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말씀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 (시 119:174)

  • 잡초 잡초
  • 218
  • 0

첨부 1


말씀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시 119:174)

사람은 누구나 편안한 환경에서 고통 없이 살고 싶어 합니다. 실제로 고통을 받게 되면 평안한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늘 평탄한 삶만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때로는 고난과 시련 가운데 있게 하십니다. 첫 번째로 죄와 잘못이 없어도 우리를 특별하게 단련시키실 목적으로 불같은 시련이나 혹은 견디기 힘든 결핍 가운데로 데려가실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의 죄와 악의 결과로서 그런 깊은 징계의 고통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선택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악한지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버리고 죄를 선택한 결과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열매로 맺히는지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히 훈련시키실 목적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죄 때문도 아닌 제 3의 원인으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태도 같은 것인데 죄라고는 말할 수는 없는 우리의 잘못된 태도로 끊임없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옮기기를 좋아하는 태도 때문에 커다란 분란을 일으키고 곤경에 처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습관적으로 약속을 지키지 않아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에게 다양한 고난과 어려움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 처하게 되었든 그런 곤경에 처한 당신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또 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되었든지, 아니면 특별한 훈련의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하셨든지, 자기의 잘못된 삶의 태도로 인해서 삶의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든지 간에 그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만이 그 어려움 속에서 자신을 건져주실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당신께 구하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입니다. 훈련을 목적으로 주어졌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벗어나오려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깊이 몸부림치는 가운데 그 훈련의 목적이 성취됩니다. 또 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은혜로써 구출되어 나오는 과정을 통해서, 거기에서 자신의 죄가 정결케 되고 은혜의 능력을 다시금 회복하는 성화의 작용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태도가 잘못 되어서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I.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니

그것을 오늘 성경에서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니”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에서 “사모한다”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로 “기다린다”는 의미로, 간절한 그리움을 가지고 기대하는 것, 학수고대하는 것입니다. 즉 ‘나는 주의 구원을 학수고대하였사오니’ 그런 뜻입니다. 시인은 여기에서 두 가지를 간절히 사모하였는데 그 첫 번째가 어려움과 곤경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과 곤경이 어떤 것인지는 여기에서 알 수 없습니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든, 깊은 고통과 어려움 속에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사모한 것입니다. 반드시 여기에서 벗어나야 되겠다고 하는 간절한 사모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희망하는 것과 갈망하는 것 사이에는 매우 커다란 차이점이 있습니다. 희망하는 것이 그냥 바라는 소원이라고 한다면, 갈망하고 사모하는 것은 단순한 소원을 넘어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입니다. 이 단순한 희망과 갈망 사이에는 두 가지 차이점이 있는데 첫째는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지만 성취된다면 더 만족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갈망은 미래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현재가 견디기 힘들게 고통스러운 것, 이것이 갈망입니다. 두 번째 차이는 단순히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그 희망을 위해서 희생할 각오가 적거나 아예 없습니다. 그러나 갈망은 희망을 능가하는 바람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을 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가 좋은 신자이고 싶지 않겠습니까. 신자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좋다고 하는 모든 것에 대해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좋은 신자도 되고 싶고, 충만한 은혜도 받고 싶고, 하나님께 칭찬도 받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희망일 경우에는 아직 좋은 신자가 되지 못했어도 고통이 없습니다. 좋은 신자가 되면 더 좋을 것이고 더 행복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냥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망을 가진 사람들은 다릅니다. 갈망을 가진 사람들은 좋은 신자 되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좋은 신자가 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자신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이 괴로울 뿐입니다. 이것이 갈망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어느 주석가는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끊어졌을 때”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시편 42편의 시인처럼 법궤도 없고 성소도 없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가운데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된 사람(시42:3), 그가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애가를 보면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짓밟히고 더 이상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사람들은 장롱 밑에 감춰놓았던 보물들을 꺼내어 양식을 사러 다니기에 급급했습니다(애1:11).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고, 주님을 경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시편 42편의 시인은 하나님을 뵙지 못해서 주야로 눈물이 음식이 되었고,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식을 구하러 다녔다는 것입니다. 시편 42편의 시인은 하나님을 갈망했던 사람이었고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희망했을지는 모르지만 갈망하는 사람들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신앙의 쭉정이와 알곡들이 가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어려움 속에 있을 때에 그 어려움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며 벗어나려고 하는 간절한 사모함, 이것이 믿음의 척도가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자신의 힘으로는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 속에 처해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여호와의 구원을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사모한 것입니다. 첫째로 구원해 주시는 그 능력을 사모했고, 둘째로 자신을 그렇게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이 하나님뿐이시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 있는 사람의 갈망입니다. 환경적인 깊음 속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갈망이든, 혹은 영혼의 깊음 속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갈망이든, 이 시인에게는 어떤 의미에서든 갈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건져주시지 않아도 살만하고 견딜만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이 나타나서 자기를 건져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흐느끼는 목마름이 이 시인의 시 가운데 묻어 나오지 않습니까.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는 태도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사는 성도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런 강한 사모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가까이 계셔서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일에 있어서 인색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 싶다는 희망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많지만, 은혜를 받는 일에 생사를 거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습니다. 자기가 변화되고 새로워지기를 원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새로워지고 변화되는 그 일에 생사를 거는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사모함이 필요합니다. 많은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주님의 인자하신 그 은혜의 역사를 못 보고 핍절하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큰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역사를 바라보고 그분의 긍휼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커다란 고통 속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이 없으면 주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작은 고통 속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그 은혜에 대한 사모하는 목마름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자비를 아주 놀랍게 경험하게 됩니다. 당신 자신의 은혜를 향해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고 그 은혜를 나누어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바라시는 바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절히 찾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진정한 하나님의 바람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잃어버린바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찾아 나서시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거하다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 불순종하고 옛길로 돌아설 때, 다시 육체에 속한 옛사람의 성품대로 살고 죄의 지배 가운데로 들어갈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영혼과 환경의 어두운 밤이 찾아와서 곤고하고 괴로운 시간을 보낼 때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찾으시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그가 결국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인격적으로 승복할 때까지 그를 찾아 나서십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바로 집 떠난 인간,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이탈한 인간을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의 여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주님 없이 살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폭풍과 시련, 곤고함과 괴로움 속에서 마음문턱 앞까지 찾아와서 피 묻은 손으로 자신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바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가까이에 계십니다. 우리가 비록 죄를 짓고 불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는 그 순간까지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열망을 막아설 수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 죄까지도 말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찾아가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우리를 찾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신 당신을 그렇게 찾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괴로울 때나 곤고할 때나 시험이 올 때나 심지어는 죄 가운데 있을 때에도 하나님 당신을 간절히 찾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주님을 간절히 찾는 신앙의 자세는 모든 신앙의 미덕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많은 선한 일을 하고 반듯한 신앙생활을 해 나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 없이 행하는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맛을 잃어버린 열매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바친다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런 삶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입니다. 어려움에 처하고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그런 정신이 배어 있습니다. 그것이 어려움을 당한 성도의 올바른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간절히 당신을 찾는 마음을 불어넣어주시기 위해서 어려움 가운데 두셨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그냥 견디는 것,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의 열매는 어려움을 견디면서 반드시 주님께 무엇인가를 열렬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앙의 열매는 거기에 만성이 되어 환경에 적응해버리거나 혹은 견디면서 이를 악물고 마음에 악심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그 마음에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어려움 속에서 건져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해야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그가 진실로 주님을 찾는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II.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두 번째로 시인은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으로 보면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법도는 나의 기쁨들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쁨이 복수로 나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그 성도를 구출하시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환경적인 깊은 어려움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영혼의 깊음을 동반합니다. 환경적인 깊음 속에서 구원이 필요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에 영혼도 함께 깊음 속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에서 건지시는 방법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어려움 속에 묶여있는 그의 영혼에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신자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환경으로 인해서 너무나 곤고하고 괴롭고 마음이 가난해져 이제는 주님 밖에 의지할 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이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리니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 그 말씀으로 기쁨을 맛봅니다. 그런데 환경적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까? 그런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구원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니 하나님께서 그런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내면의 세계의 묶인 것부터 먼저 하나님께서 풀어주시고 그는 하나님께 더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녹이는 기도와 은혜의 갈망을 통해서 하나님이 환경을 바꾸어 나가십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한다는 이야기는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동의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드 영(Edward Young)이라고 하는 유명한 구약 연구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은 이후로 창조된 모든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신실함으로 통하는 것임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거기 있을찌어다.” 말씀 한 마디로 있게도 하시고 또한 변화케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말씀과 동일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이 어려움 속에서 건져내 주실 것이라는 굳센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하신 그 말씀에 깊이 집중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진심으로 사모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려움 속에서 고통을 받다가도 거기에서 회복될 때가 되면 환경부터 먼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환경과 사람,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워하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활짝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돌아보면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딱 하나, 마음이 변했습니다. 마음에 변화가 계속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말씀이 그리운 마음이 들고 또 그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들고 그 말씀에 자신이 깊이 녹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에 붙잡힌바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곧 구원을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며 온 마음을 모아 주님이 나에게 하실 말씀을 기대하는 것, 이것은 우리의 영혼의 참다운 변화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과 환경, 이 모든 것을 뒤집어엎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처하고 있는 인생의 어려움들은 각기 다릅니다. 똑같은 이유 때문에 고통을 받아도 색깔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처하고 있는 어려움이 아무리 종류가 다르고 다양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들을 고치시는 강력한 은혜의 힘, 놀라운 능력의 역사, 은혜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게 된 인생의 상황은 너무나 다양하고 또 어렵다고 할지라도 결국 해답은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히스기야 임금은 나라가 적군에게 포위되어서 멸망되기 직전에 처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 앞에 구원해달라고 매달리며 도움을 구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응답을 받았습니다(사37). 한나는 남편의 첩은 아들을 낳았는데 자신은 무자(無子)하여 아들이 없어서 첩에게 구박을 받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서글프고 서러웠습니다. 위대한 인물을 낳아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물줄기를 바꾸어 놓겠다고 하는 그런 원대한 야망이 있는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성소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술에 취한 여자처럼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말씀으로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삼상1). 어떠한 상황이든 대답은 하나님을 만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을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어려운 상황에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그 사모함이 진실하다면 그는 환경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매달릴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이 인생의 문제에 개입하셔서 역사해주시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 인생의 벼랑 끝에 내몰린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실 수 있으시며 주님이 말씀하시면 나의 환경과 다른 모든 것들은 그 말씀에 굴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믿음, 그래서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고 은혜를 구하는 사모함,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갈망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주님을 진심으로 찾고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오히려 구원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상황, 누구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단절된 상황, 자신에게 있는 자원으로는 도저히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위기의 어려운 상황이 오히려 하나님만 바라보기에 적합한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어려움에서 견뎌낼 자원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 속에서 자기를 도와줄 다른 사람도 없습니다.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간절히 바라고 주의 말씀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를 건져내어 주십니다. 그 때에 그 갈망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III. 구원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여기에서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절박하게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럭저럭 잘하고 있고 부족한 것도 별로 없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 영혼과 육체가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없는 것은 자신의 환경과 모든 처지가 꼭 그래야할 필요가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도 없고 은혜의 놀라운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세상으로 가보고 싶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도 한번 그렇게 멀리 떠났다가 주님을 극적으로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모르는 이유는 눈을 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밝히 볼 수 없고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입니다. 자신은 한 번도 아버지 곁을 떠난 적 없이 아버지 집에서 열심히 일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맏아들은 아버지 집에 있었던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있고 이러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행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련한 인간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온전하고자 하면 할수록, 정결하고자 하면 할수록 그는 자기 안에 있는 더 많은 불결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온전해지지 않은 자신을 보면서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악함을 생각하면서 깊이 절망하는 사람은 거룩해지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죄 가운데 살면서 그런 갈망이 없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간절해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하나님께 붙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많이 회개하고 눈물이 가장 많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고 싶어 한 때가 언제였습니까?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있을 때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못함 때문에 마음 아파하던 때는 주님을 사랑할 때, 자신은 왜 이렇게 밖에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는지, 주님이 내게 보여주신 사랑에 비해서 내가 그분께 보이는 사랑은 얼마나 초라한지, 내가 이런 식으로 주님을 사랑하면서 어떻게 주님 앞에 가서 주님을 뵈올 수 있을지 하는 마음으로 꽉 차 있을 때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 가운데 처해있고 남이 알지 못하는 어떤 시련이 있고 우리의 죄,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의 영혼에 어떻게 깊이 드리워졌다고 할지라도 이 모든 것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우리들이 주님 앞에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수련회가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내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 영혼의 곤고하고 어려운 환경으로부터 벗어나야 되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영혼의 작용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만나주십니다. 사모하게 하십니다. 그리워하게 하십니다. 은혜를 갈망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게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성경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정말 우리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 안에 그런 자원이 있습니까? 얼마동안 그렇게 산다 하더라도 계속 그렇게 살 수 있는 자원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위로부터 부어주시지 않는데 우리들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은혜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제 은혜를 받았다 하더라도 오늘 새로운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제 만나는 어제 족했고, 오늘 아침에는 또 하루를 살 만나를 필요로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오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은 약한 자를 강하게 만드시고,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고, 그리고 병든 자를 치료하셔서 다시 주님을 위해서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지난날의 실패를 많이 생각해본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지난날의 후회와 우리의 잘못을 곱씹어본들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엎드러진 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쓰러진 자를 다시 일으켜 세워 자기의 길을 걷게 하시는,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환경에 있다 하더라도 또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마음이 하나님만을 향해 고정되고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간절히 목말라하며,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고치실 것이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기쁨이 된다고 하는 신앙고백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사람들을 말씀으로 일으켜 세우시고 고치십니다. 준비된 사람들을 만나주시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시고, 고침 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고치시고, 일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에 참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김남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