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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족할 줄 아는 자의 자신감과 승리선언 (빌 4: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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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행복은 무엇을 소유함에서 오는 것인가, 아니면 그 가진 것을 행복하다고 느끼는 만족감, 즉 삶의 기쁨을 터득함에서 오는 것일까를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적게 가졌어도 행복하게 사는 이들도 있지만 아무리 많이 가져도 늘 불평이고 불만족한 사람도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과연 이 둘 중에서 누가 더 많은 것을 가졌을까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삶의 진정한 행복은 결국 일차적인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소유한 것의 가치를 바로 깨닫고 누림에서 온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것, 내가 원하는 것을 다 가지려고 함보다 내게 있는 것의 가치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 가치의 진면목을 깨달아서 알고 누리고 기뻐하고 행복할 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고 행복해하고 자신 있어 하는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자랑스러운 인간적인 요소를 가지고 태어나서 장성한 사람입니다.
좋은 혈통, 좋은 가문, 좋은 문벌, 많은 학식, 존경받는 위치, 열정을 가진 종교심과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을 만한 당시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그리스도를 안 뒤에는 그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였고 사람들이 흠모하던 그 모든 것이 마치 배설물처럼 여겨질 정도로 예수그리스도의 고상한 지식과 은혜가 너무나 기쁘고 감격스럽게 그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것이 배설물처럼 여겨질 정도로 예수그리스도의 도의 고상함과 은혜가 커서 이제 그의 삶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사역을 하고 그 가운데 받는 고난과 심지어는 고통과 아픔까지 기쁨으로 누리고 사는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그는 때때로 궁핍과 비천에 처하기도 하였으며 낮은 위치에 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높은 위치에 있건, 낮은 위치에 있건, 그것이 그의 마음에 행복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지 못했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그는 그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삶의 구조를 완성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오늘 성경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선언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떤 형편에든지 내가 스스로 만족함을 터득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러므로 나는 담대하게 선언하니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그는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자신 있는 행복의 선언이고 승리의 선언이며 그 삶은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승리자의 삶의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날씨에 대해서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날씨 맑으면 좋겠어. 혹은 비가 왔으면 좋겠어.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내가 소망하는 대로 언제나 날씨가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꼭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 쯤 알고 있습니다.
내 필요에 의해서 ‘날씨가 맑았으면 좋겠어. 흐렸으면 좋겠어. 비가 왔으면 좋겠어.’ 라고 생각을 하지만 날마다 내 필요에 따라 날씨가 그렇게 된다면 이 세상은 다 아름답게 이루어지지 못할 겁니다. 맑은 날씨만 원한다면 사막이 되어 버릴 것이고, 비오는 날 원하는 대로 비 다 온다면 아마 이 세상은 홍수가 날 것입니다. 내 마음의 원대로 안 돼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맞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국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합당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소망은 하되 결과에 대해선 하나님의 뜻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을 거스르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고 내게 주어진 자연의 섭리에-하나님의 섭리에 기뻐하고 감사하기 위해서 내 마음을 조절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요즘 기사를 보니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100세까지 충분히 늘어날 수 있고 그렇게 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과연 인생이 100세까지 사는 것이 축복인가, 재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좋은 음식도 먹고, 또 운동도 열심히 하고, 관리도 잘하고, 약도 발달됐고, 의료기술도 더욱 더 발달되어서 100살까지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100살까지 사는 게 과연 축복이냐, 재앙이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의미입니다. 억지로 수명을 연장한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다 합해서 평균적으로 수명이 78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평균적이니까 개인에게 다 맞는 것은 아니겠지요. 일반적으로 68세까지는 건강하게 사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68세에서 78세까지 10년 정도는 다 병치레 하는 도중에 계시다가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많으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수명만 길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과연 그 가운데 내포되어 있는 삶의 질, 우리에게 포함되어져있는 삶의 여건과 모습들이 과연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길이가 축복이요 재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실제적인 가치와 의미인 것을 보게 됩니다.
모든 것은 내 마음에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내게 제일 기쁜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최종적인 기쁨임을 우리는 압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의 사람은 부족할 지라도 시간이 가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인가에 대해서 점점 관심이 많아지고 그렇게 만들어져 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삶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여건,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감사하고 기쁨의 법을 터득하며 그것으로 기쁨과 감사를 누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좋은 여건, 좋은 사람들, 좋은 컨디션, 모든 좋은 것 다가지고 왜 잘 못하겠습니까?
좋지 않은 주변 여건, 내가 만들어서 키워야만 하는 참 어려운 사람들, 극복해야만 하는 상황과 개인적인 여건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해결하여 무엇을 이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아름다운 성취라고 합니다. 그러함은 결국 우리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과 행복은 고난을 극복해 이루는 기쁨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어떤 여건 속에서도 그것을 기쁨으로 만들어 누릴 줄 아는 하나님의 축복과 영적승리를 이루는 믿음의 인격을 우리는 갖추어야 합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첫 번째 내용은 삶의 가장 큰 자산인 행복의 비결터득은 곧 자족함의 비결을 터득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행복해야 되겠다는 행복의 비결을 터득한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모든 여건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느낄 수 있는 자족함의 비결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렸거나 욕망으로 인하여 생긴, 이루지 못한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고 나의 처음 출발의 선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불행감은 내가 얻은 것-현재 가진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내가 잃어버린 것-과거에는 있었는데 현재는 없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겁니다.
어차피 우리 삶에는 사용하지 못하는 것들 중에 가지고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것도 잃어버리고 나면 너무 아쉬워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은 때로는 정리할 것 과감히 정리해서 삶을 간출하게 만드는 것이 지혜일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어떤 것을 상실하거나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 없으니까 거두어가셨다고 생각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지혜로운 생각일 수가 있습니다.

전에 제가 집안의 짐을 대대적으로 정리해 본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끌고 다니던 책들이 있었습니다. 세계문학전집, 이런 것 어느 집이나 이런 것 있지 않습니까?
한국문학전집, 사상전집, 하다못해 이광수전집 이런 것까지 다 있었는데 제가 고등학교 이후에 다 끌고 다녔습니다. 이사할 때 보니까 책이 한 70박스정도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을 다 쌓으니까 방으로 하나 가득인 것 같았습니다. 이사할 때마다 줄기차게 끌고 다녔던 같습니다.
살다보니까 집이 점점 좁아지잖아요. 애들이 커지면요. 뭔가 생각을 해 봐야겠다고 생각해보니 특별히 생각해 보니까 안 보는 책은 좀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장서가는 아니니까요. 그래서 어디 둘 데도 없고 그래서 제가 이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이 책을 다시 볼 것인가? 제가 한 2~30년 끌고 다녔는데 다시 안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럼 내가 이다음에 다시 볼 때 어떻게 하는 것이 낫겠는가? 제가 보니까 그 책 버리고 새 책 사서 보는 것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끌고 다니고 보관하고 하는 것에 비해서. 그래야 출판하는 사람도 살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또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 책을 애들한테 물려주면 애들이 이 책을 볼 것인가?
제가 보니까 안 볼 것 같아요. 애들이 이미 몇 십 년 돼서 누렇고, 책 종이도 두껍고 한 이런 책을 볼 것 같습니까?
도서관에 기증한다고 해도 새 책 사서 기증하는 것이 낫지 그것 가지고 가 봐야 짐만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굉장히 집이 넓어졌어요. 전부 버리고 나니까 공간도 넓어지고 굉장히 집이 넓어지더라고요.

여러분 집에서 찬장 열어봐서 3년 동안 한 번도 안 썼던 그릇은 다 버리세요. 상당히 많을 겁니다. 3년 동안 한 번도 안 썼다면 무조건 버리세요. 왜냐하면 나중에는 뭘 버렸는지 기억도 안 날 겁니다. 3년 동안 한 번도 안 썼던 그릇 굉장히 많죠?
여러분 옷장도 열어봐서 3년 동안 한 번도 안 입었다. 과감히 버리세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버려도 또 있어요. 또 버려야 돼요.

여러분, 우리가 집에서 정리한다는 것은 소위 말하는 버리는 거죠?
정리 한다. 오래간만에 집안 정리 한다. 그것 다 버리는 거잖아요. 어떤 것 버리느냐, 그래서 간출해지느냐 하는 것 아닙니까? 사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부족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사실 잘 안 버리는 스타일이거든요. 옷 같은 것도 한 번 보면 15년, 20년 입는 것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것 버리고나니까 참 시원한 것 같습니다.

큰맘 먹고 선별해서 정리하니까 훨씬 더 모든 것이 간출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사실 가진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없다없다 하지만 아무리 버려도 또 버려야 할 것이 우리들에게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 하나 구할 때는 다 용처가 있었고, 용도가 있었고, 가진 것 아껴서 구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변해서 지금은 안 쓰는 겁니다. 지금 없어서 애달캐달하는 것도 우리 마음 변하면 그것 없어도 괜찮습니다. 없는 것 생각하지 말고 있는 것으로 감사하고 이루지 못한 것 슬퍼 말고 이룬 것으로 감사하면 우리의 삶은 훨씬 더 수려해집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없는 것 생각하지 말고 있는 것으로 감사하고 이루지 못한 것 슬퍼하지 말고 이룬 것으로 감사하면 우리 삶은 훨씬 수려해집니다.”

그래요. 하루 종일 없는 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않고 내게 뭐가 있는가 생각해서 그것 가지고 누리고 기뻐하세요. 이루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 상하지 말고 내가 이룬 것이 뭔가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람들에게 감사하면 됩니다.
우리의 처음 출발선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은 너무 감사할 뿐이고 기쁠 뿐입니다.
우리가 자꾸 많이 가졌다는 사실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잊어버리고 우리는 자꾸 뭔가 부족한 것을 생각하고 산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처음 출발선이 어땠는가를 생각해 보면 돼요.

여러분 어제 같이 읽으셨을 텐데 여러분 읽으셨을지 모르겠어요. 신문기사를 보니까 한 만화가에 대한 기사가 있어서 제가 아주 눈여겨봤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7살 때 척추결핵으로 몸을 잘 쓰지 못해서 40년 동안 방안에서 한 번도 안 나왔대요. 바깥출입을 40년 동안 한 번도 안했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일어나지 못하고 늘 엎드려있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글을 깨우쳤습니다. 거기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여러분 한 번 신문기사 보세요. 인터넷으로 보면 그 사람이 그린 그림도 나와 있는데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 사람이 한 15년 전부터 상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손으로 그리기 시작해서 상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림이 굉장히 따뜻했습니다. 몇 개봤는데.

거기서 이 사람이 상을 받기 시작해서 얼마 전에 만화그림 전시회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터뷰를 한 건데요.
40년 동안 학교를 다닌 적도 없고 배운 것은 오직 텔레비전을 통해서 세상을 본 것입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본 것이지 밖에 나가 본적이 없어요. 방 밖에 나가본 적이 없대요. 그래서 전시회에 초청을 하고 꼭 오면 많은 사람에게 호소력이 클 수 있다고 얘기해도 40년 동안 밖에 안 나가봐서 두려움이 많아서 안 나가겠다고 그 전시회도 본인이 안 갔다고 그러더라고요.

이 사람에게 있어서 뭔가 꼭 소원이 하나 있으면 좀 말해봐라 했더니 내게 값싼 망원경이 하나 있어서 창문을 통해서 달을 좀 구경했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망원경이 있어서 달구경을 좀 해 봤으면 좋겠다는 이런 소망이 있더라고요.

여러분, 그런 소박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세상에는 있어요. 그런 소박한 삶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그런 생각하면 우리는 너무너무 가진 것도 많고 누리는 것도 많고 너무너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또다시 삶의 장면에 들어서면 우리는 만족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늘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것을 봅니다.

이러한 우리 삶의 모습을 보며 내가 왜 이렇게 미혹하게 살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어요. 지금도 아무것이 없어도 그동안 누린 것만 해도 감사한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우리의 처음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저는 늘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있는데 16년 전에 창립 예배드리고 그 다음날 첫 번째 주일예배를 드릴 때 여기 맨 앞줄에서 두 번째, 세 번째 줄 같은데 제가 볼 때 오른 쪽 요쪽 두 칸 있었는데 두 번째 셋째 줄에 딱 한 분이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가 그때를 늘 생각하면 요즘 여러 성도들 계셔서 같이 예배를 드리면 늘 감사한 것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딱 한 명이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같이 모든 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또 하나님 앞에 같이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보면 늘 생각해요. 우리의 처음을 생각하는 것은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내 출발이 어땠는가? 나의 처음의 모습이 어땠는가?
우리가 이 세상에 나올 때 가지고 있는 것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기쁘고 그 기쁨과 감사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출발을 생각하면 감사하고 기쁘고 감사와 기쁨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사명을 일으키고 감사하기 때문에 무엇인가 해야 할 것이 있다는 사명감이 우리 삶을 튼튼하게 만들어 줍니다.

항상 처음에 예배드릴 때 우리는 성도 한 명이 예배드렸던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속에도 내가 이 세상에 왔을 때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고 아는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나는 세상에 아무런 저항 능력도 없었는데 내가 이와 같이 모든 능력을 갖춰서 있는 것 보면 그것 자체가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스스로 만족할 줄 알고, 행복할 줄 알 때 사명이 생깁니다. 우리는 그 사명이 있을 때 더 새로운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는 힘도 생기는 겁니다.

우리의 사명은 기쁨과 감사, 그리고 행복 속에서 내가 그 모든 것을 그냥 누릴 수만은 없다는 보은의 심정, 나눔의 심정, 자비의 심정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사명이 생기는 겁니다.
나만큼 가지지 못한 사람에 대한 배려의 마음, 측은한 심정, 사랑과 나눔과 베풂의 심정이 일어날 때 우리마음의 사명은 불일 듯 일어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명이 생길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도 동시에 소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면 힘도 생깁니다. 이제까지 발휘하지 못했던-발휘하지 않았던-땅에 묻어 두었던 우리의 능력과 힘들이 새롭게 발각되어서 우리는 갈고 닦아 빛내며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없던 것이 아니라 다만 묻어두었던, 감추었던 것을 찾아서 활용한 것이 사명으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는 힘입니다.
우리는 슬프고 가련한 삶이 소망이 아니라 내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고 내 스스로를 당당히 여길 수 있는 삶의 자존감이야 말로 우리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믿음의 백성이 하나님 때문에 또한 기뻐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했을 때 다른 삶의 사실들은 우리를 기쁘게 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더 고통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삶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근본이고, 힘이고, 능력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해야 그 기쁨으로 인해서 우리 삶에 기쁨을 누리고 결국 기쁨 때문에 우리의 삶의 일들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했더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주셔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함 자체가 축복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것을 잃어버리게 되면 언제든지 현상적인 면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화면속의 그림자-영상 속에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영화 속의 화면에서 맹수가 우리에게 맹렬히 쫒아온다고 한다면 우린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화면속의 그림일 뿐입니다. 삶의 상황이 아무리 거칠어도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아무리 내 삶의 현상들이 나를 압박해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대로 이루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는 나를 위하여 진행될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 것 때문에 우리가 슬픔과 기쁨을 결정한다면 우리 삶에는 기쁨이 가득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슬픔으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인간들. 능력이 있었습니다. 힘도 있었고 가진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벨탑을 쌓았을 때 결국 그들에게는 비극이 일어났던 것을 봅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 화려함과 그들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방향으로 갔을 때 그들은 슬픔을 겪게 됩니다.
소돔성의 비극을 압니다. 하나님 없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이 결국 우리의 슬픔인 것을 우리는 압니다. 삶의 순서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함을 터득한 백성이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되 결국 어떤 것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수용이 수용의 은혜까지 포함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쁨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소망의 기쁨, 소망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체험하는 은혜의 축복들, 그리고 내게 어떤 결과가 주어져도 그것을 기쁨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연한 의지와 결의, 그것들이 우리에게 기쁨입니다.
소망이 있고, 극복하는 과정이 있고, 어떤 결과에 대해서도 내가 의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에게 없어지는 것이 두려움이고 생기는 것이 자신감입니다.

사람이 어떤 때에 두려움이 팽배하지요?
내가 바라지 않은 결과가 오면 어떻게 하나하는 초조함 때문에 두려움이 오는 겁니다.
‘어떤 결과가 있어도 나는 거기서 개의치 않아.’ 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두려움이 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이 담대하고 당당해야 되는데 우리는 세상 사람에게는 불쌍히 여김 받으면 안돼요. 우리는 하나님께는 불쌍히 여김 받되 세상 사람에게는 당당하고 수려한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바로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어떤 결과라도 기쁘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만족할 줄 아는 은혜를 소지한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도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독교인의 자신감은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영적인 자신감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영적인 자존감과 자신감은 언제나 우리를 자신 있게 만듭니다. 이세상의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 구하고 그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소원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그 소원의 결과를 감정의 선호에 의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 자체를 기뻐함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서 점점 발전하게 되면 내가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선호의 개념을 넘어서 내게 있어지는 사실을 하나님의 뜻대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의 의지가 발동하게 됩니다.
음식도 처음에는 가미를 하고 조미를 해서 맛을 내는 것이 훌륭한 음식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점점 자연식품을 찾게 됩니다.

산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아무리 우리 인간들이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도 자연 그대로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내 뜻을 계획하고 이루어지기를 소원한다한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는 섭리를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 두 번째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안 돼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물어보면 아마 한참 생각할 겁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내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면 행복할까요? 우리는 잘 알죠.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내 생각의 오류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내 생각이 온전할 수 없어요. 따라서 내 생각이 원하는 대로 가다가는 멸망의 지점으로 간다는 것도 잘 압니다. 결국 내 뜻대로 안 돼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행복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여러분, 자연을 능가할 수 있는 인생의 지혜는 아무도 없어요.
자연을 능가할 수 있는 힘도, 자연을 능가하는 것은 아무것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자연의 부속일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장 편안할 때가 언제입니까? 나무도, 풀도, 돌도, 하늘도, 달도, 별도 모두가 다 자연의 일부고 나도 그 가운데 일부라고 생각할 때 우리 마음이 편해지지 않습니까? 자연 속에 스며져 있는 우리의 모습, 하나님의 섭리 속에 스며져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경우도 나와 함께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여러분 살면서 제일 곤란한 것이 뭐죠? 창피함이잖아요. 부끄러움이지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라면 어떤 경우도 부끄럽고 창피하지 않습니다.
우리주님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누추하고 부끄러운 겁니다. 가장 창피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창피한 그 십자가를 가장 영화롭고 모든 사람이 바라보는 아름다운 상징으로 삼아버리셨습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떠한 여건과 상황도 기쁨의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나 혼자의 힘에 의하여 움직여지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움직여지고 있다면 결국 과정을 거쳐 최종적인 승리가 내게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자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을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 하나님의 일을 기대합니다. 불안해하지 않고 불만해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기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최종적인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기쁘게 해 주심을 믿고 어떤 과정과 형편에도 기뻐하고 의연하고 만족해 할 줄 아는 것이 믿음이고 당당함이고 자신감입니다.
여러분, 앞을 내다보는 사람은 분명히 다릅니다.
답을 알고 내용을 보는 사람은 분명히 다릅니다.

여러분, 월드컵경기를 하는데 우리나라가 3:2로 이긴 소식을 들었어요. 우리가 시간이 없어서 나중에 다시 방송하는 것을 봤습니다. 전반전 봤더니 2:0으로 졌어요. 이 사람이 분개하겠습니까? ‘이렇게 지다니’ 하고 화가 나서 텔레비전을 끄고 일어나겠습니까? 아니에요. 전반에 어떻게 2:0으로 졌는데 후반에 어떻게 세 골을 넣어서 3:2로 이겼을까? 그 기막힌 장면을 한 번 보자하고 끝끝내 텔레비전 앞에서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여유가 있어요. 답을 모르고 볼 때는 그냥 또 공 잘못 찼다고 선수들 욕하고 감독 욕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다 알고 있으면 욕 안 해요. 어 야 거 괜찮네. 이렇게 애기 한단 말입니다.
기쁨의 기준이 무엇인가?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결과에 대한 수용의 의지가 박약하면 우리는 언제나 흔들리고 쓰러지고 마는 유약한 성도가 되고 맙니다.
사람이 아주 확고한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때에 확고하죠?
결과에 대한 수용의 의지가 강할 때입니다.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면 그 순간부터 사람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초조해지거든요.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어떤 결과도 나는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결정해 놓으면 흔들리지 않는단 말입니다.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데 우리가 흔들릴 이유가 있겠습니까?

저는 믿음은 자라면서 슬픔을 억지로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기준이 틀렸다고 깨닫는 겁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이 됐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아픈 상황, 가슴 아픈 일들을 볼 때 내가 믿음으로 저것을 극복해야지 하고 감내하며 마음 쓰리지만 다가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요즘 점점 드는 생각은 무엇이냐면 믿음은 그것보다 더 한 걸음 나아가서 이제 내 앞에 아프고 슬픈 상황이 있을 때 내가 그것을 감내하며 인내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것을 슬픔이라고 봤던 내 기준과 사고가 틀렸구나 하고 내 기준 자체를 바꿔버리는 겁니다.

‘아,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으면 이게 기쁨이다. 그러면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지’ 가 아니라 ‘아, 저게 기쁨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기쁨의 기준자체를 다르게 설정하는 겁니다. ‘내가 이제까지 잘 못 알고 있었구나! 하나님이 나에게 기쁨을 주시는데 왜 나는 저 기쁨을 슬픔이라고 생각했을까?’ 하고 내 기준 자체를 바꿔버리는 겁니다. 떤 사람이 되는 겁니다. 딴 사고와 세계 속에 사는 겁니다. 완전히 우리자신의 삶이 바뀌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까 우리는 이제까지 너무나 힘들게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참음과 인내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를 바로 알고 누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가면서 참 많은 것을 느끼죠?
평생 살아가면서 내가 평생 내 앞에 있는 딱 한사람 바꾸기 위해서 애썼는데 내 평생 살면서 깨달은 것은 내 앞의 사람을 도저히 못 바꾸겠다는 거잖아요.
‘내 앞의 사람은 바꿀 수 없고 내가 바뀌어야지 살겠구나!’ 하는 것 우리 깨닫잖아요.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아무리 바꾸려고 해 봐야 바꿔지나 안 바꿔집니다. 내가 바뀌는 것이 행복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은 내 앞의 모든 현상을 다 바꾸려고 한다면 우리는 바꿀 수도 없으려니와 절대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내 앞에 있는 모든 것에서 기쁨으로 그것을 누릴 수가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자랑스럽게 승리를 선언하잖아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이유가 뭐예요?
어떤 어려움도, 어떤 기쁨도, 나는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다 소지하고 그 가운데 어떤 것도 나는 기쁠 수 있도록 내 마음이 구조를 완성했다는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 우리는 진정한 승리의 선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는 선언을 해야 합니다.
자족함으로 감사하고 주님이 주시는 승리를 선언하고 실천하는 성도가 돼야 합니다. 우리의 감사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서 감사가 아니라 내게 주어진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서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 인격이 주어져서 감사한 것입니다. 상황의 변화는 일시적이지만 그것을 소화하는 인격의 변화는 유구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선언하고 그 일을 실천하고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삶의 기쁨은 결국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스스로 족함을 느끼는 마음이지요.

세상보다 큰사람 되어 세상의 어떤 일보다 의연하고 그것을 품어 능가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돼야 합니다. 승리를 선언하고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놀랍게 발전하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루는 승리는 우리의 사상과 예측을 넘어섭니다.
모세가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기드온이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나도 생각을 못했던 일들이 우리들에게 생각되어지고, 이제까지 가보지 않은 길가고, 이제까지 해보지 않은 일하며, 우리가 이제까지 꿈을 꾸지 못했던 일들이 우리 삶의 실제적인 영역들이 됨을 보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승리를 확신하고 선언하고 실천하는 성도라면 그에게는 늘 새로운 삶의 지경이 열려지고 사명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새로운 사명을 바라보는 삶의 지경은 날마다 확장되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명을 바라볼 때 우리들에게 어려움이란 스쳐가는 바람일 뿐입니다. 늘 말씀드리지요. 살다보면 어려운 일 있습니다. 어려운 일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문제일 뿐입니다.
자 한번 따라서 합시다.
“큰일도 없고 놀랄 일도 없다.”
다시 한 번 서로 옆의 사람에게 인사합시다.
“큰일도 없고 놀랄 일도 없다.”
우리 주변에는 큰일도 없고 놀랄 일도 없습니다.
큰일도 없고 놀랄 일도 없는데 그것을 크게 보고 놀라기 때문에 우리가 실수하고 우리가 초조해하기 때문에 우리가 잘 못 짚어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큰일도 없고 놀랄 일도 없습니다. 다만 처리하면 될 뿐입니다.
큰일도 없고 놀랄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처리하면 될 뿐입니다.
우리는 괜히 우리 앞에 있는 모든 허상을 너무 크게 봐요.
어떤 순간도 우리는 그 순간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게 지혜가 아닙니까?
거기서 경망하고 거기서 우리가 떨고 아니면 또 우리가 우왕좌왕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도움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게 어떤 어려움이 주어져도 그 어려움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 무엇인가?
이것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내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의 역사를 이루어내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위기를 관리하는 능력과 어려움가운데 일어나는 복원력을 발휘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역사를 이룰 뿐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지금의 이 모습이 나중에 어떤 모습으로 될 것인가를 우리는 예측하여 그 일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나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어떤 일을 이루실 것인가를 기대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어떤 일을 이루실까? 우리를 기대하고 관리하고 또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룰 영화로운 모습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으로 인해 새로운 능력을 충전 받는 영성의 개발과 그 영성으로 우리 삶의 실제를 이루는 해박한 지식과 능력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완성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치우치지 않는 세상 속에 승리하는 하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우리 분명한 것은 하늘의 백성이지만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과 이 세상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다 우리는 충족시켜야 합니다. 즉 우리는 하늘에 살지만 그 법칙과 원칙에 의해서 지배되나 세상에 살면서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너무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기쁘고 감사한 일일 뿐입니다.
세상 우리의 대적일 때도 있지만 우리의 대적이 아니라 우리가 품어 섬겨야 될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인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기쁨을 체험한 자는 결국 다른 사람을 기쁘게 만듭니다.
저는 늘 이런 말씀을 드리는데 본인이 기뻐본 사람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왜죠? 본인이 기쁨이 뭔지도 모르는데 다른 사람을 어떻게 기쁘게 만듭니까?
본인이 행복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본인이 사랑을 받고 사랑을 느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이와 같이 기쁨과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그 기쁨을 나만 누리기 너무나 안타까워 다른 사람에게 줄 수밖에 없는 이와 같은 사람이 돼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은 삶속에 은혜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실제가 돼야 합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마음에 강하고 담대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두려움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움의 제거는 뭐죠?
내게 어떤 결과가 주어져도 그것 때문에 나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내게 어떤 결과가 주어져도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나는 그 가운데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삶의 구조가 우리에게 형성되면 됩니다.
만족할 수 있는 삶의 구조, 내게 자족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자신 있고 용기 있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담대한 선언이, 승리의 선언이 우리들에게 있어져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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