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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물을 밝히 보는 지라 (막 8: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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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막8:22-26

진정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사는 사람마다 다 개인적인 체험들이 있습니다. 한전 원자력연료 사장인 윤맹현 장로님의 간증을 읽어보았습니다. 장로님은 서울대와 UCLA에서 핵공학 석․박사 학위를 받으신 분으로 주님 앞에 나오기 전까지는 참 교만했다고 합니다. 소위 일류학교를 나오고 인격적으로 남에게 흠을 보이지 않아 자신 정도면 썩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항상 마음 깊은 곳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고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고 불안하고 초조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에 유학을 가 전도를 받고 교회를 나가 성경 공부를 하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고혈압 부정맥 불면증 소화불량 등으로 수년간 고생하시며 수없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도 전혀 차도가 없으시던 어머니가 미국에 오셨는데 저녁예배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목사님으로부터 안수를 받으시던 어머니가 깨끗하게 치유받는 기적을 목도하고 하나님은 이론적인 하나님이 아니고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장로님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고 합니다. 영적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영적 세계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린 것입니다. 말씀이 꿀맛처럼 달았고 성경에 나오는 귀한 영적 비밀을 감추고 살 수 없어 자신의 집에 오는 손님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핵공학을 전공한 박사가 신학을 공부한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UCLA 유학생들에게 말씀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귀국하여 직장 생활하면서도 남보다 1시간 먼저 나가 사무실에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지가 20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명함에 하나님 말씀을 써넣고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인사할 때부터 내가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고 산다고 합니다. 직장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직장에서 30일 또는 40일 기도회를 연 4~5차례 가졌다고 합니다.

한전 연구원장에 취임했을 때도 취임사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앙 중심으로 경영해나가겠다고 선포했다고 합니다. 한전 전무이사가 되었을 때도 임기 3년을 시종 하나님을 찬양하며 전도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장로님은 잠언 3장 5~6절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 3:5-6)” 늘 불안하게 할 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진실로 구주로 영접하고 난 후 변화된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영적 눈이 열리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하늘의 신령한 것을 보게되고 듣지 못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영적 눈이 열리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눈이 있습니다. 육안, 심안, 영안입니다. 육안은 물질을 보는 눈입니다. 심안은 마음을 보는 눈입니다. 영안의 영적 세계, 신령한 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아무리 실력이 있고 눈이 좋아도 신령한 하나님의 세계는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머리가 둔치이며 들에 핀 꽃을 보고 아름다운 탄성을 지르지 못하듯이 아무리 머리가 좋고 실력이 있어도 영안이 열리지 않으며 영적 세계를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한 때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그 많은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 귀가 열리지 않고 영적 눈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보았듯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라고 책망을 합니다.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열 두 바구니를 거두고 일곱 개로 4천명을 먹이시고 일곱 바구니를 거두었는데도 여전히 먹는 걱정을 하고 있는 제자들을 보며 안타깝게 예수님이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쳐주심으로 다시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마가복음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첫 시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가장 먼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해 주었습니까? 1장 11절을 보십시오.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막 1:11)” 세례 받으실 때 하나님께서 증명해 주시고 있습니다. 변화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막 9:7)”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신 것을 증명해 줍니다. 두 번째 누가 증명해 줍니까?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막 3:11)”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막 5:7)” 귀신이 증명해 줍니다. 영적 세계를 우리 인간보다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해 주기 위해 폭풍을 잔잔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심으로 이미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이신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제자들을 밝히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자들에게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막8:18에 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내어 쫓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바다를 잔잔케 하는데도 예수님이 자연을 초월한 초월자이신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아주 믿음이 없는 땅 벳새다에서 맹인을 눈뜨게 하심으로 우리의 육안이, 심안이 영안이 뜨이길 교훈하고 있습니다.

1. 맹인의 불행

눈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작년에 한 목사님을 방문하여 울면서 기도를 드리고 왔습니다. 예전에 제가 서울에서 부목사로 섬기고 있을 때 전도사님으로 함께 사역하시던 분입니다.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고 마음도 참 좋으시고 열정도 있으시고 실력도 있으신 분이십니다. 당시 영문책을 많이 번역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천안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섬겼는데 사모님으로부터 당뇨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가보니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좋은 실력도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눈물만이 나왔습니다. 기도하면서 울었습니다. 주위 사람도 그렇게 안타까운데 본인이야 얼마나 답답하고 어렸겠습니까? 그의 인생의 최대 관심사항은 눈을 뜨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을 뜰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포자기했을 것입니다. “나는 일평생 눈을 뜰 수 없다. 내 인생은 이것으로 끝난다.” “이렇게 맹인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육적 눈이 뜨이지 않는 것도 불쌍하지만 심안이 열리지 않는 것도 불쌍한 것입니다.

제 친구 목사님 딸이 아주 잘 생기고 예쁩니다. 그런데 대학생 나이가 되었는데도 자폐증으로 초등학교 2-3학년 수준도 정신 연령이 되지 않습니다. 분별력이 없습니다. 외모가 잘 생겼으니 많은 남자 아이들이 따라다니는데 그런 경우는 부모는 키가 크고 잘 생긴 것도 짐덩어리이고 걱정거리입니다. 한 아이로 인하여 온 식구가 고통받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보다 더 불쌍한 것은 영안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공부도 했고 가진 것도 있는데 동물적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영적 세계에 대하여 맹인입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암 8:11)”라고 말씀합니다.

2. 불행을 돕는 사람들

그러나 그의 자포자기에도 불구하고 그를 돕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벳세다에 이르렀습니다. 벳새다는 참으로 믿음이 없는 마을이었습니다. 주님이 많은 능력을 행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불신의 도시입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했습니다.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눅10:13)”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눅10:14)” 그렇게 불신의 도시였지만 그래도 불쌍한 맹인을 도와 주는 자비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맹인을 데리고 가면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현실을 보고 부정적으로 비관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예수님께만 나아가면 맹인의 인생이 바꾸어질 것이라는 긍정적인 희망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누군가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나에게 다가온 난제를 풀 때 누군가 예수님께 가지고 나가면 될 것을 알려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호의적이면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예수님 때문에 참으로 선을 베풀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들은 문제를 풀어 줄 수 없지만 예수님께 나아가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이들은 믿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인생에 있어서 복입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옥스퍼드대 교육심리학 교수가 된 정미령 교수가 계십니다. 어머니가 아주 신앙이 좋았다고 합니다. 어릴 때는 어머니의 뜻에 순종하여 그냥 교회에 나갔지만 대학에 다니면서 신앙에서 멀어졌다고 합니다. 대학 시절 믿지 않는 이성 친구들을 사귀면서 쌍쌍파티, 봄이면 등산,여름에는 대천해수욕장, 가을이면 안양 포도밭을 돌아다니면서 신앙으로부터 멀어졌다고 합니다. 동정녀설 탄생이 믿어지지 않았고,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는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오병이어의 기적은 좀 잘못된 얘기로 들리게 되었답니다. 매사에 의심투성이가 되었답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떠나는데 기도하시는 어머니가 미화 200달러를 주며 조용히 훈계하셨답니다. "너는 용기있는 아이니까 넓은 바다에 나아가서 훨훨 헤엄을 쳐보아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네 백이다. 걱정하지 말아라. 기도하면서 간구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신다."

그런데 어머니의 믿음처럼 영국에 도착하여 런던대 석사과정에 입학하자마자 기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첫 학기부터 학비와 기숙사비 등 전액 장학금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때 비로소 의심의 커튼을 걷어내고 어머니의 말씀처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진짜 필요한 것은 모두 주시는구나'라고 믿게 되었답니다. 밤낮으로 공부하게 되었고 옥스퍼드대에 도전했고 다시 에든버러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게 되었는데 학위 시험장에서 논문 심사를 하던 브라이언트 교수가 옥스퍼드대 실험심리학과 연구 담당 전임으로 특채했다고 합니다. 초라한 유학생 신분에서 옥스퍼드대 교수직을 맡게 된 것은 기적이었다고 합니다. 신앙 곧 믿음은 과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믿음이란 과학을 초월하는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기도로 하나님께 비밀을 털어놓고 직통전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 어머니의 믿음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안을 열어 하나님의 세계에서 활동하도록 우리를 돕는 사람들을 시시 때때로 세우십니다. 모세에게는 아론이 있었고, 다윗에게는 요나단이 있었고, 바울에게는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3. 눈을 뜨게 하시는 예수님/불행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시는 예수님

이들은 예수님께 와서 맹인에게 손을 대시길 구했습니다. 문제 해결의 열쇠가 누구에게 있는지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고난과 환란이 다가올 때, 인생의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다가올 때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 사업의 문제, 내 건강의 문제, 내 자녀의 문제, 내 행복의 문제에 대한 답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완전히 해결됩니다. 주님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참 안식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가면 이 맹인의 평생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그들은 맹인에게 손을 대기만 하면 고통받는 맹인의 눈이 열릴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소문을 듣고 그런 믿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치유할 때 손을 대는 것은 그 당시 관습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손을 대는 것이 능력이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방식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활 습관과 삶의 방식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세 가지로 행동을 하십니다.
첫째는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둘째는 눈에 침을 뱉으십니다.
셋째는 그에게 안수하십니다.

꼭 손을 대어야만 낫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견이고 미신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도 맹인의 눈을 얼마든지 뜨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꾸짖거나 비웃지 않습니다. 냉소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은 손을 대고 침을 묻혀주고 안수해 주는 것이 능력을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하나의 방식으로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대로 행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올 때 예수님보기에는 참 유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 보기에도 참 유치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유치한 것 책망하지 않고 그것 받아 줍니다.
법무부 정책기획단장 황교안 검사의 간증을 읽어 보았습니다.

10살 때 교회에 처음 나갔다고 합니다. 9살 많은 큰 누님이 몇차례 교회에 다니자고 설득하다가 말을 듣지 않자 교회에 나오면 10환을 주겠다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당시로서는 '왕사탕' 두 개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고 합니다. 어른이 생각할 때는 얼마나 유치합니까?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 때로는 사업의 문제 해결받기 위해, 질병 고치기 위해, 고민 풀기 위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어떤 경우일지라고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 처음 나가 사회를 보는 선생님이 찬송가 가사가 적힌 괘도를 펼치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 영생을 얻으리로다." 라고 찬양을 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몰랐답니다.

가사의 내용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듣는 것들이라 생소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답니다. 그 날 설교말씀의 요지도 역시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는데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이런 낯선 이야기들 때문에 여러 가지 의문들이 떠오르며 매우 큰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예수님을 믿겠다고 고백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니 왕사탕을 안주어도 교회에 누구보다도 일찍 달려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교회로 더불어 사는 세상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방언체험을 하고 많은 은사 체험을 하니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실하게 알게 되니 검사로 부임하는 청에서마다 새로이 신우회를 조직하고 직장 복음화에 힘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국에는 57개의 검찰청이 있는데 이제는 대부분의 검찰청에 신우회가 만들어져 있다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예수님께 나오면 외면하지 않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대리고 온 사람들의 요구에 대하여 어떻게 합니까? 한 번 터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만져주는 것이 아닙니다. 소경의 손을 붙들고 밖으로 데리고 갑니다. 심각한 중환자를 중환자 실에 격리 수용하듯, 병원균에 감염되지 않도록 무균실에 넣듯이 그를 홀로 주님을 대하도록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 단독자로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그 많은 아이들 중에 나만 불러 빵집에서 빵을 사주면 얼마나 마음이 좋습니까? 그 단순한 행동으로 선생님의 속생각을 읽게 됩니다. 소경은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생각을 소경에게 전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이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 내가 너를 낫게 해 주겠다.” 예수님의 무한히 궁휼하신 마음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기 문제를 가지고 가면 우리를 외면하시분이 아니십니다. 사람들은 자기 입장에서 접근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늘 우리 입장에서 접근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고 그를 고쳐 주시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람들이 보이는 앞에서 기적을 나타내길 원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능력이 드러나는 것을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그것은 철저히 환자의 입장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자기를 선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 또 다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을 해결받는 사람이 아니라 그 일을 해결해 주는 자신을 탁월성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조그마한 자선을 통해 자신이 이들을 보고 자신이 명예를 누리길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예수님을 선전하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환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접근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현대인들은 비인간적이고 비위생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생각은 침으로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안수로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느낌으로 모든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맹인의 마음 속에 고정관념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 없는 맹인이 가지고 있는 의식의 세계로 내려 와서 침을 발라 줌으로서 그에게 고쳐주겠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병든 그 사람의 입장으로 내려와 그에게 눈높이를 맞추어 고쳐 주시겠다는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적이 5차례 나옵니다. 그 때 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매인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적극적으로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맹인은 상당히 소극적인 사람입니다. 간절성이 없습니다. 타인의 손에 끌려 나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그에게 독특한 과정을 통하여 믿음을 심어 주시길 원했을 것입니다. 환자에게 직접 회복과정을 체험케 함으로써 예수님을 더욱 신뢰하게 만들고 자 한 것입니다.

안수를 하신 후 무엇을 합니까? 대부분 사람은 안수만 하시면 낫습니다. 완벽하게 즉각적으로 낫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소경을 고치실 때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에게 “무엇이 보이느냐?” 물어 보는 것입니다. 영안이 어두워 볼 수 없는 제자들에게 떡 다섯 개와 일곱게도 오천명과 사천명을 먹이고 몇 광주리를 거두었느냐고 물어보는 것처럼 소경에게 물어 보는 것입니다.

이 때 소경이 말합니다.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바로 앞의 예수님이 보일 텐데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데 사람도 온전히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흐릿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나무를 보는데 나무를 온전하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원숭이인지 사람인지 구분을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원숭이에서 사람이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과 나무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나무의 생명이나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무를 베는 것도 살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물의 이치과 질서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예수님을 믿고 신앙 생활을 하지만 세계관, 인생관 , 신앙관, 역사관, 직업관, 주일관, 내세관 등이 아직은 희미합니다. 명쾌하지 못합니다. 혼합주의적입니다. 미진근할 때 음식은 썩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도 아니고 흑생 세상에서 고민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누군가 소개에 의해 예수님께 와 조그마한 체험을 받기는 받았는데 아직도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기도 응답받고 많은 축복을 받았는데 축복을 받고 보니 세상 문명이 세상 향략이, 세상 권세가 너무 재미있고 신앙 생활을 초라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 중심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쾌락 중심으로 삶의 매력을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삶으로 들어 가려고 하면 무엇인지 손해 보는 것같은 생각이 드른 것입니다. 명쾌하게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람불면 수시로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 소경을 고치시는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답답한 모습의 연장선속에 있습니다. 이 사건은 제자들의 깨닫지 못하는 모습과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첫 번째 안수에도 불구하고 흐릿하게 보는 소경의 모습은 제자들의 깨닫지 못하는 모습과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늘 눈만 뜨면 빵문제로 염려를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영안을 열고 밝히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유령소동을 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있어도 보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돈밖에 안보이는 것입니다. 돈에 눈이 뒤집어진 것입니다. 사춘기의 아이들이 이성에 눈이 뜨이면 눈이 뒤집어지듯이 세상을 밝히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별력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만 의롭게 보이고 다른 사람은 도둑놈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보이지 않고 선생님으로 보이고 도덕 교사로 보이고 마음의 평안을 주는 스승쯤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구원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2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다시 안수하였습니다.
흐릿한 눈을 가진 자를 다시 만지셨다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볼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저가 주목하며 보았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제 자신 앞에 있는 예수님을 확실하게 보았을 것입니다. 자신을 고쳐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물을 밝히 보았습니다. 세상의 이치를 밝히 깨닫는 것입니다.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우연히 생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창조된 것을 확실하게 밝히 보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그리스도관, 분명한 세계관, 인생관 , 신앙관, 역사관, 직업관, 주일관, 내세관, 경제관 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3)”

제자들을 보십시오. 이 사건 이후에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하여 어떻게 고백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후에 어떻게 됩니까? 1세기를 바꾸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역사를 복음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밝히 보면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제28대 세브란스병원장에 봉사하고 계시는 박창일 집사님의 간증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6․25전쟁 때 전사하신 뒤 나는 홀로 된 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시절을 자랐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자질구레한 장사로 우리 3형제를 키우셨다고 합니다. 처음 교회에 나갈 때는 교회에서 나눠주는 노트와 각종 먹을거리를 받기 위해 갔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절에 다니셨지만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열심히 교회에 출석했다고 합니다. 사춘기를 지내면서 세상일에 더 관심을 갖고 교회에 나가지 않았으나 연세대학을 다니면서 다시 하나님을 그를 불렀다고 합니다. 전주 예수 병원 레지던트로 근무하면서 말씀 가운데 깨지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니 비전이 달라졌습니다. 삶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인생의 방법이 달라졌습니다. 교회의 집사로 봉사하는 데 많은 직분이 있지만 그 직분이 고귀하다고 고백합니다. 재활치료의 최고 전문가는 하나님이시고 재활치료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을 인정할 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브란스병원은 미국 장로교의 도움으로 세워졌는데 세계 의료선교를 통해 사랑의 빚을 갚고 싶다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한 번 불러 주시면 우리의 미지근한 신앙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다시 다시 다시” 안수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밝히 보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우리를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영안이 단 번에 밝게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영안이 열리면 믿음의 성장으로 더 높고 너 넓고 더 깊은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믿음의 눈으로 너 넓고 높은 세계, 더 깊은 세계를 보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다시 안수해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무수히 보여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연속적인 실패에도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친척 본토 아비집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본토는 떠나지만 아비를 떠날 수 없습니다. 국경선까지 모시고 옵니다. 거기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십니다. 아버지가 죽으니까 아버지를 떠납니다. 무자하지 친척을 떠날 수 없습니다. 롯을 데리고 갑니다. 결국 재산 문제로 싸움을 하고 나누어집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라는 혹독한 댓가를 치루게 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지 못합니다. 가뭄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이나 속입니다. 아들을 주겠다고 하지 나이가 들어 이제 인간적으로 다 끝났다고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다시 또다시 그를 찾아가셔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아브라함의 연속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도 반역을 하고 배신을 해도 하나님을 그들에게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십니다. 다윗의 밧세바를 간음하고 우리야를 살인한 심각한 죄를 지었음에도 다시 찾아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9)”
그리고 영안이 활짝 열려 만물을 밝히 보고 참 평안과 참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4.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 부탁하시는 예수님/불행한 삶으로 회귀하지 말라

눈을 밝히 뜬 그를 집으로 보냅니다. 아마 그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행한 그를 밝히 볼 있도록 만들어 주시고 동네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아직은 드러나게 메시아적 사역을 감당할 때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계획대로 메시아적 사역을 진행하는데 방해 받지 않기 위해 그런 명령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 사역을 통해 자랑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영광을 받지 않기 위해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말고도 고침받은 사람입장에서 사역하시는 예수님의 세심한 배려 차원에서 이 구절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질병에 걸리면 사람들은 부정하다고 하여 외면했습니다. 이 사람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당시 시대 정신은 모든 것을 정함과 부정함으로 판단하고 사람을 정죄하는 시대였습니다. 나병환자도 부정합니다. 동네에게 살지 못하게 합니다. 혈루증 앓은 자, 귀신들린자, 다 부정합니다. 그래서 철저히 공동체로부터 소외시켜 버렸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의 집은 벳새다 동네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집이 만약 동네 안에 있다면 집으로 보내면서 동네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은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부정하다고 쫓겨난 인생을 사는 사람인 줄 모릅니다. 동네에 가면 철저히 소외되고 조롱받고 거지취급받고 병신 취급받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수모를 당하며 맹인으로 가슴에 응어리를 품고 살았을 것입니다. 자포자기하며 초라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철저히 불신의 땅입니다. 자비와 긍휼이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힘의 논리가 통하는 사회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말라는 말은 바로 그 과거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일 것입니다. 불행의 늪, 불신의 늪, 초라한 삶의 늪, 불구의 늪, 구걸의 늪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로 회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안이 열렸으니 이제 세상을 밝히보는 멋진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영안을 열고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가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제까지 보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보입니까? 듣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들립니까? 모든 것에 희망이 발견됩니다. 희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멀리 보게 됩니다. 자그마한 풀도 사랑스럽게 느껴지게 됩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깊이 봅니다. 믿음으로 보면 시각이 달라집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다른 빛으로 세상을 봅니다. 믿음으로 영안이 열리면 엘리야의 기적이 내 기적이 될 수도 있고 한나의 기도가 내기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내능력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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