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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사생관 (빌 1: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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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사생관 (빌 1:19~24) 

일본 영화 「화석(化石)」에 나오는 주인공은 50대의 사나이로서 성공한 재벌이 된다. 그는 유럽 여행 중에 몸에 이상이 생겨 진단을 받았는데 암 환자라는 판정을 받게 된다. 그는 충격적인 생의 종지부 선고를 받고 인생을 생각하게 된다.

‘성공이란 무엇이냐? 성공이란 것이 고작 이것이냐?’

비로소 제 정신을 찾고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 그리하여 외면하고 살았던 계모를 찾아가고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을 찾아가고 소홀히 한 형제를 찾아가서 우애를 나눈다. 전쟁터에서 사귄 옛 친구도 만나 정담을 나눈다. 그때 그의 귀에는 죽은 아내의 소리가 들린다.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되고 헛되니...’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영화는 한 마디로 사람은 죽어야 하고 죽게 될 존재를 실감할 때 자기의 본래 삶이 어떻게 찾아지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죽음은 불청객이지만 어느 날 찾아온 죽음은 많은 교훈을 가져다 준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은혜를 받는 것은 죽음을 대면하는데 있다. 이재철 씨가 쓴 「매듭짓기」란 유명한 책을 보면 사람이 죽게 될 존재라는 것으로부터 참된 삶이 시작됨을 말하고 있다. 삶을 나누던 성도가 영안실에 누워 대면할 때 신앙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사실 사람이 죽게 될 존재임을(에노스) 알 때 셋이 에노스를 낳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창4:26) 그래서 전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다. 고후15:31에서도 “날마다 죽노라”고 말한 바울의 외침은 은혜로 세상 것을 결별하는 선언인 것이다. 매일 죽는다는 영성을 지닌 바울이기에 그는 전도자의 길을 갔고 핍박 받는 옥살이의 길을 갔고 순교자의 길을 갔던 것이다.

빌3:8을 보면 세상은 그에게 있어서 똥, 오줌이었다. 본문에 나오는 바울은 옥 안에 갇혔다. 그러나 바울은 옥 밖에 있는 이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또한 자기 스스로 인간적 위로 없이도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하였다. 빌1:18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속이는 것인가? 아니면 참된 고백인가?

이것은 진짜다. 바울이 이런 놀라운 삶의 자세를 나타내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친구 삼고 죽음을 뛰어넘은 신앙 때문이다. 보라. 빌1:23 “내가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바울은 죽음을 예감하고 삶과 죽음이란 두 사이에 끼여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삶과 죽음을 모두 받아들이고 있다. 살면 좋고 죽어도 좋다. 얼마나 신비로운 모습인가? 죽음을 뛰어넘은 사람. 살아야 하는 일에 매달려 쩔쩔 매는 일을 뛰어넘은 사람. 닮고 싶고 부러운 인생이다. 이것이 바울의 사생관이다. 그리스도인의 인생관은 바로 바울 같아야 한다. 거기서부터 진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나오는 것이다.

빌1:20下을 보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려 하나니...”라고 하였다.
빌1:21을 보라.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런 영성의 크리스챤이 되어야 세상을 이긴다. 생명에 향기가 난다. 그래서 전도할 수 있고 선교할 수 있고 위험한 곳에 갈 수 있고 순교할 수 있다.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왜, 아프간을 찾아가서 나라를 소란스럽게 하느냐고 말하는데 전쟁터에 일부런 가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그러나 크리스챤이란 사명이 왔을 때 죽고 사는 것을 뛰어넘는 전도자여야 한다. 가족, 부모, 형제를 뛰어넘지 못하면 날마다 안일, 안전한 곳만 찾는다. 신앙의 초점은 행복이 아니다. 가정 사역은 남편을 행복하게, 아내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지만 신앙은 위험한 일도 명령이라면 가야 한다. 조롱 받는 길도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곳이라면 아골 골짜기라도 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부르는 복음송인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인 것이다.

바울은 생과 사를 초월한 전도자였기에 옥안에서 계속 이렇게 삶을 피력한다.

첫째, 포기하지 않는 소망을 지니고 있다. (빌1:19)

빌1:19上을 보면,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의 중보기도를 신뢰한다. 그 기도 때문에 자기 자신은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즉, 옥중에서 자유한 자로 될 것이라. 소망하고 있다. 또한 위기와 고난, 핍박받을 때에 돕는 성령이 계시지 않는가?

빌1:19中 “성령의 도우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고로...” 보혜사를 신뢰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옥안에서 우울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소망의 사람으로 옥중 생활을 한다. 소망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있으면 소망이 따라온다. 내가 기도의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해 기도하며 돕는 성령님을 신뢰할 때 소망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롬15:13)

둘째, 온전히 담대한 용기를 지니고 있다. (빌1:20上)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담대하여...” 지나간 때나 지금, 옥에 갇혀있을 때나 바울의 현재 마음의 상태는 담대함이다. 상황이 나빠지든지, 좋아지든지 그 조건들이 바울의 마음을 위축시키거나 전도자의 사명을 흐리게 할 수 없었다.

두려움을 뛰어넘어 초연한 바울! 바울은 담대한 복음의 전사였다.

롬8:35에서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시험이나 칼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외친 바울은 복음의 전사로서의 어떤 것도 바울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Adoniram Judson은 인도 선교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외면하셨는지 버마로 보내어졌다. 그리고 Judson은 버마에서 자기의 손으로 아내의 시신을 묻어야 했고 두 자녀의 시신도 함께 장례 지냈다. 그후 그는 Ava 왕의 감옥에 갇혀 석방을 위한 기도를 드렸으나 하나님은 계속 그를 감옥에 두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Judson은 자기 원대로 되지 않았어도 그때마다 아무 일에도 부끄럽지 않고 오직 담대하였다. 고난의 터널이 길어도 사생관이 분명하면 용기가 꺾이지 않는다. 변함없는 담대함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일군이 된다.

셋째, 분명한 삶의 목표를 지니고 있다. (빌1:20下)

빌1:20下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게 하려 하나니...”

인생관의 정해진 목표는 그리스도의 존귀다. 다메섹 회심 이후 바울의 사생관은 그리스도의 존귀케 함에 걸었다. 즉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고전10:31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

고후5:9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쓴다.”

영광 돌리고 기쁘게 하는 것, 모두 다 예수 이름을 높이는 일이다. 예수를 존귀케 하려 함이다. 바울의 삶의 목표는 너무나도 뚜렷하다.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기 위해서라면 바울은 고난도 특권이라고 말한다.

빌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고난 받는 것 조차도 은혜이면 특권이다. 주님을 높일 수 있다면 매를 맞고 굶고 춥고 옥에 갇히는 고난까지도 특권이다. 사생관이 분명하니 오직 그는 소망의 전도자요, 용기의 사람이요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려는 목표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①사도행전 9장에서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생은 죽음이 끝이 아니고 시작이다. ②사도행전 16장에서는 바울이 성령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성령이 신령한 은사를 더하셨다고 하였다. ③고린도후서 12장에서는 바울이 삼층천을 체험하고 낙원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보이는 하늘은 이층천, 보이지 않는 하늘인 삼층천,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하늘 삼층천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갔던 자였다. ④사명자이기 때문이다. (갈1:11~12)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낯선 것이 아니다. 하늘에 올라갔던 자로서 죽음은 가장 가까운 침대의 베게와 같은 것이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잠자는 것이다. 행7:60의 스데반의 죽음은 잔다 하였고, 요11:11에서 죽은 나사로를 보시고 잠들었다 하였다. 고전15:6, 15:51, 마27:52, 살전4:13이하, 벧후3:4 말씀을 보면 죽은 자들을 가리켜 자는 자라 하였다. 천국을 아는 자에게 내세의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관문이요 글자 그대로 잠자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웅장하고 가장 웅장한 부활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 사랑이 다 드러나는 부활의 증언자가 되는 것, 이제 우리들도 죽음을 잠으로 받아들이는 성도가 되자. 지금의 상황이 너무 어렵다. 정말로 사는 것도 유익이고 죽는 것도 유익이라고 외칠 때 크리스챤이 믿는 하나님! 세상은 전도자를 바라볼 것이다. 거기에 생명이 있다고 세속이 가지고 있지 못한 힘과 지혜, 길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바울은 고후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하였다.

미국에 Boulder Dam이 건설되므로 방대한 사막이 옥토가 되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댐 공사가 끝난 후 희생자의 이름을 기념하는 비문을 세우는데 “이 사람들이 사막에 장미꽃을 피우기 위해 죽었노라”고 하였다. 완악한 사람에 마음에 장미꽃같은 예수의 향기, 살려내려면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해서는 안된다. 죽어야 한다면 받아드려야 한다. 남편을 위해 죽자. 가족을 위해 죽자. 교회를 위해 죽자. 나라를 위해 죽자. 나를 깨뜨리고 죽어도 되는 사생관으로 살면 사막에도, 중동에도, 황무지 같은 이웃에도 언제인가 장미꽃이 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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