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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예배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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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예배 (롬 12:1~2)

로마서도 드디어 12절에 왔습니다. 12절은 큰 단락이 지어지는 장입니다. 11장 까지는 대체로 신학적이고 관념적이며 다소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교리적인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12장부터는 아주 실천적인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11장을 보아 왔는데 그 중에서도 1장부터 8장은 기독교의 구원론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독교 교리를 제대로 알고 싶지만 혹 시간이 부족하다면 1장부터 8장까지 열심히 보십시오. 상당히 많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9장부터 11장까지 석 장은 약간 삽입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구원, 그리고 전 세계 인류 전체의 구원역사에 대해서 쭉 말씀을 하고 있으며 12장부터는 다시 8장에 이어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요청되는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값없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말씀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절) 라는 말씀입니다. 아주 유명하고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즉, 구원을 받았으니, 은혜를 받았으니 예수 믿는 사람이든 세상 사람이든 생각할 것은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도 부모에 대해서, 나라에 대해서,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들에 대해서, 사회의 어른들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리고 내가 받은 구원의 값어치를 아는 것만큼 누린다는 사실을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큰 것을 받아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정말로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태복음에 나오는 진주를 사는 사람처럼 됩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진주를 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알고 그렇게 산 사람은 다 누리게 됩니다. 생각만 해도 좋은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열 개를 가지고 있어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가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렇게 어마어마한 것을 가졌으니 세상 것은 아무 것도 별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 하나만 있으면 되고 다른 것은 다 필요 없습니다. 좋은 사랑하나 얻게 되면 왕 자리도 버리는 것을 세상 역사에서도 많이 보지 않습니까? 먼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좋은 것을 받았다면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여러분들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른 것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할 것이 없으며 여러분 자신을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형제들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형제들은 로마에 있는 교우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사실 사도 바울은 이들을 알지 못합니다. 한 번도 가보지를 않았기 때문에 혹 아는 사람이 한두 사람 있을지 모르지만 거의 대부분 알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형제들아 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한 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 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참된 교회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피부색이 다르고 사는 곳이 달라도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한 사람은 전부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가득해서 그냥 로마 교우라고 하지 않고 형제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사랑이 절절하게 묻어있는 것이 형제들아 라는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돈이나 옷을 보내주는 것은 그냥 동참하는 것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착각입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하나의 소일거리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이야기할 때에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남편을 사랑하고 회사에서는 내 동료를 사랑하고 우리가 사는 아파트의 경비원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형제들이여 하면서 구제헌금이나 선교헌금을 보내는 것이 진실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또 권하노니 라고 말하고 있는데 마치 명령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세운 교회라면 권할 수 있지만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권하노니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그 어마어마한 구원을 어떻게 얻었습니까? 단지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얻었기에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빚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사람들에게 그 어마어마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종이므로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는 당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일을 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여러분들에게 권합니다,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명하고 지시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으로 인한 마땅한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순종입니다. 주님과 교회에 대한 순종이 있고, 때로는 주님의 대리인으로서 행할 때에는 하나님의 종에 대한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이번에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몸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쓴 편지에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런 것을 계기로 몸에 대해서 알아봐야겠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몸을 하찮게 여겼으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영혼이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몸은 인간을 가두는 감옥이며 부끄러운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아주 폄하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렇습니다. 인생이란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약한 부분이 있으므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여기에 대해서 전적으로 거부합니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께 속하듯이 몸도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혼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비록 부끄러운 모습도 있지만 육체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영혼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듯이 몸으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따라서 몸을 부끄러운 것이나 경멸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몸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거하시는 장소며 성령이 역사하시는 성령의 전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성육신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성육신 즉 하나님이 몸이 되었다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빌어 그 속에 계시는데 얼마나 몸을 귀중하게 보았으면 그렇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 인간 예수의 몸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을 함부로 할 것이 아니라 잘 가꾸어야 합니다.

몸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게 되면 기독교 역사에서 이단과 정통으로 나누어지는 중요한 분기점이 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몸을 영혼과 나눌 수 있느냐 없느냐가 큰 이슈였으며 이것이 이단과 정통의 큰 싸움거리였습니다. 이단은 인간의 몸과 영혼은 분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워치만 리’ 라는 평신도 사역자가 대표적인 예인데 제가 이분의 전체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분의 다른 신앙에 대해서는 존경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통에서는 이 분을 이단으로 자리매김 해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인간을 몸과 영과 혼으로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분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워치만 리’의 인간을 몸과 영과 혼으로 분리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들어보면 이해하기 무척 쉽습니다. 아주 손에 잡힐 듯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여러분도 신앙생활 하실 때 이해하기 쉽고 받아들이기 편하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적인 가르침일 수 있습니다. 성경 어느 곳에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 모든 곳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은 전인격적이며, 몸과 영혼과 혼을 분리할 수 없고 함께 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통은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을 분리할 수 없지만 구분할 수는 있다고 말합니다. 한 덩어리의 전인격적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몸과 마음을 제물로 예배를 드릴 때에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는데 그냥 되는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구원받았으니 하나님을 위해서 성별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순간순간 모든 우리의 삶을 예배로 드리기 위해서 항상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제사로 드릴 제물인데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하지 못합니다.

1절 마지막에는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씀하는데 먼저 예배란 무엇인가를 봅니다. 영어로는 worship 혹은 service 라고 합니다. 둘 다 섬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예배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인간에게 쓴 적이 없습니다. 먼저 worship 이라는 말을 보겠는데 이는 경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항상 하나님을 경배할 때에 이 worship 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전부 다 하나님에 대해서입니다. 인간에 대한 것을 성경에서는 예배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더 알 것은 카톨릭의 마리아 상에 대한 것입니다. 개신교나 카톨릭에서 전혀 차이 없이 가르치는데 사람들은 많은 착각을 합니다. 카톨릭 교인들이 마리아를 경배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카톨릭 교회에서 마리아를 경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었습니다. 교황청의 결정에 의하면 마리아는 경배를 드릴 수 있는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존경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기회에 제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카톨릭 교인들이 오가면서 마리아 상에 인사하는 것은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의 뜻으로 하는 것으로 카톨릭 교회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인간이 자기의 몸과 마음과 영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적인 적용을 위해서 생각할 것은 아름답고 화려한 예배를 드리고 아주 즐겁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예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잔치를 할 수도 있는데 진정한 예배는 매일 매일 순간순간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포함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정말로 하나님께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음도 드리고 혼도 드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는 심정으로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이것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예배당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 현장에서 마음과 뜻을 다하여 드리라는 것입니다. 예배당 안에서 드리는 예배만을 예배라고 말하지 않고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교회당에 예배드리러 간다’ 고 말하듯이 ‘나는 사무실에 예배드리러 간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출근하여 돈을 벌면서도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학교에 공부하러 가지만 학교에 예배 드리러 간다는 심정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 예배에 대한 말로 service 라는 것이 있습니다. 섬김이라는 의미로서 본래의 예배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섬김의 의미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마음과 몸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만 하나님께 드리듯 이웃에게 드리는 것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인데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날 교회나 예배라는 것이 상당히 많이 세속화 되어있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순간순간 예배와 교회에 대해서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약하고 없는 사람을 섬기고 불쌍한 근로자를 돕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한 푼이라도 드리는 것 이 모두가 예배입니다. 더 큰 것은 내 사랑을 받을 수 없는, 내가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까지도 섬기는 것, 이것이 참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로마서 12장 1절 말씀을 이미 다 외우고 있지만 뜻을 알고 외어야 합니다.

하나 더 영적 예배라고 했는데 영적이라는 말을 보겠습니다. 영적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합리적, 이성적, 합당한 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당한 것이 어떤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하고 이성적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법과 세상 법은 같이 갑니다. 법의 정신은 마찬가지입니다. 법의 정신을 알게 되면 세상 법을 다 알 수 있는데 조문만 외우면 모릅니다. 영적이란 하나님의 것이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는 이렇게 드리는 것이라고 가르쳤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동물을 잡을 때 동물 잡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동물이 나 대신에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 양을 잡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는 것입니다. 죽을 것은 바로 너인데 너 대신에 저 양이 죽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오늘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 예수의 용서하심 때문에 내가 용서를 받아서 죽을 수밖에 없는 내가 당당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아무 생각 없이 모양만 갖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합리적이고 합당한 이성적 예배를 영적 예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권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을 그냥 따라 하지 마십시오. 거룩함을 다 잃어버립니다. 순간순간 마다 같이해도 되는지, 따라가도 되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에 너무 민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다가 세상 사람의 칭찬을 받는 것은 괜찮지만 순서가 바뀌어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하여 여러분의 삶을 살고 교회를 운영해 나가면 완전히 거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속화라고 합니다. 얼른 보면 세상적으로 이름도 나고 괜찮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가 봐야 합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라고 말씀하시는데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영혼도 본질적으로 바뀌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참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은 하여야겠지만 우리 속에 예수님을 온전히 모시게 되면 그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만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노력은 해야겠지만 노력은 우리의 기도일 뿐이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내 속에 예수가 들어오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속에 예수를 모시게 되면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바뀌어져 갑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는 수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내 속에 주님이 계신지 물어 보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내 속에 주님께서 계실 때 변화가 일어나고 완전히 사람이 바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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