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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강도 소굴 속의 하나님 (왕하 25:8-12, 롬 10:1-4, 요 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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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이제는 세계에 자랑하며 살 수 있는 나라가 됐습니다. 모든 면에서는 아니지만 일부 저희들은 주눅 들어서 살지 않아도 되고 또 허리를 펴고 어깨를 펴고 세계 어디든지 돌아다니면서 살 수 있는 나라가 된 것을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백 년 전쯤에 이 땅에 선교사이자 학자들로 오셨던 분이 백 년 전 우리나라 형편을 보고 여러 가지 평가를 한 것 중에 가슴은 아프지만 저희들이 되새겨 봐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한국을 샅샅이 흩어보았더니 은둔자의 나라다. 이렇게 평가하신 분이 있습니다.

1892년입니다만 이 땅에 목사로 또 동양사 학자로 선교사로 오신 분이 계십니다. 이름은 WE. 그리피스라고 하는 목사님인데 이분이 한국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책을 하나 썼는데 Corea, The Hermit Nation. 은둔자의 나라 한국. 백 년 전의 일입니다.

이사람 눈에 보이는 것은 정치는 외부로 부터 오는 교역의 요구라던가 또 서로간의 선린관계 모든 것을 다 거부하고 철통같이 울타리 쌓아놓는 쇄국주의. 선교사도 받지 않고 선교도 안 받고 물물 교환도 안 받고 그냥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쳐 사는 쇄국주의가 사회 전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 참 착하고 순박하고 때론 어리석기 까지 하면서 쇄국주의의 노예가 되어있다. 그래서 이 나라가 살 수 있을까 걱정스러워서 책을 썼고 책의 내용도 그렇습니다. 순박한 나라, 자기만의 세계에 있는 나라, 그래서 은둔자의 나라. 거기서 나온 말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

듣기는 좋은데 실제 세계 돌아다니며 그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시끄러운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나라가 지금 은둔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빨리 빨리 등장을 했는지 세계 곳곳에 안간 데가 없습니다. 제가 그래서 백 년 전 그리피스 교수의 옳지 않다.

그러나 그때는 옳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옳지 않다. 백년이라는 시간동안 너무나 많은 급변을 했습니다. 이분이 죽어서 망정이지 살아있으면 경동교회가 초청해서 한 일 년 살아보게 하고 책 한권 다시 써라하면 이분이 뭐라 쓸까. 은둔자의 한국이 아니라 시끄러운 나라 한국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걸 통해서 한 가지 다시 한 번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 곳곳을 향해서 상품으로 가고 문화로 가고 종교로 가고 기술로 가고 안가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 한국 사람이 안간 곳이 없고 한국 물건이 판매대에 오르지 않은 나라가 없습니다.

세계가 너무 넓지만 한국이 가있습니다. 반대로 우리 땅에 전 세계가 들어와 있습니다. 노동자로, 물건으로, 학문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은둔자가 아니라 개방적인 나라가 됐습니다. 질문입니다. 우리가 간 세계는 얼마나 넓습니까? 우리한테 들어온 세계는 높이가 얼마고 넓으며 깊이가 얼마입니까.

우리가 우리한테 들어온 세계를 얼마나 진실로 끌어안고 있습니까? 이행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세계를 향해서 나아갈 때는 얼마나 그 나라에 가서 아름답고 남들 보기도 좋고 진실로 웃음꽃이 피는 그런 방식으로 세계를 갔습니까?

사실 쇄국정책이라는 것이 당시 대원군의 정치이긴 하지만 쇄국은 자신 없는 정책일겁니다. 진실로 개방적이고 자신 있는 사람은 세계를 향해서도 열고 세계가 들어오는 것도 기꺼이 맞이할 수 있고 제가 정정 당당하게 소화하며 살 수 있을 겁니다. 배타가 아닌 포용입니다.

다른 건 제가 모르겠지만 선교사가 한 은둔자의 나라 한국. 우리는 미국에서 와서 은둔자의 나라,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복음을 전파 하노라. 오늘 이렇게 됐습니다. 백년이 지난 지금 은둔자들이 일어나서 전 세계를 향해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통계상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가 한국 선교사입니다.

백년밖에 안 됀 나라가 이런 일이 있다는 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납니다. 교회수도 굉장하지요 선교사도 많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지금도 해결이 안돼서 오늘 탈레반에게 붙들린 아직도 살아있는 22명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 정말 똑같이 형제자매 둔 저희로서 빨리 석방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오늘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 우리가 세계를 향해서 가긴 가는데 그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좀 알고 갔으면. 우리한테 세계가 오면 오는 세계가 우리 현실 좀 알고 왔으면. 사람이 가든, 복음이 가든, 문명이 가든, 문화가 가든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저는 앞으로 이 사건이 정리가 되고나면 우리끼리 앉아서 솔직담백한 얘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를 향하여 세계가 우리에게. 오늘 말씀이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들아 가야합니다. 어디든지 가야 합니다. 갈 때 우리가 명심할게 있습니다.

언제 가느냐 하면 성령이 너에게 내리시면 가라.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가라. 그렇지 않고는 가지 마라.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가는 목적은 성령의 능력을 선포하러 가지 저 자랑하러 가지 않습니다.

내 이념이나 내 체제를 강요하러 어느 나라 사람이 갑니까? 내 종교를 선포한다고 어느 나라 사람이 받을 수 있습니까? 내가 전파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선포하러 갑니다. 로마서 말씀에 이렇게 돼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자기 동족을 위하여 기도하며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제 동족들은 하나님 섬기는데 너무 열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열성은 올바른 열성이 아닌 줄 아시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기들이 옳다고 하는 자기들의 의를 선포하느라 열성이지 실지로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시지요. 그래서 제가 우리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고백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지 않고 실제 자기들의 의를 세우려고 했던 점을 하나님께 고백하오니 용서해 주옵소서. 그런 뜻에서 하나님 자기의 의를 하나님의 의로 빙자하여 자기 의를 선포하는 모든 율법은 하나님 마침표 찍어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새롭게 복음의 의로 무장하여 다시 가겠습니다. 오늘 백년 지났다고 했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의 말씀을 빌어서 합니다. 하나님 저희들이 선교하고 봉사하는 일에 열심히 했을 텐데 우선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옵소서. 제 말 하지 않고 하나님 말 좀 하게 하옵소서.

어디든지 가겠습니다만 그곳에서 하나님의 자기 의를 펼치는 일에 저를 손과 발로 삼아 주옵소서. 사실은 이번 사건을 보면서 제가 여기서 자세한 얘기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분당 샘물교회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선교집단이 가긴 갔는데 가서 봉사한다고 갔지요.

또 비자를 내는데 중간 역할을 했던 한국 복지제단도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병원 봉사를 한다고 하니까 비자 수속을 해준 겁니다. 문제는 현장에 있는 여러 선교 단체 중에 작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천명이 모여서 이슬람 사회에서 평화대행진을 하자고 조직을 하다가 아프간 정부 우리정부 우리 민간 교회 이름으로 반발이 있어서 행사를 못하고 쫓겨난 그룹들이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어디든지 가서든 전파하자. 사실은 하나님의 얘기보다 우리 자신의 선교 이념과 우리 자신의 뜻을 굴절 시키려 하다가 못한 적이 있었나본데 아마 그 측의 가이드를 받고 위험지대 아무도 가지 않은 곳에 가라고 얘기를 듣고 간 것 갔습니다.

저는 우리가 하는 선교가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사실 열매는 하나님이 거두시기 때문에 우리 진심은 제가 죽더라도 하나님의 의가 선포 된다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가야하는데 지나고 났더니 내가 생각하는 올바름 그걸 통해서 가고 싶었고 사실은 지나고 난 얘기입니다만 하나님의 성령은 가서 전파도 못하고 죽으라고 보내는 것이 성령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로마도 정복하고 전 세계를 정복하되 로마를 정복할 때는 로마를 알고 전파하십시오. 로마사람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전파하십시오. 한국 땅에 온 교회는 한국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된 것으로 압니다. 이제 저희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목숨이 너무 귀해서 빨리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너무 답답해서 그렇게 우리함께 기도 하십시다. 동시에 이제 선교라는 말을 쓸 때는 우리의 욕심, 우리의 의의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하는 선교를 새롭게 생각 합시다. 선교란 말 보다 죽임을 당하는 곳에 갈 때는 선교란 말보다 봉사하고 옵시다.

세계 봉사를 위해서 우리가 연합해서 계획도 짜봅시다. 이런 등등의 얘기를 묶어서 엊그제 우리 일곱 개 교단을 대신하여 일곱 목사들이 성명서를 낸 적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제 이쯤 됐으면 하나님 나라 선포를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자기 의는 죽이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전부 발휘하여 세상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번 가봅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는데 하나님 방식대로 한번 가봅시다. 이런 얘기가 지금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구약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열왕기하에도 보면 있습니다. 열왕기하는 느부갓네살 왕을 위주로 하는 바빌론 왕이 마지막 이스라엘을 침략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이 너무 부패했지 때문에 바빌론의 왕의 근위대장이 와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파괴합니다. 사람들을 다 붙잡아 갔지요. 지성인을 붙잡아 갔지요. 남은 사람은 농촌에서 일하는 몇 사람만 남겨놓고 목축업에 종사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완전히 초토화 시켰습니다. 이유는 이스라엘은 타락했다.

이스라엘 성전은 부패했다. 이스라엘 지성인, 지도자 모두 부패했으므로 이방 민족을 통해서 내가 완전히 심판을 주겠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망했습니다. 이것이 BC 586년의 일입니다. 그때는 바빌론 포로의 시작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이전에 이사야를 통해서 아모스를 통해서 선지자들의 말을 제가 몇 가지만 응용해 보겠습니다. 나는 이제 성전이라 이름 하는 하나님의 집에 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강도질하고 속이고 자기를 속박하는 것을 더 이상 싫다.

짐승 잡아서 피를 바치는 거 그만둬라. 그 대신 내가 그대들에게 원하는 게 있다. 부당하게 묶인 사람들 풀어줘라. 배고파서 굶주린 자 먹을 것 주어라. 불쌍하게 돌아다니며 옷도 없는 사람에게 입을 것 주어라. 헐벗은 자 입히고 불쌍한 고아들 데려가 쉼을 주고 그리고 나서 나한테 예배하라.

그렇지 않으면 희생 제물이 싫다. 이미 수백 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얘기했습니다. 그건 어디서 얘기했냐 하면 성전에 온 사람들 보고 하는 얘기입니다. 각자 집에서 살 땐 상관 안하겠지만 거룩한 성전에 올 때는 제발 희생 제물은 그만 바쳐라. 얼마나 했으면 이렇게 고백했겠습니까. 당연히 이방 바빌론의 포로가 되지요 성전도 망하지요 사람들 다 붙잡혀 가지요.

사실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우리가 세운 건물만 무너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지도자, 지성인등 쓸모 있는 사람은 몽땅 하나님이 멸망시킬 수 있다. 엄청난 얘기입니다. 최근 예하나 들어볼까요.

우리도 선교회 하면서 봉사를 하는데 캄보디아 예를 들겠습니다. 캄보디아의 각 분파끼리의 싸움 때문에 크메르 루주라는 그룹이 나와서 얼마를 죽였냐 하면 캄보디아에 있는 모든 지성인. 배웠다고 이름 하는 모든 분야의 사람들을 얼마나 죽였는지 그 뼈가 쌓인 것을 킬링필드라고 합니다.

이 뼈들이 뭉친 곳입니다.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모르지만 지금 캄보디아가 경제 개발해야지요. 학교 세워야지요. 병원 만들어야지요. 뭘 하려하지만 교사할 사람이 하나 없습니다. 병원의 의사 하나 간호원하나 교사도 없고 교회서 설교할 목사도 하나도 없습니다.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 전부 죽였습니다.

도대체가 건물만 망가뜨린 것도 문제가 많지만 왜 이렇게 사람을 다 쓸어버립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사람이 잘못을 하고 부당한 결박을 풀지 않고 굶주린 자 먹을 것 안주고 불쌍한 사람 안 받아들이고 헐벗은 자 입히지도 않으면서 사랑은 행치도 않으면서 예배드리는 백성에게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의 말처럼 저희 백성도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의를 선포한다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갑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어쩌란 말입니까? 오늘 예수께서도 성전을 보니 성전이 완전히 돈 바꾸는 사람들 장사하는 사람들로 강도소굴이 돼버렸습니다.

예수께서는 다 무너뜨리고 상도 들어 엎고 말했습니다. 차라리 성전 허물자. 허물고 내가 다시 지으마. 이런 말씀 하셨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성전에 모일 때 모이면 별게 아니고 제사를 드리는데 사실 이렇습니다.

왜 돈을 바꾸냐 하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고 살았기 때문에 쓰는 돈이 로마 돈입니다. 근데 성전에 와서 바칠 제물을 사려고 하면 일단 성전에서만 통용되는 돈이 있었습니다.

그 돈으로 교환을 해야 하는데 큰돈이 왔다 갔다 했습니다. 돈을 교환해서 엄청난 이득을 취했습니다. 제사장, 서기관, 장사꾼 담합입니다. 그리고 한 마리 비둘기 살 때 그게 얼만지 부르는 게 값이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곳에 와서 그걸 사가지고 피를 바치면 내 죄를 사했습니다.

예수께서 성지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러 갔더니 이런 상황이 즐비합니다. 이 말은 성전은 도둑의 소굴이지 거기서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을 차라리 헐자. 헐어야 할 성전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습니까?

예루살렘의 성전이 헐려야 했고요 모든 성전이 헐려야 했습니다. 탈레반 사람들 나름대로 자기 성전을 짓고 살았습니다. 성전의 쇄국주의는 이렇게 강했습니다. 얼마나 강하냐 하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프가니스탄 돌부처 상이 유네스코에 등록된 명물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명령에 충실하기 위해서 돌 부처상을 폭파시켜 버렸습니다. 우상 섬기지 말라는 이름으로 폭파시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동포를 붙잡고 살해합니다. 이 모든 것의 첫째 이유는 우리가 선교하던지 봉사하던지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는 것이지 내 의를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체제를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사고 방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강합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했지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까? 제가 바로 이웃에 있는 소굴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지난 6월 달 함경남도 함흥에서 300명 이상이 굶어 죽었습니다. 죽은 걸 조사해봤더니 영양실조입니다. 함경북도의 평진, 길주, 명촌 병원마다 하루에 세 명 내지 네 명이 죽어갑니다. 온성 읍에서는 다섯 명 이상이 죽어갔는데 지난 6월 중순에서 7월 중순까지 80명 이상이 죽었고 읍이 아닌 온성군 농촌에서는 40명 50명 정도의 아사자가 생겼습니다.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없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 살상무기를 만들어서 과시해대는 사람들. 함흥의 선교는 무너졌습니다. 무슨 명목으로든지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갑니까?

도둑의 이야기 강도들의 이야기는 딴 데서 찾지 마시고 우리 주변에서 또는 아프리카에 가보십시오. 남미에 가보십시오. 이렇게 굶고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들 못 본 척 하는 우리들. 강도들의 소굴이 무지하게 많은데 예수님은 자기 기도할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도 이런 일이 생기는데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받아 앉을 곳이 없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한테 사랑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받고 싶지요. 하나님께 간구하셔야지요.

제발 아프가니스탄에서 함흥에서 서울 땅에서 세계 어디든지 강도 소굴로 변한 속에서 하나님의 기도를 들으시는 그 하나님의 심정 헤아려 보신일 있습니까? 하나님한테 사랑 받고 싶습니까? 하나님은 그곳에서 지금 울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름 하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들의 의를 선포하면서 성전이라 하는 곳에서 하나님은 웃음이 아니라 지금 찌들은 웃음을 만들고 계십니다. 가슴이 찢어질 겁니다.

그 사람보고 하나님 은총을 좀 주십시오. 이제 우리 말 좀 바꿉시다. 오늘 하나님 위로해 드립시다. 하나님께 미안하단 말을 좀 합시다. 나 배고프니 나 출세하겠으니 날 도와주십시오 하기 전에 자식 된 우리가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있는 하나님, 울고 계시는 하나님, 그분에게 미안하다는 말로 위로 인사 좀 전해줍시다.

하나님이 울고 계십니다. 그런 하나님 보셨습니까? 너무 답답하여 그 하나님이 예수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차라리 헐자. 다시 짓자. 제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세계가 움직이는 이야기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성전을 하나님이 거하는 곳을 세계 각지에서 체제 속에서만 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만드신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다 살아있는 성전입니다.

여러분이나 제가 살아있는 성전입니다. 여러분이나 제가 하나의 성전입니다. 제 하나님이 있는 제 성전 속에 제 몸이 온갖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질병이라 이름 하는 강도들입니다. 암도 앓고 있습니다. 질병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계신 제 사람의 마음속에 제 가슴속 혼속에 온갖 좌절과 분노와 온갖 죄악들이 넘쳐납니다. 저는 하나님 보시기에 네 몸도 네 마음도 강도의 소굴이다. 강도의 소굴에서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인간을 좀먹는 강도. 하나님을 좀먹는 강도야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죄송한 말을 드리려 합니다. 제가 강도입니다.

제 속이 강도의 소굴임을 알았습니다. 절보고 하나님께 뭐라고 해야 합니까? 하나님 미안합니다. 제가 사실은 강도의 소굴인데 제가 좀 아프다고 마음이 어떻다고 제가 좀 투정을 부리는데 하나님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하나님 제 속에서 울고만 계시지 말아 주십시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도 나도 온 세계도 여러분 자신도 내가 거하는 거룩한 성전인데 이제는 허물어야겠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허물고 십자가에서 허물고 내가 3일 있다가 부활해서 부활시켜 줄 테니 그때 새롭게 태어납시다. 3일이 얼마냐 하면 저도 계산 못하겠습니다. 예수님의 3일은 요한계시록 보면 예수님과 함께 복되게 사는 사람은 천년이 하루 같고 지긋지긋하게 세상 사람은 하루가 천년 같고 사람의 느낌이 다를 텐데 하나님이 만드신 3일이라 이름 하는 상징적 숫자 속에서 오늘 얘기하십니다.

죽자, 허물자. 그리고 새로 짓자. 제가 오늘 그냥 몸으로 죽을 수 없는 하나님이 저희에게 오셔서 마음으로 죽고 하나님이 다시 한 번 다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으면 그렇게 바랍니다. 하나님은 강도소굴 속에서 괴롭다. 외롭다. 눈물이 난다.

꼭 어떤 사람이 말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이나 제가 사랑하는 시인 얘기 하나하겠습니다. 독일 시인 하이네입니다. 수필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칠흑 같은 밤에는 소경이 최대의 안내자가 된다. 말이 맞습니다.

눈뜬 어느 사람보다 길을 잘 알고 안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날이 밝으면 소경의 역할은 끝난다. 지금이 칠흑 같은 밤이라고 느끼시면 차라리 소경이 낫답니다. 저 같은 눈뜬 사람은 한 발짝도 못 움직일 겁니다.

하이네의 마지막 질타가 있습니다. 어두운 시절에는 종교가 최상의 안내자가 됩니다. 이분의 말은 나도 믿는 사람이고 믿는 가정에서 낳는데 오늘의 신앙을 가졌단 사람들이 사실은 눈뜬 소경 같아서 눈뜬 소경이라 이름 하는 종교 신앙의 동지들이 당신들이 사는 데는 어디냐면 어두운 세상만 가능합니다. 어둠으로만 보전하시렵니까?

세상을 밝게 아름답게 신나게 웃음이 만족하는 그런 세상 만들려면 종교가 필요 없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동조하고 싶어서 이 말을 쓴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세상을 밝히고 싶습니까? 칠흑 같은 밤에 만족하지 말고 사십시다.

하나님이 보시고 세계가 보고 다 본다고 생각하고 투명한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오늘 제가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겠습니다. 내 의는 죽이겠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셔서 이해를 좀 하십시오. 강도 소굴 속에서 고통당하신 하나님 죄송합니다. 밝은 날 주셔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옵소서.

신앙 고백을 다시 한 번하고 살아갑시다. 이 나라가 우리 가정이 저희들 자신이 이런 고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나는 함께 죽고 부활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새로운 생명을 약속하마. 나와 함께 이 길을 가자.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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