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의 일을 하려는 자는 (행 28:30-31)

  • 잡초 잡초
  • 219
  • 0

첨부 1


제목:주의 일을 하려는 자는
본문:행 28:30-31

사람은 누구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 무엇을 닮고 싶은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누구를 닮고 싶다고 말할 때 닮고 싶은 것도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닮고 싶다는 것은 같이 되고 싶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를 닮고 싶다고 말할 때 무엇보다 겉모습이 누구를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잘 생긴 사람을 보면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겉모습이 같은 것은 공동체를 이루는 일에 그렇게 중요한 일체감은 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 닮고 싶은 것은 재능을 닮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누구든지 육체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볼 때 나도 그러한 능력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들을 볼 때 나도 저렇게 공부를 잘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재능을 닮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학력이나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닮고 싶다는 생각에는 그런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닮고 싶은 것 가운데 인격을 닮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고상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을 볼 때 나도 저러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높은 인격으로 세상에서 영향을 주었던 사람들을 삶의 모델로 삼고 존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닮고 싶은 사람들이 따로 있습니다.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조롱의 대상이었고 어리석어 보였던 사람들을 성도들은 닮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단순히 이런 사람들이 살았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어떤 모델로 제시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닮기를 원하고 노아를 닮기 원하고 아브라함을 닮기 원합니다.

닮는다는 의미에서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닮고 싶은 인물이요 둘째는 닮고 싶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도 다른 사람에게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닮고 싶은 삶이 내게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다른 사람이 닮고 싶지 않는 삶도 내게 있을 것입니다. 복된 삶을 살아가는 삶이란 많은 것을 소유한 삶이 아니라 타인이 볼 때에 닮고 싶은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요삼 1: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본문은 바울의 로마에서의 마지막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에 절대 가치를 전도에 두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전도의 삶을 살았다고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켰다고 하면서 자신의 달려온 길의 성격을 전도인의 삶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삶을 교회와 성도들이 본 받도록 요구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자신의 삶을 성도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사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고전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빌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후 3: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본으로 자신의 삶을 사셨던 바울 사도의 실제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사용하실 수 있도록 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이 땅에 많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바울 사도의 삶을 보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원리를 볼 수 있습니다.

1.바울은 주의 일에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행 19:21절에 보면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롬15:24절에는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 줌을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 싶은 사명감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로마에 오기를 원했고 비록 죄수의 몸으로 호송되어 온 몸이기는 하지만 하여간 오랫동안 소원했던 로마에 와서 비로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로마로 가기를 소원했지만 바울과 같은 소원을 가지고 로마로 간 사람은 없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비록 재판을 앞두고 있었고 그 재판을 통해서 죽을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도 로마에서 복음 전하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개선 장군으로 도착한 것도 아니오, 한 나라의 대사로 영접을 받으며 들어온 것도 아닙니다. 그는 죄수의 몸으로 결박되어 끌려온 죄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에 오게 된 사실을 감사했습니다. 로마에도 전도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성도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소원은 그 인생의 가치관을 만듭니다. 성도는 소원이 달라져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대한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비록 내게 주어진 현실이 소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소원을 두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향한 소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소원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가슴에 소원을 가지면 하나님은 그 소원을 이루십니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시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위한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니엘 같은 사람은 예루살렘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포로시대의 사람들도 예루살렘에 대한 그리움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를 소원하며 기도했습니다. 물론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온 사람도 있고 바벨론에서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소원이 바로 그들의 믿음과 삶을 지켰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소원이 없는 사람은 결코 믿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자동차의 왕 포드가 자동차를 만든 동기가 바로 이 경우입니다. 그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병환으로 위독하여 급하게 말을 타고 의사 선생님을 모시러 갔습니다. 말을 최대한으로 몰았지만 그의 마음이 급한 만큼 말의 속도는 느리게 느껴졌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한 서둘러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집에 오니 어머니는 이미 운명하신 뒤였습니다. 그 때 이 소년은 생각했습니다. 좀더 빨리 달리는 방법은 없을까 ? 좀 더 빠를 수 있다면 하는 소원이 그로 하여금 자동차를 만들게 만든 것입니다. 꿈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2. 주의 일을 하려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방법을 허락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에서 주거에 제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은 만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가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수는 없었지만 자기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합리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갈 수 없을 때 하나님은 찾아와서 복음을 듣게 했습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할 때 한 가지 방법에 붙잡혀 있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때로 반대의 방식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방해자는 때로 복음의 장벽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 복음의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홍해 앞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는 갇히게 되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바로 왕은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하게 노예로 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홍해 앞에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라고 했습니다. 홍해가 장벽이 아니라 길이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죽는 장소가 아니라 바로의 군대가 죽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톨스토이 만년의 단편소설에 두 노인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한 마을에사는 두 노인은 1년 작정하고서 1백 루블씩 돈을 마련, 평생 소원인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에 나서게 됩니다. 두 노인이 독실한 신자이긴 하나 에핌은 술 담배를 않고 매사에 교리 지키는 것을 우선한데 비해, 에리세이는 교리보다 정신을 우선하는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성지로 가는 도중에 에리세이가 외딴집에 물을 얻어 마시러 가면서 친구인 에핌에게 먼저 길을 가라고 하고 다음 만날 지점을 약속하고 에핌과 헤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예상밖의 일이 벌어지게 되는데 외딴 농부의 집에 물을 얻어먹기 위해서 들어 갔더니 이 외딴집농부 일가가 기근으로 죽어가고 있었었습니다. 그 참상을 보고 떠나갈 수 없어 물을 떠 먹이고 갖고있던 양식으로 죽을 쑤어 먹였습니다. 일단 정신을 차리게 한 다음 가게에서 식량과 농사를 위해 씨앗이며 수레와 말을 마련해주었습니다.

결국 가지고 온 돈 100루블 중에 17루블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헤어진 에핌을 만나면 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지 순례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 오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이 의아해 할 때 하나님이 인도하신대로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하고 돌아왔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친구인 에핌이 돌아오면서 에리세이가 갔던 농부의 집에 가보고서 그의 행한 일을 듣게 됩니다. 에핌은 요단 강물을 세례의 물로 에리세이에게 선물하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성지를 육체의 발로 갔다 왔지만 자네는 영으로 갔다왔지 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새로운 방법으로 그의 나라를 보게 하시고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하게 하십니다.

3. 주의 일을 하려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협력자를 붙여 주신다.
바울에게는 항상 두 가지 큰 핍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유대교로부터 오는 핍박이었는데 그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그리스도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유대주의 기독교인들로부터 오는 핍박이었습니다. 그것은 구원이 예수를 믿는 믿음과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가능하다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조건이 믿음과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두 가지 압력이 떠날 날이 없었습니다.

진리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주장하기 때문에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와야 진리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 진리를 위해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요구와 주장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다 포기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재산을 포기해도 자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설혹 건강을 다 잃어 죽게 되였다고 해도 복음을 포기할 수 없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왔을 때 이러한 핍박은 로마에서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오기 전에 이미 로마에 유대인들이 세운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에서 바울에게 와서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주어진 평화의 시기에 복음을 최선을 다해서 전할 수 있었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로마 교회를 사용하시는 일에 토대가 된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핍박자도 많았지만 그를 도우려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바울은 핍박자를 보면서 실망한 것이 아니라 협력자들을 보면서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두 가지 사람이 곁에 있습니다. 핍박자가 있고 협력자가 있습니다. 성도는 이러한 상황에서 핍박자를 보면 충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협력자를 또한 예비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