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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약의 수호자 (창 12:10 - 창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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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수호자 (창 12:10-13:4)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인 은혜 가운데서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언약을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보존해 나가심을 보여줍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로 결단하고 본토를 떠나 마침내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 땅을 이미 우상 숭배자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리 저리 옮겨 다녀야 했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의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더욱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정도 고생했으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여유롭고 풍요한 생활을 주시리라 기대할 만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복덩이가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10a) 당장 먹고 사는 문제로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기근은 아브람이 이끄는 부족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아브람이 어떻게 처신 했습니까? “애굽에 우거하려”고 내려갔습니다. 이 결정에 대해 아브람이 하나님의 믿음을 잃고 시험에 들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실제로 간절히 기도한 기도가 응답되지 못할 때 많은 신자들이 낙심합니다. 그 중에는 더욱 굳건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분들이 있는데, 상황이 한층 더 악화되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신앙을 등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하나님에 대한 서운한 마음,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나 사랑에 대한 의심, 속은 것 같은 기분, 더 이상 말씀 믿고 살았다가는 망할 것 같은 불신이 마음에 싹트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며 철저히 의존했던 사람일수록 마음의 기대가 무너졌을 때 느끼는 실망의 충격은 큽니다.

하지만 분문에 아브람이 시험 들었다고 단정하기 힘든 점도 있습니다. 아브람의 본토인 갈대아 땅은 매우 비옥한 곳이었는데, 그가 심한 기근 속에서도 하란이나 본토로는 돌아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우거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구르’(rWG)도 영주한다는 뜻이 아니라 잠시 머문다는 뜻입니다. 이는 아브람이 본토를 떠나도록 명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여전히 의식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고자 하는 인생관을 바꾸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인생철학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기로 결단한 사람이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여 자신의 삶의 터전을 과감히 떠났던 사람입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인생관은 정당하였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인생관을 확립했다고 해서 그의 사상 전부가 하루아침에 하나님의 백성다워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변화와 성숙이 필요한 부분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삶의 어떤 영역에서는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면서도, 동시에 삶의 다른 영역에서는 말씀보다 그 시대 처세술을 따랐습니다. 11-13절을 보면, 애굽 근처에서 아브람이 아내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여보, 나는 당신이 얼마나 아리따운 여인인가를 잘 알고 있소.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서 당신이 나의 아내라는 것을 알면,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릴 것이요.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누이라고 하시오. 그렇게 하여야 내가 당신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또 당신 덕분에 이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거요.”(표준새번역)

아브람의 이러한 위험 대처 방식은 하란을 떠날 때부터의 습관이었습니다. 20:11-13절을 보면, 그는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했습니다. 이 말 속에서 믿지 않는 불신 세상 속에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능력을 행사하지 못하실 것처럼 생각하고 있음이 묻어납니다. 그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떨면서도 처세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의존하지는 않았습니다.

신앙 공동체에서는 믿음으로 행하지만,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 속에서만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처럼, 불신자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꾀와 세상적인 처세술을 의지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변화되어야 할 생각입니다.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13)는 고백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내가 ‘하나님을 인하여’ 안전하겠고 ‘하나님을 인하여’ 목숨이 보존될 것이라 고백함이 합당합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아내의 한 마디가 자신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신의 안전과 목숨을 전적으로 아내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브람은 그런 처세술로 잘 지내왔습니다. 결혼 전에는 사래가 이복누이였으므로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사실의 일부, 곧 현재는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을 살짝 감추어서 상대방이 스스로 속아 넘어가도록 고단수의 처세술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곧 효용성의 한계는 금방 드러났습니다. 14-16절을 보면, 아브람은 사래 덕분에 애굽 왕 바로에게서도 대접을 잘 받았고 낮선 그곳에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에 사랑하는 아내를 바로의 후궁으로 빼앗길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봉착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결과는 결코 사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세술로 목숨도 부지하고 재물을 얻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얻은 재물을 기뻐하면서 사래는 포기하고 젊은 아내를 다시 얻으려 할 만큼 아내에 대한 애정이 없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아내야 어떻게 되든 차려진 진수성찬만 먹고 앉아 있는 미련 곰탱이도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엄청난 위기 속에서 아마 아브람은 절박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을 것입니다. 일명 이런 기도를 ‘소방서 기도’(앵앵 거리며 불 끄는 기도)라고 하지요.

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이 임했고, 바로는 그 재앙이 아브람의 사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는 아브람을 꾸짖은 후에 그의 아내 사래를 돌려주고 이미 주었던 풍부한 육축과 은금도 함께 가지고 떠나게 했습니다(16, 20-13:2). 13:3-4절을 보면 그는 남방에서부터 다시 올라와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에 이르렀고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다시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아브람의 미성숙한 부분을 그대로 방치해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삶의 어떤 영역에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삶의 다른 영역에서는 세상의 처세술을 따라 살도록 눈감아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한동안 참아주셨지만 그런 처세술이 아브람의 습관적 행동이 되었을 때, 분명하게 그 문제를 터치 하셨습니다. 그에게 주신 언을 성취하시기 전에 먼저 아브람이 변화되어야 할 부분들을 들추어내셨고, 당신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고쳐나가심으로 아브람을 성숙케 하셨습니다. 마침내 아브람이 삶의 모든 영역과 모든 형편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나님의 백성, 참으로 복덩이라 할 수 있는 존재로 빚어가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말썽꾸러기’ ‘골칫덩이’ ‘애먹이고 힘들게 하는 존재’로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말없이 아브람의 약점과 허물을 감당해주셨습니다. 위기 속에서 적극적으로 아브람의 편이 되어주심으로 그를 향한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에게 믿음 없다고 책망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불신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능력 있게 역사하시며, 자기 백성들을 친히 보호하시고 구출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내를 지켜주는 것이 남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남편을 지켜주는 것이 아내가 아니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아브람으로 삶의 어떤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아내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가지도록 도우셨습니다. 본문에는 ‘그 아내’ ‘그의 아내’ ‘아브람의 아내’ ‘네 아내’ 등의 표현으로 아브람의 아내가 7번 언급되었습니다. 어쩌면 아브람과 사래는 그 시대 풍조에 영향을 받아서 아내란 남편을 위해서 존재하고 남편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 대의명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존재로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그 시대의 관점’에서는 이런 일들은 부도덕한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사래도 아브람만큼이나 소중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녀도 하나님을 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람을 통해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사래와 함께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은 이 두 사람의 믿음을 함께 언급합니다. 베드로 역시 아내를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벧전 3:7)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부부관’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하셨습니다. 그 시대의 관점에서 벗어나 이러한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게 하려는 교육은 아브람의 삶에서 몇 번 더 반복됩니다.

사래가 바로의 궁으로 들어간 사건은 단지 아브람의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아브람에게 주셨던 언약이 파기될 수 있는, 구속 역사를 그르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아마 아브람이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많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든든한 언약의 수호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얕은  꾀와 처세술이 더 큰 위험을 초래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허물과 약점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언약을 수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수호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약속하신 말씀, 그분께서 성도 개인과 교회에 두신 뜻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허물과 약점이 드러나는 아픔 속에서도 성도가 감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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