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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땅 끝까지 이르러 (행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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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땅 끝까지 이르러
본문 : 사도행전 1:6 ~ 8

  사랑의 봉사활동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갔던 사랑하는 청년들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억류 기간이 두주간이 넘어서 3주째를 맞이하면서 모든 국민들의 인내와 기다림도 한계에 접어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배형규 목사와 한 청년의 희생 앞에서 함께 가슴 아파하며 눈물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가족들의 고통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대체 어찌된 일인지 우리 마음속에 의문이 생깁니다.
  “선한 의도로 시작되었던 일이 참담한 결과로 끝을 맺어야 하는가?
왜 이런 잔인한 일이 발생할 수밖에는 없는가?
문제가 생기면 곧 해결될 수 없는 것일까?
밤낮으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왜 가만히 계시는 것일까?

우리에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인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경험했던 과거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신앙인이라면 한번쯤 신앙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현재 예수를 믿으면서도 나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신앙이 있으면서 동시에 의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 생애에 예고 없이 신앙의 먹구름이 짙게 깔리면 누구나 어찌할 줄을 모릅니다.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탄식하며 기도했던 경험들이 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지만 전혀 현실이 바뀌지 않던 암담한 경험도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마치 침묵하시는 것 같이 보입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들려지지 않아서 답답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이 너무 높이 쌓여 있기만 한 것 같아 괴롭기까지 한 적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의심해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때로는 의심이 지나쳐 하나님에 대해서 실망한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실망이 쌓여 분노와 원망으로 응어리진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을 적대해 본적도 있습니다.

  필립 얀시가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라는 책을 쓰면서 위기에 처한 신앙인의 현실 속에 나타난 아픈 문제를 그대로 노출시키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전혀 실망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무신론자라고 생각한다. 무신론자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받는 게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바친 사람은 본능적으로 그분께 뭔가를 기대한다. 그러면 그 기대가 잘못된 것인가?”

무신론자는 하나님께 실망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요청합니다. 내가 갖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도하며 간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 실망할 수 있고, 마음속에 의심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어찌된 일인지 하나님께 질문하면서 의심이 확대되고, 확대된 의심이 실망을 가져다주며, 실망을 가져다준 것이 마음속에 분노와 원망으로 쌓일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의심에 대해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의심에 대해서 면제받은 신앙인은 없습니다. 더구나 죽음의 문턱에 서 있으면 누구라도 하나님을 의심하며 분노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알리는 것이 보편적인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자신들과 우리 영혼이 하나임을 하늘나라에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지켜주옵소서.”

  본문에 하나님께 낙담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실망하면서 예수님께 물어보고 있는 청년은 예수님께서 소중하게 여겼던 세례 요한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이 나은 자 중에 이만한 사람이 또 어디 있냐고 말씀하시며 칭찬하셨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례 요한에게도 의심이 있었습니다. 실망과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갖고 있는 삶의 처지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서른 살의 패기만만한 청년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꿈꾸면서 유대광야에서 세례를 선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정치적인 문제에도 거칠 것이 없었던 그는 지상에 로마제국의 황제나 유대 분봉왕 헤롯이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왕이 되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또한 윤리적인 문제에도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분봉왕이 되어서 동생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강제로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삼았을 때 요한은 분노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비윤리적인 것이라고 비판의 화살을 헤롯에게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세례 요한은 권력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많은 민중들이 뒤따랐던 세례 요한은 무력하게 감옥에 갇힌 신세로 그의 일생을 끝마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변화의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변화가 없었을 때 실망하며 예수님을 의심했고 고통스럽게 질문했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메시아인가? 내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이 적법한 일이었는가?”

성경에는 세례 요한이 붙잡혔을 때 예수님께서 직접 도운 것으로 나타나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감옥에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유대 광야에 머물기보다는 오히려 북쪽에 있는 갈릴리로 잠시 피신합니다. 요한의 출옥을 위해서 어떤 조치도 취하거나 데모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홀로 차디찬 돌 감방에 앉아서 고통 받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세례를 준 예수가 나를 잊었는가? 그가 왜 나를 돕지 않는가?’

세례 요한은 홀로 버려진 기분이었습니다. 자기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달랐던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견해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요한은 더 과격한 정치적 혁명을 기대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옛 군주였던 헤롯의 독재 정치 통치가 종식되지 않았습니다. 로마 제국 속국으로부터의 자유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전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증거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례 요한이 보기에는 너무나 정적이고 소극적이어서 이렇게 의심했습니다. ‘정말 그분이 정치적 메시아일까? 그분이 오면 세계가 바뀔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만약 여러분이 세례 요한이었다면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그는 서른 살의 젊은이였기에 예수님께 많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가리켜 여성이 낳은 자중 최고의 인물로 예언자였다고 말한 것이 세례 요한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기가 가는 길이 여기서 끝나고 자신은 참수형에 해당되는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자기가 위대한 인물이라고 여길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순간 세례 요한도 예수님의 모습에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스캔들입니다. 그 길에 예수님도 뒤따라가고 더 갈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때 세례 요한은 단순하게 탄식만 하거나 예수님을 포기하는 회의주의에 빠져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직접 듣고 싶어 물었습니다. “당신이 진짜 메시아입니까? 아니면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합니까?”

세례 요한은 마음속에 의심이 있었으나 그 의심을 예수님께 토해내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의심의 먹구름이 피어오르면 그것을 그냥 가슴깊이 묻어두지 말고 하나님 앞에 토해내십시오. 그것을 가슴속에 묻어두면서 불신앙을 키우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끊임없이 하지 마십시오. 신앙인들 가운데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풀리지 않는 의심과 불평과 실망들을 원한처럼 가슴에 붙들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이 풀릴 때까지 하나님께 물으며 예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왜 의심이 생기는 것일까요? 우리 마음속에 외로움이 있을 때 의심이 생깁니다. 신앙의 좋은 친구를 갖는 것은 참 좋습니다. 때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아내와 남편이 될 수도 있고, 아들과 딸이 될 수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외로워.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나는 친구가 없어.”라고 여길 때 우리는 신앙을 가지면서 의심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느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사실인지 믿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주셨고, 아내와 남편을 주셨고, 자녀와 친구를 허락하셨습니다.

  인생을 혼자 걸어가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한두 사람의 친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너무 홀로 외로움 속에 빠지지 마십시오. 외로움의 위기에 처할 때 우리 마음속에 의심이 생깁니다. 이것은 우리를 아주 어렵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기도하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준비했는데 시험을 망쳤을 때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안 들어주나보다. 우리 어머니도 기도하고 나도 기도하고 열심히 대학교 입시를 준비했는데 낙방한 것을 보니 하나님은 나한테 관심이 없나보다.’ 다른 친구는 공부도 별로 안하고 합격했는데 어째서 시험에 떨어뜨리게 하셨는지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가장 친한 친구가 나를 거부하고 배반했을 때 이게 어찌된 일이냐고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나고 갑자기 생명을 잃을 때, 아니 나 자신이 죽음에 위협을 당할 때 두려워하고 의심하며 하나님을 향해서 질문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도대체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아세요? 하나님은 선인이 어떤 사람이고 악인이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아세요? 그리고 선한 사람들을 정말 칭찬해주고 높여 주세요?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징벌하고 계세요?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하세요?” 이처럼 우리 마음속에 많은 질문들이 교차되는 것을 경험할 때 예수님께 질문하며 묵상하세요. 예수님의 언어를 다시 머릿속에 새기며 성경을 펴세요.
 
성경 없이 질문하지 마세요.
기도 없이 질문하지 마세요.
성경을 읽으면서 질문하세요.
 
그 때는 어떤 질문이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예수님이 어떻게 사람을 만났는가? 예수님이 왜 십자가의 길을 침묵하시면서 가실 수밖에 없는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마지막까지 질문하세요. 그 질문을 추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누구입니까? 당신이 오실 그 분입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치유의 기적과 복음 증거의 기적이 나타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누가복음 7:22)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일은 사람을 자유하게 하며 해방시키고 치유하며 생명을 주는 기적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모든 문제가 기도의 제목이 됩니다. 육체적인 문제, 영적인 문제, 정신적인 문제, 돈과 제물의 문제, 사회 속에서 직위의 문제, 결혼의 문제, 가정의 문제 등의 모든 것이 기도의 제목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하나님의 살림의 역사, 구원의 역사, 치유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달라고 기도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누가복음 7:23)
 
이것은 생명과 치유의 길을 가다가 벽에 부딪힐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고난의 길을 갈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치유 받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모든 질병을 그의 몸으로 떠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생명을 주기위해서 예수님은 죽음의 길을 갈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면서 실족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스캔들은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힘없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악한 자들을 없애고, 선한 자들이 고통 받을 때 세워주시지 도대체 뭐하고 계셨는지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당신 스스로 넘어지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강하게 하기위해서 스스로 약해지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당신이 죽음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심어주기 위해서 스스로 갈등하며 외로워하고 답답해하며 그 길을 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가장 순종했던 분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시면서 하신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가장 처참한 비명에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의문문으로 하나님 앞에 나갔을 때 우리는 사랑으로 하나님이 주신 죄의 용서와 생명의 역사를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의 죄와 고통에 대해서 가슴아파하시는 하나님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의 연약함과 아픔에 대해서 함께 눈물 흘리면서 참회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경험하게 되는 기적이란 우리에게 잠깐 주시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더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격을 깨닫게 되는 영원한 축복입니다. 기적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지만 기적이 없을 때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인격을 통해서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십니다. 비록 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하나님의 인격 앞에 설 때 우리는 죄와 허물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무에서부터 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영점의 인간,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생명을 누리는 것이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지금 데려가셔도 감사함으로 주님 앞에 서겠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속에는 문제와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직도 질병과 고통이 있습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가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고통스러운 문제가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창조주 하나님,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 육체를 만드신 하나님, 나를 자유롭게 해주세요. 질병에서 자유롭게 해주세요. 죄에서부터 자유롭게 해주세요. 나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해주세요. 그러나 그 자유가 내게 주어진 순간에 이제는 다른 사람을 자유하게 위해서 필요하면 고난도 받겠습니다. 슬픔도 외로움도 혼자됨도 감당할 용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통해서 역사는 다시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은 축복이며 은총입니다. 잠시 의심에서 구름이 끼었을 때 태양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태양은 아직도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심의 구름이 사라지면 다시 태양이 우리 삶의 역사에 빛을 비출 것입니다. 마음속에 의심이 생기면 다시 성경을 펴서 하나님께 질문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이 어떤 길을 갔는지 가슴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 세상이 주지 못하는 믿음의 역사가 여러분을 다시 세워 주실 것입니다. 

- 기도 -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 자유와 생명과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때 주님께 아룀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고통의 문제와 아픔의 문제가 해결 받고, 의심을 넘어서 주님만을 의지하는 새로운 믿음의 성숙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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