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네가 무르라 나는 못하겠노라 (룻 4:1-12)

  • 잡초 잡초
  • 686
  • 0

첨부 1


제  목 : 네가 무르라 나는 못하겠노라 (룻기 4:1-12)

한 밤 중에 비밀리에 찾아온 룻으로부터 기업을 무르라는 청을 받은 보아스는 나오미가 말한 것처럼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쉬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오미의 예측은 정확하게 맞았습니다.  보아스에게 기업 무르는 일의 책임자임을 알린 이후로 룻이 할 일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그 일의 진행과정을 지켜보는 일만 남았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기업을 무를 권리를 가진 사람 중에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족을 성문에서 기다리다가 마침 그를 만나 담판을 짓게 되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은 그 지방의 중요한 일들이 공포되거나 백성들의 소송과 재판이 이루어지던 공공장소였습니다.  열 명의 장로들을 증인으로 초청한 자리에서 보아스는 그 친족에게 나오미가 관할하고 있는 엘리멜렉의 밭을 무르라고 공식으로 요청하였습니다.  만일 네가 하지 않으면 너 다음의 권리를 가진 사람은 나고 그 다음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보아스의 말을 들은 그 사람은 자기가 무르겠다고 선선히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그 사람에게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알렸습니다.  만일 네가 나오미의 밭을 무르려면 그의 죽은 아들을 대신하여 이방 여인 룻을 네 아내로 맞이하고 룻이 낳은 아들을 죽은 말론의 후사가 되게 하고 또 네가 산 땅도 그의 이름으로 돌려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즉시 기업 무르는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합니다.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 것 같으니 이 일은 내가 하지 못하겠다.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할 것이니 네가 내 대신 그의 기업을 무르라’ 합니다.  그리고는 기업 무를 자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표시로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따라 자기의 신발을 벗어 보아스에게 주고 말았습니다(신25:7, 9참고). 

보아스는 장로들과 다른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 속하였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 죽은 말론의 이름을 잇게 하고 그 기업을 회복시킬 책임을 다하겠노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이에 장로들과 그 성의 사람들은 보아스가 죽은 사람의 이름이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형제의 기업을 무르는 책임을 성실히 다한 일에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축복하기를, 보아스의 아내가 될 이방 여인 룻은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조상 라헬과 레아처럼 복 받은 어머니가 되라고 하였으며, 보아스는 베들레헴에서 유명한 자가 되라고 축복하였습니다.

한 밤중에 보아스의 침소로 찾아와 나를 당신의 옷자락으로 덮어 주세요. 당신은 우리 시댁의 기업 무를 사람이니 이 책임을 맡아 달라는 룻의 당찬 요구를 기꺼이 수락했던 보아스는 드디어 베들레헴 사람들의 축복 속에 이방 여인 룻을 정식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룻은 이 일로 죽은 전 남편의 기업을 회복시키는 용기 있는 여인의 모델이 되었으며, 훗날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족보에 오르는 믿음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룻기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가를 모델로 보여주는 사랑이야기라고 하였습니다.  무너진 형제의 기업을 대신 회복시켜준 보아스의 아름다운 행동과 이 일이 성사되도록 배후에서 치밀하게 준비하였던 시어머니 나오미, 그리고 용기 있는 결단으로 보아스의 마음을 움직인 룻의 행동들을 통해 믿음의 가정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은혜와 사랑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 남을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불편이나 사정을 무시하고 오직 자신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 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이 나의 이득이 되고 다른 사람의 실패를 나의 성공을 앞당기는 기회로 삼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나누며 산다는 것은 할일 없고 배부른 사람이나 하는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럴 여유가 있으면 내 것을 한 푼이라도 더 늘리겠다는 철학으로 삽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도 하지 않으며 삽니다.  내가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대신 남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손해를 주는 것을 잘 용납하지도 못합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이웃에게 베풀지도 않고 자기 먹을 것 자기가 알아서 해결하며 손해가 없을 정도로 적당히 그리고 열심히 사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철학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보아스보다 더 앞서서 룻의 기업을 무를 권리를 가지고 있던 사람은 처음에는 주저하지 않고 내가 그 땅을 사겠다고 했는데 보아스의 말을 다 들은 후에는 즉시 그 권리를 포기하였습니다.  이유는 자기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해서였습니다.  이 일로 내 기업에 손실이 발생할 수 있으니 이런 위험부담을 끌어안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끊어진 친족의 기업을 이어주는 선한 일을 위해 하려던 것이 아니라 자기 재산을 확장할 기회로 여겼던 사람입니다.  기업을 무름으로 내게 이득이 있을 것 같아 동의했을 뿐이고, 율법이 요구하는 도의적인 최소한의 책임을 지려고 했는데 그 이상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면 나는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신을 벗어 주며 나는 못하겠으니 하고 싶으면 네가 하라고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남을 위해 산다는 것은 내게 오는 손해와 위험을 알면서도 나를 내어주는 삶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방문을 받았을 때 그 모든 일을 책임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놓았던 사람입니다.  남을 도울 수 있을 만큼 재물이 넉넉하기 때문에 그런 선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모든 부자들이 다 너그럽고 후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룻기를 읽어오면서 보아스의 성품을 보았듯이 그는 베들레헴에서 유력한 부자일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았던 사람입니다.  자기 밭에서 일하는 일군들을 대하는 주인의 친절한 자세도 그렇고 자기 밭에 이삭을 주우러 찾아온 나그네에 대한 너그러운 배려도 남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이방 여인 룻에 대한 그의 친절은 특별한 관심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으니 오늘 진행되는 내용을 보면 신분과 국적을 넘어서는 룻에 대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조상적부터 내려오는 율법의 전통을 따라 나그네와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선한 일을 기쁨으로 하였을 뿐 아니라 룻이라는 여인에 대한 사랑이 그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나누도록 하였습니다.  룻을 대하는 보아스의 태도에는 가난한 자 앞에서 가진 자로서의 거들먹거림이나 자기과시, 영웅의식 같은 것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약한 자의 약점을 나누는 친절한 마음이 드러나 보입니다. 

룻기가 기록된 시기를 다윗이 왕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만일 이 이야기가 다윗 왕의 출생 배경에 대한 역사 이야기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따뜻한 인간애를 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사람들 간의 훈훈한 인정미도 담겨 있고, 남녀간의 사랑이 있으며, 가정의 아름다움을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따뜻한 삶의 이야기 배후에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됩니다. 

룻기를 기록한 저자는 나오미의 가정이 겪은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 것처럼, 사사시대를 살아오면서 겪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곤고와 피곤함이 다윗이라는 위대한 왕을 만나 과거의 슬픔을 보상받고 드디어 새로운 시대를 살게 됨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조상적부터 전해오던 하나님의 약속이 드디어 다윗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이야기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후사의 소망이 없는 몰락한 집안에서 어떻게 이런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탄생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려는 저자의 의도가 룻기에 담겨있습니다.  고난과 슬픔의 역사를 지내오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룻기라는 이야기가 백성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의 기업을 무르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난의 역사 속에 동참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적극적인 구원자이시며, 빼앗긴 이스라엘 민족의 기업 무르는 자(고엘)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이 말씀은 나와 우리를 대신하여 죄와 사망의 멍에를 지고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어 죽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우리의 기업 무르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보아스가 친족 나오미의 기업을 회복시키듯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시키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나를 내어줌이 없이 남을 위로할 수 없었고 나를 희생함이 없이 남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내어주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사양하시고 사람으로 오셨으며,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과 죄인들의 친구로 사시다가 마지막에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과 은혜로 새 생명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업 무르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이기에 내 안에 있는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이라는 고백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사랑과 생명을 나누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룻기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통로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누는 통로였고, 룻이 나오미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통로였던 것처럼,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에게 은혜를 나누는 통로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기대한 것 이상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보아스보다 앞서 기업 무를 책임과 권리를 가졌던 사람은 율법의 요구에 따라 친족의 땅을 사려고 했었습니다.  그 사람도 세상의 양심과 상식을 따라 살려고 했던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책임과 희생이 필요할 때에 더 이상 용기를 낼 수 없어 그 축복의 권리를 포기하고 만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그 이상의 것을 할 줄 아는 은혜의 사람이었다는 점이 달랐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나오미와 룻도 역시 기대 이상의 은혜를 나누는 통로가 되어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까지 오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땅만 무르면 되었지 보아스에게 시집을 가기 위해 밤중에 보아스의 침소로 찾아가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누울 필요는 없었습니다.  나오미 역시 며느리 룻을 보아스의 타작마당으로 보내는 일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로의 복을 위하여 서로의 기대 이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통하는 상식과 사람들의 기대치를 따라 살기만 해도 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모습을 배워 상대방에게 서로의 기대 이상으로 살기로 작정한다면 이 세상에는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그 은혜를 나누는 삶을 사는 사람은 위험부담을 기꺼이 감수합니다.  보아스를 만난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가 나오미의 밭을 사겠다고 하였다가 나중에는 말을 바꾸어 위험부담을 안고 싶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보아스가 룻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은 많은 재정 손실을 가져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순종하여 죽은 자의 가문과 기업 무르는 일에 힘쓰는 룻의 헌신을 보고 그대로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룻은 밤중에 외간 남자의 잠자리로 들어갔다가 봉변만 당하거나 수치를 당할 위험부담이 있었지만 용기 있게 보아스를 찾아간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주가 주신 은혜를 배우고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다음 주일에는 예수께서 명하신 말씀을 따라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순서에 따라 형식을 갖추어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떡과 포도주에 담긴 그리스도의 희생과 은혜, 사랑을 기억하며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예식입니다.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것이며, 그것을 먹고 마시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일부가 되어 주의 고난과 기쁨을 소유하는 결단입니다.  죄와 싸워 이기며 그의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여 주께서 나에게 자신을 내어주심 같이 우리도 남을 위해 살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하는 시간입니다.

지금 아프칸에 억류되어 있는 믿음의 가족들을 생각합니다.  그분들도 주께서 주신 은혜를 따라 그 은혜를 나누기 위하여 그곳에 갔으리라 믿습니다.  소영웅주의나 자기만족을 위하여 소중한 목숨을 걸만큼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사랑을 나누는 심정으로 자신의 물질, 재능, 시간을 나누기 위하여 나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피랍된 결과를 보고 비난하는 어떤 이들은 그곳이 아니더라도 가까운 동네와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 많은데 왜 거기까지 가서 이런 물의를 일으키느냐고 합니다.  비행기 타고 위험지역까지 갈 돈과 용기가 있으면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든지 봉사할 수 있는데…. 합니다.

이런저런 속상한 마음에서 말하는 그 사람들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찾아가는 그들의 행동이 과욕이나 자기과시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들의 희생과 헌신에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에 예수님께 찾아와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그 여인을 꾸짖으며 그 비싼 향유를 팔아 차라리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칭찬하시며,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 여인이 나의 장사를 위하여 이 귀한 일을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언제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하여 이 여인처럼 과감하게 거룩한 허비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겉으로는 선행을 말하지만 그 속에는 지독한 질투와 시기가 담겨 다른 이들의 선한 행동을 비난하는 어리석음은 없는지 살핍시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비용을 털어 어려움 당한 사람을 도왔습니다.  사마리아인에게 유대인은 원수와도 같은 관계였지만 지금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그냥 두고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자기도 그 사람처럼 똑 같은 위험을 당할 수 있었지만 그대로 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그의 선한 행위는 고난 속에 있는 사람에 대한 기대 이상의 친절과 위험부담이었습니다. 

이번 아프칸 피랍 사건으로 한국교회의 선교정책과 선교방향에 앞으로 많은 변화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교회의 결정이 언제나 옳고 의로우며 교회 밖의 비판이 항상 그르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교회는 그 뜻을 실현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오류와 오판으로 선한 일을 욕되게 만드는 일은 없는가 늘 살펴야 합니다.  선교정책이 잘못 될 수 있고 파송 교회와 선교사가 잘못 행동할 수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는 솔직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이를 닦아주는 목욕물이 더럽다고 목욕통 속에 있는 아기까지 버리지는 않는 것처럼 선교의 정책이 잘못 되었고 선교사의 행동이 잘못 되었다고 하여 교회의 사명인 주의 복음 전하는 일까지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배를 담을 그릇이 낡고 볼품이 없다고 그 속에 담긴 보매 마저 버리는 어리석음은 없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손해가 있고 위험이 따를지라도 주의 은혜를 나누는 통로가 되어 살기를 작정한 사람은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 받아 사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전통과 나눔이 우리 성도들과 한국 교회 그리고 세계 교회 속에 쉬지 않고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생명의 위협 속에 자유를 기다리고 있는 억류된 형제자매들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사랑으로 기도하며, 고인이 되신 배형규 목사님의 가족과 그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위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