞에서 외쳤던 엄청난 힘인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이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당대에 왕이었던 사울은 큰 힘을 가졌습니다.  세상의 권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 언덕 풀밭에서 양이나 치던 다윗에게 떨어졌습니다.  보잘 것 없었던 다윗에게 힘이 있을리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세우고 일으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유대 언덕 푸른 풀밭 위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교제 시간이 깊으면 깊을수록 강하고 담대한 용기가 나타납니다.  비록 지금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닐지라도 하나님과의 교제 시간을 깊이 갖는 사람은 결국에는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드디어 때가 왔을 때 다윗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물려들었습니다.  사울 왕에게는 권력이 있고 힘있는 자들이 모였으나 다윗을 따르는 자들은 죄 지은 사람, 살인한 사람, 먹을 것이 없는 사람, 도망 다니는 사람, 파멸한 사람,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든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이런 자들은 도저히 새 힘을 일으킬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역할도 감당할 수 없는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힘없던 자들이 하나님과의 생명력 있는 교제를 통하여 그 시대를 이끌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결과입니다.  한 시대를 이끌어 가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깊은 뿌리를 내리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진단 받고 그 분과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능력과 지혜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능력과 지혜를 공급받을 수가 있습니까?
마음에 탐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사실 탐심이라는 것은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죄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이 탐심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성경 본문에도 이 유사한 문제가 취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는 교사로서 인기가 대단했던 것을 오늘 본문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누가복음 12장 1절을 보시면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그러니까 수 만명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의 교훈을 청취했던 것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가르침이 한참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갑자기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툭 튀어 나와 예수님께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본문의 시작입니다.

본문 13절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아마도 형제가 있었는데 그 형제의 부모나 혹은 아버지가 졸지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재산이 두 형제에게 나란히 나누어져야 할 터인데 아마도 그 형이 동생 몫으로 돌아갈 유산까지도 자기가 착복해 버린 것 같습니다.

구약의 법에 의하면 장남인 맏아들은 언제나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갑절을 가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참 좋은 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장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제 아버지가 물려줄 게 없어서 제가 받을 이익이 없습니다.

본문의 이 형제는 형에게 3분의 2가 가고 동생에게 3분의 1이 가는 것이 합당했을텐데 아마도 3분의 1마저도 형이 가로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억울했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튀어나와서 그 억울함을 호소하게 된 것입니다.  내 형을 명령해서 유업을 나와 더불어 나누게 하소서.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주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우리가 이 말씀을 피상적으로 접근해서 예수께서 공정한 분배에 대한 관심이 없으셨다든지, 혹은 정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 말씀을 해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보다도 예수님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자로 그들 앞에 다가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이 형에게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동생,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의 동기까지도 살피시는 분이기에 그 형 못지 않은 동생의 마음 속 밑바탕에 깔려 있는 동일한 어떤 문제를 보신 겁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자기 것을 달라고 요구하는 동생의 마음 속에도 똑 같이 자리 잡고 있는 탐심이라는 그 문제의 뿌리를 주님께서는 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절인 15절에 보면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탐심의 죄악을 말하게 되면 우리는 흔히 부자들의 죄악을 얼른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탐심은 부자들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부자를 비판하고, 부자를 정죄하는 가난한 사람의 마음에도 똑 같이 탐심이라는 내적인 죄악은 여전히 존재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탐심에도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모든 유형의 탐심.  이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생명이라는 단어는 매우 독특한 단어입니다.  그것은 그냥 우리를 존재케 하는 생물학적인 생명이라는 단어가 아니고 이것은 어떤 기쁨 보람 의미 이런 것들이 어우러진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질적인 생명.  그러니까 이것을 세속화된 단어로 다시 바꿀 수가 있다면 사람의 행복한 인생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16절 이하에서 한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바로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께서는 탐심이라는 죄악의 정체를 규명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이 탐심의 죄악에서 해방될 수가 있느냐라는 해방의 비밀을 우리에게 나누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탐심은 어떤 죄일까요?  본문의 비유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서 생각하겠습니다.

첫째로, 탐심이란 우리의 이기심을 살찌우는 죄악인 것입니다.

비유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16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계속해서 17절에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이 부자의 독백이 시작됩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사랑하는 여러분, 이 짤막한 독백 가운데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단어 하나가 있었습니다.  어떤 단어입니까?  '나'라는 단어입니다.  일인칭 대명사가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내가 내 영혼에게...

우리 말 번역에서 적어도 여섯 번씩이나 나라는 단어가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원문에는 그 보다 훨씬 더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어리석은 부자의 의식 속에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 중심의 세계였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자기를 위한다든지, 또 자기의 이익을 추구한다든지, 혹은 자기를 존귀히 여긴다든지 그 자체를 우리가 정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위하는 것은 죄악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만 위하는 것, 이것은 죄악입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탐심이라는 늪 속에 빠져들어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탐심의 지배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단 우리가 탐심의 지배를 받게 되면 우리는 치유하기 어려운 병적인 이기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글에 병적인 이기주의자의 모습을 비유하기를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에 비유했습니다.  컨트롤할 수 없습니다.  이젠 질주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 많은 소유, 더 많은 것을 자기 손에 쥐기 위해서 계속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어리석은 부자에게서도 그런 경향을 읽어 볼 수가 있습니다.  18절에 보면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더 많은 물건, 더 많은 곡식 더 더 더...  이것이 바로 병적인 이기주의자의 삶의 모습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지옥을 묘사할 때 이 지옥을 다른 말로 무저갱이라고 말합니다.  무저갱.  무슨 뜻입니까?  바닥이 없다.  바닥이 없는 깊은 심연, 지옥은 끝없는 욕망의 세계, 그 욕망을 충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지옥에 가서도 '더 더' 하고 목마르게 소리치는 불만의 감옥이 지옥의 정체라고 성경은 그리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이기심이 끝없이 살찌우는 죄악 이것이 바로 탐심의 정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탐심은 어떤 죄악일까요?

둘째로, 탐심은 이웃을 향해서 문을 닫아버리게 만드는 죄악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에 나타난 부자의 독백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여기 이 부자의 독백 가운데 이웃이 고려된 흔적이 있습니까?  이웃이 언급된 적이 있습니까?  이 본문의 독백 가운데 당신이라는 말이 나온 적이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가 이 곡식을 어찌할꼬.  내 곡간을 헐고 내 곡식과 내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이 부자의 언어 속에는 당신이라는 말이 존재할 여백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 부자의 세계, 그것은 네가 없는 나만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명한 유대교 출신의 철학자 가운데 마틴 부버라는 사람이 쓴 '나와 너'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이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나는 존재한다는 겁니다.  당신이 있기 때문에 나는 존재할 의미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에 나타난 이 어리석은 부자도 나름대로 어떤 성공을 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이웃들의 참여와 이웃들의 도움이 있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세계에는 여전히 나밖에 없는 겁니다.  나만 잘 살면 그만입니다.  이웃은 살든 죽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웃에 수재가 나든, 어떻게 되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지금 21명의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아프가니스탄에 피랍되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들을 가리켜서 정신없는 놈들이라고 극언을 서슴치 않습니다.  저들 때문에 지금 나라가 얼마나 어려움에 처했느냐고 피랍된 저들과 교회를 향해서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막말을 하고, 악플을 달고, 욕을 하는 저들이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저들에게 이웃이라는 단어가 존재하기나 합니까?  3년 전부터 그곳에 병원을 세우고 자비량으로 의료선교를 하면서 낮은 자리에로 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저들에게는 이웃과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온 몸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이 지구는 60억의 인구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60억의 인구 가운데 약 10분의 1인 6억 정도는 매일 밤마다 채워지지 못한 창자를 붙들고 잠자리에 든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이 세상에는 날마다 약 4만명 정도가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는 100명 정도의 아기 가운데 40명 정도는 영양실조로 회복 불가능의 육체적 정신적 장애를 안고 한 평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매년 십 만명에 달하는 어린 아이들이 비타민A의 결핍으로 장님이 되어가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을 아십니까?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의료선교를 갔던 아프가니스탄의 그곳에는 4만명의 인구가 사는데 그들이 평생 의사를 만나본 적도 없고, 병원에도 가 본적이 없는 버림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구요?
그래서 나만 살면 된다구요?

우리가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을 읽어보면, 이 세상이 마지막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심판을 받는 최후의 모습을 가리켜서 성경은 바벨론이라고 부릅니다.  계시록 18장에 보면 이 바벨론이 무너지는 참담한 광경을 묘사합니다.  이 바벨론이 왜 무너질까요?

성경 학자들에 의해서 이 바벨론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시록 18장을 읽어보면 이 바벨론의 정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소유 중심의 가치관이 빚어내고 있는 이 세상, 특별히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로 대표되는 이 세상의 모습인 것이 현저합니다.

우리가 계시록 18장에 보면 이 바벨론이 망하는 마지막 순간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18장 15절 이하에 보면,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치부한 이 상품의 상인들이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 옷과 자주 옷과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

이 쾌락주의와 물질주의로 대표되던 세상 소유중심의 가치관을 벗어내지 못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무너지는 광경을 보여줍니다.  이 광경을 보여주면서 계시록 18장 4절에 보면 이런 경고를 합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우리가 이 바벨론적 생활방식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백성아, 내 백성들만이라도 이런 죄에서 나와라.  나와라.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주의적이고, 쾌락중심의 가치관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을까요?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은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훈련을 시킵니다.  그 중에 십일조입니다.  온전한 십일조 생활은 우리의 탐심을 물리칠 수 있는 하나님의 중요한 훈련의 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느냐, 물질을 더 사랑하느냐?'를 판별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차포를 다 뗀 이익의 십일조가 아니라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드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십일조에도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회식의 십일조가 요구되고 있었습니다.  이 회식의 십일조가 무엇입니까?  모두가 다 십일조를 가지고 와서 함께 먹는 겁니다.  나눔의 원리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또 매 삼년 마다는 구제의 십일조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옵션이 아니라 의무였습니다.

주님은 거의 의무로써 나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만 살면 된다구요?  그래서 탐심은 이웃과의 관계를 차단시키는, 이웃을 향해서 창을 닫아버리게 만드는 죄악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탐심은 우리 삶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망각하게 하는 범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포함해서 성경은 결코 물질의 필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또 성경은 가난이 미덕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또 부나 물질을 창출하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가룰 알고 그 주인의 뜻대로 그 물질을 선용할 줄 아는 분명한 가치관이 우리에게 확립되어 있는가를 성경은 묻고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고 만약 이 탐심의 노예가 되면 내가 물질을 부리는 자가 아니라, 물질이 나를 부리게 되면, 그래서 내가 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소유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탐심의 죄악 속에 빠집니다.  그리고 탐심의 죄를 갖게 되면 우리 눈이 멀어집니다.  안 보입니다.  인생의 판단이 흐려지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구약 성경에 민수기 22장을 보면 아주 재미나는 이야기 하나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해서 팔레스타인 지경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영향력이 소위 모압 지방에까지 확장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모압 사람들이 위협을 받습니다.

모압 왕 가운데 발락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발락 왕이 위협을 느낀 나머지 이스라엘 선지자 발람을 찾아갑니다.  발락이 발람을 고용을 했습니다.  뇌물을 줍니다.  뇌물을 주어 가지고 네가 이스라엘을 좀 저주하라 자기 민족을 저주하라는 겁니다.  처음에는 주저도 했지만, 뇌물이 들어오니까 눈이 뒤집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발람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나갑니다.  발람이 발락 때문에 발딱 뒤집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기 위해 갑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귀가 안 갑니다.  나귀가 낑낑거리면서 길을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귀는 자신 앞에 하나님의 천사가 길을 막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나귀는 보는데 발람 선지자는 그걸 못 봅니다.  선지자는 나귀를 두들겨 팹니다.  세 번씩 나귀를 두들겨 패니까 왜 패냐고 나귀가 소리를 지릅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느냐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디 보이느냐? 고 따집니다.  그때 하나님이 한 순간 선지자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 보입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뛰어 내려와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탐심에 젖어 버리게 되면 눈이 멀어집니다.  맹목적인 인간이 됩니다.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모든 기능이 상실됩니다.  그래서 탐심은 무서운 죄입니다.  나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 내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못 보게 만드는 죄악이 바로 탐심의 죄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저와 여러분이 이 탐심이라는 죄에서 해방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죄를 극복할 수가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날마다 확인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물질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어리석은 부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런데 이 장면이 아주 재미있는 장면입니다.  조금 전에 이 부자의 독백은 어떤 독백이었습니까?
내 물건 내 곡식을 어찌할꼬.  내가 곡간을 더 크게 짓고 내 곡간에 내 물건을 가득가득 쌓아두리라.  내가 내 영혼에게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자기 것이라고 소리칩니다.  내 영혼에게.

그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래, 다 네 거라고 생각하고 네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그 네 영혼을 내가 가져가리니 그러면 네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지금 소유권의 문제입니다.  누구거냐?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가 가져가겠어.  네 생명은 이제 끝.  그러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떠나는 사람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가시는 분을 보셨습니까?  세상에 태어날 때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태어납니다.  욕망을 위한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가는 날 우리는 쭉 펴고 떠나갑니다.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온 세상을 정복하고 더 정복할 땅이 없어서 울었다는 알렉산더도 두 손을 펴고 갔습니다.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그것을 미리 준비해야 됩니다.  내 것은 없다.  하나님이 잠시 맡긴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테레사 수녀를 잘 압니다.  테레사 수녀가 미국 순회 집회를 하는 도중에서 굉장히 부자인 사람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자가 테레사 수녀에게 말합니다.
"뭐 좀 도와드릴 것이 있습니까?  뭐가 제일 필요하십니까?"

이 말에 테레사 수녀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저요?  예수님만 필요합니다.  주 예수님만 필요합니다.  그분이면 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면 족합니다."

저는 이것이 진짜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구원이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가 소망인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가 능력인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가 내 소망이고 구원이고 능력이고 나의 꿈이고 나의 자랑이고 나의 기업이고 나의 피난처고 예수가 나의 구원이시라면 뭐가 더 필요합니까?

예수로 꽉 찬 인생, 성령충만한 인생, 그리스도로 꽉 찬 인생, 정말 그리스도가 나의 자랑이 되고, 그리스도가 나의 기쁨이 되어버린 인생이라면 누구나 지금도 이 고백은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십니다.  나는 부족함이 없어요.

이 탐심에서 참으로 자유한 인생, 이 자유의 삶이 여러분과 저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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