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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어나 벧엘로 가라 (창 3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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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일어나 벧엘로 가라 
♣본 문: 창세기 35:1~8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4년 12월, 연합군이 독일군을 공격하기 위해 작전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전이 독일군의 엉뚱한 책략에 의해 한동안 지연되는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심한 폭풍우가 내리는 밤에 미군 복장을 한 독일군이 미군 지프 몇 대에 나누어 타고 연합군 지역에 침투해 들어 왔습니다. 그들은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연합군이 세워 놓은 방향표시판들을 아무렇게나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은 악한 마귀가 즐겨 쓰는 전략입니다. 마귀는 종종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삶의 길에 방향표지판을 바꿔놓습니다. 그래서 혼란을 빚고 큰 곤경과 불행의 늪에 빠지도록 합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야곱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보여주신 삶의 방향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택한 방향은 벧엘이 아닌 세겜이었습니다. 세겜으로 향하면 모든 것이 편리하고 행복할 것만 같았습니다. 세겜의 뜻이“일부분”이듯, 하나님을 적당하게 섬기며 세상을 즐기며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기대한 행복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외동딸 디나가 세겜 성에 친구를 찾아 나갔다가 세겜 추장에게 겁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격분한 야곱의 아들들은 그 지역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은 이방인에 의해 몸을 더럽히게 되었고, 아들들은 손에 피를 묻힌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유혹하는 방향표지판을 따른 결과였습니다. 야곱은 참담한 실패를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야곱은 세겜에 머문 것을 한없이 후회하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다시 야곱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창세기 35:1)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에 대해 깊이 뉘우친 야곱은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겠다.”라고 굳게 결심을 했습니다. 이렇게 굳게 결심한 야곱이 새로운 각오로 세겜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벧엘을 향해 출발하는 내용이 본문입니다. 야곱은 어떤 각오와 어떤 모습으로 벧엘을 했습니까?

一, 야곱은 우상을 버렸습니다.

본문 4절에 기록하기를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했습니다. 야곱이 모든 가족들로부터 우상을 받아 상수리나무 밑에 묻었다는 것입니다. 세겜에 머문 야곱의 가족들은 그동안 세겜 사람들이 섬겼던 우상을 본받아 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악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제1계명과 제2계명이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물체를 섬기며 그것에게 복을 구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우상숭배의 배후에는 사탄의 꼬임이 있습니다. 우상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허상입니다.

우리나라 운전기사들은 사고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80%가량이 부적을 지니고 다닌다고 합니다. 과연 부적이 교통사고를 막아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교통사고율은 세계 1위입니다. 부적이란 종이 위에 아무렇게나 그려진 낙서에 불과 합니다. 종이쪽지가 인간에게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상 숭배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우상이란 하나님 외에 어떤 물체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만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귀하게 여기는 것은 모두가 우상이 됩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이 있는가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우상도 있습니다. 골로새서 3:5에는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이 벧엘을 향해 가다가 세겜에 머문 까닭은 탐심이었습니다. 창세기 33:17에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했습니다. 이러한 탐심의 우상은 야곱의 삶에 큰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상숭배는 자기 스스로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24에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하셨습니다. 이처럼 재물에 대한 지나친 탐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계실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탐심의 결과에 대해 맑히시기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 6:10)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의 경우가 이와 같았습니다.

뒤늦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깊이 뉘우친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눈에 보이는 우상과 탐심의 우상을 모두 버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은 모두 거두어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고,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탐욕으로 가득했던 마음은 고쳐먹었습니다.

세겜에 머물며 섬겼던 우상은 야곱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했고 화만 가져왔습니다. 가족들이 정성것 섬겼던 우상도, 많은 물질만 소유하면 더 큰 행복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탐심도 결국은 화를 불러왔습니다.

어느 교회의 한 성도가 세례 받는 날 교회 마당 종탑아래에서 삽으로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목사님이 “성도님, 거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오늘은 제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날인데 신앙양심에 거리끼는 담배, 라이터, 화투, 술병 이런 것들 다 십자가 밑에 묻으려 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상은 하나님 앞에서 땅속에 묻어야할 쓰레기입니다. 물질에 대한 탐심도 하나님 앞에서는 묻어야 할 몹쓸 마음입니다. 불순종하는 내 고집 교만도 하나님 앞에서 묻어야 할 잘못된 마음입니다. 야곱은 이러한 것들을 모두 땅속에 묻었습니다. 죽여 장사지냈습니다. 혹 우리들에게는 야곱처럼 땅속에 장사지내야 할 우상이 없습니까?

二. 야곱은 자신을 정결케 했습니다.

본문 2절에 “자신을 정결케 하고...”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정결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베드로전서 1:16)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성결해야 합니다. 깨끗함을 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깨끗함을 위해 맑은 물을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혼의 깨끗함을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벧엘 즉 하나님의 집에 나오는 사람, 하나님의 영원하신 처소인 하늘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은 깨끗해야 합니다. 육신의 삶도 깨끗하게 정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토요일은 오전 근무로 일을 마칩니다. 이것은 주일을 위해 준비하도록 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요즘은 하나님이 축복이 넘쳐나기에 주 5일만 일을 해도 넉넉하게 살아갈 정도입니다. 요즘 직장인들은 금요일만 되면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갑절로 늘어난 휴일을 즐기기 위한 계획과 기대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또 다른 죄악입니다. 안식일 즉 주일을 지키는 것은 제4계명입니다. 하나님은 주일을 어기는 경우에 대하여 진노하십니다. 느헤미야 13:18에 “너희가 오히려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함이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주일은 하나님이 정하신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은 심령이 깨끗해야 합니다.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회개하면 그 피가 우리를 정결케 합니다.“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이사야 1:18)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죄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버리는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지은 많은 죄로 인해 늘 괴로워하는 한 사람이, 나이 많은 한 수도사를 찾아가서 하나님은 자기같이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회개하면 받아 주실지를 물었습니다. 수도사는 그에게 “당신은 옷이 찢어졌을 때 그것을 버립니까?”“아닙니다. 그것을 다시 수선해서 입습니다.”“당신은 돈이 찢어지면 그냥 버립니까?”“아닙니다. 다시 붙여서 사용합니다.”그러자 늙은 수도사는 그에게 말하기를“당신이 옷에도 그렇게 신경을 쓰며, 돈도 그 가치 때문에 찢어진 것도 버리지 않고 다시 붙여 사용하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어찌 깊은 애착을 갖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람이 어찌 찢어진 옷만 못하며, 찍어진 화폐만 못하겠습니까?”라고 대답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고쳐서 쓰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에는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목수는 새로운 물건을 만들기도 하지만, 고장 난 것도 잘 고칩니다. 목수이신 예수님의 공생애는 고장 난 영혼을 고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고장 난 심령들을 고치셔서 하나님의 고귀한 일에 쓰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하여 깨끗하면 하나님께서 귀하게 들어 쓰십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그릇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디모데후서 2:20-21)하셨습니다.

올해는 우리나라에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벌써부터 대통령 후보를 뽑는데 관심이 많습니다. 후보들마다 미래지향적인 공약을 두고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약점이나 실수, 지난날 잘못을 들춰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깨끗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깨끗한 사람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역이용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더욱 깨끗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우리도 야곱이 회개하는 것처럼 회개하므로 깨끗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벧엘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三. 야곱은 의복을 바꿨습니다.

본문 2절 끝부분에 야곱이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의복을 바꾸라”고 했습니다. 그 동안 야곱의 가족들은 세겜에서 살면서 세겜 사람들이 즐겨 입는  옷을 입고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이것을 벗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경우와 처지에 따라 분위기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로, 상가에 가면서 화려한 옷을 입거나 혼인 잔칫집에 가면서 누추한 옷을 입는 것은 실례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성전에 나오는 사람,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은 경건한 옷차림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옷을 입으며 준비하는 과정부터 예배에 임하는 마음과 자세가 다르게 됩니다.

오래전 예비군 훈련장에 정신교육강사로 갔던 때가 있었습니다. 여름방학기간이라 훈련 대상자는 모두 초, 중, 고등학교 선생님들이었습니다. 복장은 모두 훈련복인 얼룩무늬 예비군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참 묘한 것은 모든 사람들은 전혀 선생님 같이 행동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데나 그냥 않고, 아무데나 담배꽁초를 버리고, 아무데서나 소변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똑같은 일반 예비군이었습니다. 제가 곁에 있던 대대장에게 묻기를“선생님들 같지 않습니다.”라고 했더니 그 대대장이 “예비군 옷 입혀두면 똑 같아요.”라고 해서 같이 웃었습니다. 옷은 단순히 몸만 가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행동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교육하는 교재가운데 “예배드리는 자의 복장”에 대해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예배는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을 만나 뵙는 시간이므로 가장 아끼는 옷, 깨끗한 옷을 입고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예의입니다. 지나치게 노출된 옷이나, 화려한 장식품은 타인의 이목을 위해 삼가 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옷이란 이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라디아서 3:27)고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2~24)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옷이라 표현했습니다. 경우와 처지에 따라 입어야 할 옷이 있듯,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해야 할 언어가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해야 할 행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변화된 삶을 살아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열심히 살아가던 야곱이 길 잃은 양처럼 방향을 착각하여 세겜에 머물렀습니다. 야곱은 전적인 순종이 아닌 일부분의 순종을 하면서 행복을 기대했습니다. 야곱이 꿈꾸던 행복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한없이 후회하며 괴로워하고 있던 야곱에게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시기를“일어나 벧엘로 가라.”하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인자하신 말씀을 따라 벧엘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야곱은 세겜을 떠나면서

첫째, 우상을 땅에 묻었습니다.
둘째, 몸을 정결케 했습니다.
셋째, 의복을 바꾸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본문 5절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심으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멈추었던 하나님의 보호가 다시 계속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벧엘, 즉 교회를 중심하여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벧엘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의 삶은 어떠한 것입니까?

첫째, 야곱처럼 우상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야곱처럼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야곱처럼 구습을 좇던 옛 사람의 삶은 더러운 옷을 벗듯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아무도 해하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존귀하게 들어 쓰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넘치도록 축복하십니다.

야곱의 삶을 거울삼아 결단할 것은 결단하게 하시며, 이 결단이 삶에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성령님이 역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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