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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호 11:1-11, 골 3:1-11, 눅 12: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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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1.  평생을 두고 자신을 괴롭히는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40살이 되기까지 이 상처는 이 사람의 인생을 온통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그 상처를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 부둥켜안고 있는 동안 상처는 더욱 더 확대되어갔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아픈 과거를 똑바로 직시하면서 자기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을 용서하고 났을 때 비로소 치유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도달하기 까지 그가 믿음으로 결심하고 실천한 것이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더 이상 아픔을 느끼지 않을 때까지 용서하고 또 용서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렘31:8말씀대로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아무리 결심하고 다짐해도 자신이 이런 현실에서 너무 약하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여기서 그는 머리가 깨끗해지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과거로 돌아가는 문을 닫고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날들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4가지 교훈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1) 희생자로 사는 것을 거부하라고 했습니다. 그 자신이 괜히 다른 사람의 동정심이나 기대하던 생각을 버리고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치유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셨습 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과거와 단절하고 열려진 미래를 향하여 방행전환을 했습니다. 이 방향전환이 회개입니다.

  (2) 문제를 그 자체에 국한 시키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엄청난 상처를 남겨준 사람이 있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건은 단지 그 사건일 뿐이라고 생각했을 때 사탄이 우리의 아픈 과거를 이용하여 미래까지 망치려는 시도를 차단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3) 우리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약은 “완전한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뿐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배웠을 때, 체험했을 때, 아픈 상처를 숨기려고 했던 불안, 그것이 들어날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자신을 단단히 묶고 있던 사슬이 끊어진 것입니다.

  (4) 이제 단지 내가 하나님께 치유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은 우리 주변에 상처받은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라고 하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기 문제에서 벗어나서 이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우리 손을 내밀 때 이미 받은 은혜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더욱 풍성하도록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있는 자에게 더 주신다.”는 주님의 원리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결혼을 하고 나서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첫째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므낫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고난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아픈 과거와의 결별입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을 낳고는 그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축복된 미래를 향하여 새 출발하는 뜻이 있습니다. 이런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은 애굽을 흉년에서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큰 역할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과거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가 혼란하고 미래가 늘 불투명합니다. 오늘 우리 개인적으로도 과거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그것이 현제의 나를 얽어매고 미래를 향한 나의 인생행로에 엄청난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우리는 과거라는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2.  오늘 구약본문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아들”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사랑하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호11:1에 “애굽에서”라고 하는 말은 단지 그 옛날 모세를 통해서 출애굽한 그 역사적 사실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거쳐 내려오면서 계속 하나님을 거역하므로 당한 여러 가지 고난을 통틀어서 하는 말입니다. 어떤 때는 다른 민족에게 온통 압박을 당하여 신음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천재지변이나 전염병으로 전 국민적인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런 고난을 당할 때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이 점점 멀리하였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출애굽의 역사를 살펴봐도 이스라엘은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입으면서도 계속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하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호6:1에 보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호세아 선지자의 가정의 내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아내 고멜은 원래 창녀출신입니다. 호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와서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멜은 남편 호세아의 품을 만족하지 못하고 가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따라갔습니다. 호세아의 가슴은 찢어지듯 아팠습니다. 다시 가서 고멜을 데려와서는 “이제는 다시 떠나지 말라. 나와 함께 오래오래 살자”고 간청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 놀라운 사랑을 알고 체험할 때 비로소 우리를 얽매고 있는 과거의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호세아 본문 4절에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의 줄”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의 줄만이 나로 하여금 과거의 죄에서 탈출하여 하나님이 나를 위해 열어놓으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렘29:의 말씀처럼 “번영이요 그리고 소망이 넘치는 미래”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오늘 호세아서 본문 10절에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원래 호세아서의 이 부분은 4:1에서 11:11까지 한 단락을 이룹니다. 그런데 4:1에 “이스라엘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11:11에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회복하는 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 그리고 복을 받는 길은 귀를 기울여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으로부터 떨며 온다”고 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존재들입니다. 지금 여기서 “돌아오라!”고 애타게 부르시는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느냐 아니면 그날에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는 심판의 음성을 듣느냐 입니다.

  오늘 호세아서 본문을 보면 지금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사정하듯 애원하십니다.“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한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오늘 골3:1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찾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 의지의 방향설정을 말합니다. 우리가 무익한 목적을 향하여 방향을 정할 수도 있고 가치 있는 목적을 향하여 방향을 정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180〬로 그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가 버린 것은 옛 사람과 그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취한 것은 “새 사람”입니다. 그의 목적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었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3.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은 따지고 보면 실패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패로 인해 “이제 다 끝장이다”라고 할 그때에 비로소 실패자가 될 뿐입니다. 그러기 전까지는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패자는 아닙니다.  존 맥스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실패했다는 것이 내가 실패자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아직 성공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패했다는 것이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내가 무엇을 배우게 되었다는 뜻이다. 실패했다는 것은 내가 바보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내가 모험을 감행할 용기가 있었다는 뜻이다. 실패했다는 것은 내가 남보다 못한 존재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패했다는 것은 내가 시간을 허비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내가 다시 시작해야할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실패했다는 것이 포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패했다는 것이 내가 성공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실패했다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저버렸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더 좋은 생각을 가지고 계심을 의미한다.”  이것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임하는 불굴의 자세입니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은 형제간에 재산문제로 인한 분쟁을 예수님께 가지고 와서 해결해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특히 재벌 2세들이 유산문제로 피나게 싸운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혈연도 윤리 도덕도 없습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것은 물질뿐입니다. 심지어 부자간에, 부부간에도 재산문제로 싸우고 갈라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최근에 모 방송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는 “쪈의 전쟁”이라는 드라마는 다소 과장된 면도 없지 않으나 돈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의 위력, 물질의 위력입니다. 한때 “無錢有罪요 有錢無罪라”는 말까지 있었는데 돈이 있으면 법도 아무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그야말로 황금만능의 사회상을 예리하게 묘사한 말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신 말씀이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입니다. 오직 돈밖에 모르는 한 사람이 먹지도 입지도 않고, 인정사정 보지 않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마침내 그 목표가 달성되었습니다. 창고를 늘려짓고, 그동안 축적한 부를 거기 쌓아놓고 여생을 즐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이 그의 인생종말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피땀 흘리며 벌어 모은 재산을 하나도 써보지 못하고 그 인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서 그 인생에 대해 결산을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 표현대로 하면 그는 그길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미치고 나서 주신 주님의 결론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한 사람들로서 과거의 상처로부터, 과거의 관습으로부터, 과거의 죄로부터, 그리고 세속적인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호세아서의 말씀처럼 주님은 지금도 계속 부르십니다. 오늘 주님의 음성을 사자소리같이 들으시고 그 사랑의 줄에 끌려 새롭게 주님 앞으로 나아와 저 천성을 향해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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