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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향력 있는 사람(5) (마 5: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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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더운 8월이지만 한국 사람은 이 정도의 더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펄펄 끓는 찜질방에서도‘시원하다’고 말하는 한국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견딜 만큼 썰렁하지요.
옆의 분과 “더운 여름에 어떻게 지내십니까?
건강하십니까? 평안하십니까?”라고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탈무드에 보면, 머리가 둘 달린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한 사람인지 두 사람인지
스스로 분별하지 못하고 늘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지혜자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한 사람입니까? 두 사람입니까?”
그러자 지혜자가 말하기를 뜨거운 물을 한 쪽 머리에 부을 때
두 머리가 동시에 뜨겁다고 고통스러워하면 한 사람이고,
머리 하나만 뜨겁다고 하면 두 사람이라는 분별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국민일보, 2007. 8. 3. 참조>

함께 느낄 수 있으면 한 사람이고
함께 느낄 수 없으면 두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전 세계가 한 마음이 되어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그곳에 가 있는 사람이 무당, 점쟁이, 승려들이라 하여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함께 걱정하고 염려하는 사람이 한 백성이요, 한 민족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고 하는 말은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공유할 수 있는 사람,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믿음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불쌍히 여기고 눈물을 흘리는데 …
같은 피를 나눈 사람들이 비난하고 정죄하는 글들을 보면
그들은 같은 민족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함께 안타까워하고, 함부로 말하지 않고,
눈물로 기도해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서(마5:1) 제자들을 가르치신 예수님은
소금에 비유하여 제자들의 사명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5:13) 라는 말 속에는
그리스도의 제자 된 사람은 드러남 없이 겸손하게 살아야 하며
녹아 스며드는 침투력으로 맛이 나게 하고, 썩는 것을 막아내고
힘을 빼고, 영적 갈증을 느끼게 해 주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소금이라고 소금의 맛을 잃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신 예수님은 …
계속하여“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 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소금과 빛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그레코-로마 사회에서는
“소금과 태양보다 사람에게 더 큰 유익을 주는 것은 없다”라는
격언도 있었습니다. (박종기 지음 「그때와 지금 산상설교」p.49. 참조)

그 당시 그렇게 중요한 “소금과 빛”이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좋았을 것 같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세상의”라는 말에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소금”과 “빛”그리고 “세상의”라는 말로
‘이웃과 세상에 대해 배타적으로 살아서는 안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당시 보통 유대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사이에 엄격한 선을 그었습니다.
이방인들을 개와 돼지 같은 존재로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자신들과 세상 사이에 뚜렷한 선을 긋고
자신들만이 ‘빛의 아들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과 민중들 사이에 선을 긋고
민중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더러운 자들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세상의’소금이요, ‘세상의’빛이라는 예수님의 선언에
제자들은 크게 놀랐을 것이고 새로운 도전을 받았을 것입니다.
(박종기지음 「그때와 지금 산상설교」p.50. 참조)

예수님의 제자들은 … 예수 믿는 우리들은 …
분명히 세상과 구별되게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등지거나 외면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또 그렇게 세상을 등지고 외면하고 살아서도 안됩니다.
예수님의 “소금”이라고 선언하신 것은
세상이 맛을 잃었고, 썩어가고 있고, 힘이 들어 있고,
영적 갈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면 …
“빛”이라는 선언에는 세상이 어둡고 캄캄하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소금은 타협적입니다.
자신을 녹여 다른 것에 스며들어감으로 소금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빛은 배타적입니다. 어둠과 함께 있지 못합니다.
자신이 드러나기 위해 …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 어둠을 쫓아냅니다.
소금은 조용히/표 나지 않게 역할을 감당하지만 …
빛은 드러나게/보이게 역할을 감당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사는 우리가/예수 믿는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거나 의미 없이 살도록 방치 하시지 않고
소금도 되고 빛도 되어 일하라고 오늘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곧잘 ‘사명’이란 말을 잘 씁니다.
사명(mission)이라는 말은‘임무’라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임무가 있다’,
‘나는 할 일이 있다’라는 뜻입니다.

집사로, 권사로 신앙생활 잘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목사님 저 사명 받았습니다.’라며 말하는 사람을 보면 제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내가 설교를 어떻게 하고, 가르쳤기에 이런 얘기를 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순간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임무가 부여된 사람입니다.
어떤 임무입니까?‘세상에 살면서 소금되고 빛 되어 살아갈 임무’가 있습니다.

따라서 합니다.
‘저는 할 일이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할 일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할 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순간에 빛 되고 소금된 삶을 살 임무를 부여 받은 사람입니다.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

그러나 우리는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 특별한 일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둠은 빛이 있으면 자동으로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을 어떻게 몰아낼까 하는 염려를 하기보다
내가 빛을 잘 유지하는 일에, 내가 빛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염려하고 신경 쓰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 …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어둠을 염려할 필요도 없고
어둠에 다닐 일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어두워진다고 염려합니다.
세상이 무서워진다고 근심합니다.
이 모든 것이 빛이신 주님을 모시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455장에 보면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했습니다.
빛 되신 주님 안에 있는데 내가 다른 근심이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실 때 염려와 근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찬송가 429장에 보면
“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 빛 되신 주
저 본향 집을 향해 가는 길 비추소서
내 가는 길 다 알지 못하나 한 걸음씩 늘 인도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며 살아야 합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드러내며 살아야 합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앞세우고 살아야 합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증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향기니 … 본이 되어

고린도후서 2장에는 빛이신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을 가리켜
“냄새”에 비유하며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라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냄새가 납니다.
사람은 며칠만 씻지 않아도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니’라는 말씀에서‘향기’는
우리의 코로 맡는 냄새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빛이신 예수 믿는 사람으로
예수의 냄새를 풍기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사를 갔을 때/직장에서 주변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인 것 같아’라고
여러분이 말하지 않아도 예수 믿는 사람임을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예수 냄새 풍기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드러내며 사십니까?
빛이신 예수님, 길 되신 예수님을 드러내며 사십니까?(요14:6)
예수님을 밝게 드러내어 빛이신 예수님을 통해, 길 되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어두운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삶의 표준을 제시해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대단했습니다.

“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살전 1:7)

그들은 환난 중에서도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보여주며 신앙의 본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우리 교회 성도들도 …
데살로니가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본이 되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빛이신) 주 예수의 이름으로”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16절처럼 드러나야 합니다.
“ …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잘못된 편견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모든 선행은 은밀하게/남모르게만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그것이 전적으로 틀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에 나와 있는 대로
‘구제를 할 때’, 어려운 사람을 도와 줄 때는
구제 받는 사람이 민망하지 않도록 / 자존심 상하지 않도록/
도움 받았다는 부담감을 갖지 않도록 … 해야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이 누군가를 돕고 싶거든
직접 하지 말고 교회를 통해/교역자를 통해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직접 돕게 되면
‘내가 너를 도와주었는데… 네가 나한테 그렇게 할 수 있냐’하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면 누가 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도움 받은 사람도 민망하지 않고 자존심 상하지 않고
도움 받았다는 부담감도 갖지 않습니다.
구제할 때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해도
하나님께서 다 보시고 갚으신다고 했습니다(마6:2~4).

그러나 빛이신 예수님 이름으로 하는
착한 행실은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마5:16).
다만 주의 할 것은 사람에게 보이려는 생각으로 …
자기가 칭찬 받고/박수 받고/상 받고/영광 받으려는 생각으로 …
자기를 드러내려는 마음으로/자기 기쁨을 위해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마6:1).
사람들이 착한 행실을 보고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게 해야 합니다(마5:16).

다시 말해 선행은 우리가 해도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큰일을 멋지게 했어도 예수 믿는 사람의 입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라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우리 교회 본당과 비전센타를 건축하고 봉헌식을 앞두고 장로님들에게
“우리 교인들 중에 열심히 수고하고 애쓴 분들도 많지만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고 아무에게도 공로패를 주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때 모든 장로님들이 제 뜻을 따라 주셨습니다.

아무리 수고했어도,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자신은 쓰임 받았음에 감사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나) 자신도, 가정도, 교회도
빛이신 예수님을 드러내며, 따라가며,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소금이 되어 자신이 녹아져 자신의 이름은 드러나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얼굴이 드러나서는 안됩니다.
빛이 되기 위해 자기가 타 없어져야 합니다.

빛이 있으려면 열량이 소모되어야 합니다.
무엇인가 타 없어지지 않고는 빛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제자로 살기 위해서 …
빛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기 포기, 자기 손해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포기, 자기 손해가 있으려면 몸 떨림과 허전함이 있어야 합니다.

추운 겨울 오줌만 눠도 몸이 떨립니다.
몸속에 따뜻하게 자리하고 있던 오줌이 빠져 나가면
한기를 느껴 온 몸의 세포를 움직여 열을 내게 합니다.
그것을 ‘진저리 친다’고 말합니다.
내게 필요 없는 것을 내보낼 때도 떨림이 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병이 나으리라는 생각으로 예수님 뒤로 다가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 순간 여인의 병이 깨끗하여졌습니다.
그때 예수님은‘누가 내 몸에 손을 대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몸에서 능력(power)이 빠져 나갔음을 느끼셨습니다(막5:25~34).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예수님, 누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댑니까?
사람들이 너무 많아 밀고 당기는 동안 닿은 것이겠지요?”
라고 했더니 예수님은
“아니다. 내 몸에서 능력이 빠져 나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여인의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도
예수님 자신의 몸에서 능력이/power가 빠져나간 허전함을 느끼셔야 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소금되고 빛 되기 위한
자신을 녹이고/자신을 태우고 힘 빠짐을 느끼십니까?
가정이 화목하지 못한 이유는
누군가 자신을 녹이고/태우고… 그로 인해 허전함을 느낄 만큼의
희생을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부서에서/선교회, 속회에서 …)
소금되고 빛 되기 위해 자신을 녹이고/자신을 태우고/힘 빠짐을 느낄 만큼
희생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속한 부서/선교회/속회가 … 삐거덕거리는 것입니다.
잘 되는 부서/선교회/속회는
누군가 자신을 녹이고/태우고 … 허전함을 느낄 만큼의
희생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일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 소금되고 빛 되게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쉽지 않기 때문에 … 그렇게 살라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 마음속으로 핑계거리를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난 너무 작은 사람이라 … 난 힘이 없어 … 난 부족해서 …
난 잘나지 못해서 … 녹으려면 저 사람이 녹아야지,
타려면 저 사람이 타야지 … 많이 가졌는데 …
저 사람이 힘 빠져야지 … 많이 배웠는데 … 남에게 신경 씁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안된다고,
힘이 없다고, 금이 갔다고, 깨졌다고 … 자기의 허물만을 얘기합니다.

지난 5월 달 신문에서 읽은 글을 소개합니다. (국민일보 2007. 5. 26)

어떤 사람이 지게를 지고 물을 날랐습니다.
지게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항아리가 하나씩 있었습니다.
왼쪽은 금이 간 항아리였습니다. 물을 가득 채워서 출발했지만
집에 오면 왼쪽 항아리는 반쯤 비어 있었습니다.
물이 샜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오른쪽 항아리는 가득 차 있었습니다.
왼쪽 항아리는 주인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요청했습니다.
“주인님, 나 때문에 항상 일을 두 번씩 하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나를 버리고 새것으로 쓰세요.”
그러자 주인이 대답했습니다.
“나도 네가 금이 갔다는 것을 안다. 그걸 알면서도 일부러 바꾸지 않았다.
우리가 지나온 길 양쪽을 바라보아라.
오른쪽에는 아무 생명도 자라지 않는 황무지이지만
왼쪽에는 아름다운 꽃과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너는 금이 갔지만 너로 인해서 많은 생명이 자라나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느냐?
나는 그 생명을 즐긴단다.”

많은 사람이 완벽함을 추구합니다.
자신의 금 간 모습을 수치스럽게 여깁니다.
가정에 금이 간 것, 경제적으로 금 간 것,
이런저런 다른 사람에게 내놓기 싫은 금간 것을 수치로 여기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잘 들으십시오.
세상이 삭막하게 되는 것은 금이 간 인생 때문이 아니라 완벽한 사람들 때문입니다.
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땅에는 생물이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금이 간 항아리가 지나온 길 밑에는 풀이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천하고, 멸시 받고 약한 것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영국 의회에서 어떤 초선 의원이 있었습니다.
의회에서 처음으로 연설을 하는데 아주 완벽했습니다.
연설을 마치고 난 뒤 연설의 대가인 윈스턴 처칠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연설에 대해 평가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처칠로부터 탁월한 연설이었다는 평가와 칭찬을 기대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윈스턴 처칠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이보게, 다음부터는 좀 더듬거리게나!”

너무 완벽함은 정떨어집니다.
우린 완벽하지 못합니다.
찌그러져 있는 곳도 있고, 금이 간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부족한 줄 아시면서 …
금간 줄 아시면서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존재는 없습니다.
가끔 제게 메일을 보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월요일에 메일을 열어 보기가 겁이 납니다.
“목사님, 어제 설교에 이런 게 틀렸습니다.”
……
그런 사람들에겐 붙은 정도 없지만 … 정말 정이 떨어집니다.

우리는 부족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허물이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찌그러졌고, 어떤 이들은 금이 갔습니다.
그런 우리들인 줄 아시면서도
우리에게 ‘소금되라’고, ‘빛 되라’고 하셨습니다.

사는 집에서 … 피로 얽힌 가족들 사이에서 …
함께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
세상에 어울려 살며 만나는 사람들 틈에서 …
그 속에서 소금으로 빛으로 사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빛이라고, 소금이라고 선언해 주셨음에 감사합니다.
금이 간 줄 아시면서, 찌그러진 곳이 있는 줄 아시면서
완벽하지 못한 줄 아시면서
우리에게 빛 되고, 소금되라고 사명 맡겨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잘 감당케 하여 주시옵소서.
땀 흘려 애써 모은 것 구별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기억하시고 성도들의 정성을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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