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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격려의 사람을 찾습니다 (행 4: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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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려의 사람을 찾습니다 (행 4:36-37)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에 힘입어 선교사역을 은혜가운데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막상 돌아와 설교를 준비하려니까 오늘이 광복절 주일로 예배를 드리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 제 자신이 참 묘한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난 36년 동안 이 땅에서 저지른 저들의 만행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지 않습니까?

지난 2004년 8월 1일, 폴란드 바르샤바의 볼스키 국립묘지에서는 60년 전 나치에 대항하다 희생된 시민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 독일 슈뢰더 총리가 참석해 "독일인들은 나치의 범죄를 생각하면 부끄러움 속에서 몸을 수그린다."고 과거사를 사죄하며, "나치 독일이 폴란드인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줬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런 뒤 당시에 나치군에 항거했던 폴란드 시민군과 노병들을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독일 정부와 기업들이 함께 설립한 '기억-책임-미래 재단'은 작년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강제로 동원했던 유태인과 일반 노역자 13만 명에게 보상금을 지급했습니다. 나치 정권과 대기업들이 각종 공사판과 군수 공장에서 노예처럼 부려먹은 것을 보상하기 위해 6조원 가량의 재원을 마련하고, 60년이 지난 지금 배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일본은 어떻습니까? 일본 정부는 징용, 징병, 위안부 등으로 끌고 간 100만여 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에게 개별적으로 피해 보상을 해주기는커녕 사과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야베 총리는 미의회가 위안부 문제를 일본의 분명한 잘못임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법적 책임이 없다고 큰 소리를 치지 않습니까? 심지어 일본의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우익 단체에서는 각급 학교에서 사용할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 정부에 검정을 신청했는데, 위안부 문제 같은 것은 아예 빼버렸고 대신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일본 땅에 우리가 선교를 다녀온 것입니다. 제가 일본 땅에 가기 전에 한 성도로부터 '왜 하필이면 일본입니까?'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저 역시 일본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번 선교를 준비하며 사도 바울이 고백한대로 자신은 복음의 빚을 진자라고 하며 평생을 그 빚을 갚는데 헌신을 한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진자들이 아닙니까?

요나서를 보십시오. 가기 싫은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외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거절하다가 얼마나 혼쭐이납니까? 풍랑을 만나지 않나, 고기 뱃속에서 시달리지를 않나, 정말 정신 못 차리도록 하나님께서 요나를 흔들어 깨워 니느웨로 가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나요? 그것은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 놀랍고 무궁한 자비는 신약 성경에 와서 요한복음 3장16절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중요한 말 한 가지가 나옵니다.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말속에는 빈부귀천, 남녀노소의 차별이 전혀 없습니다. 성공한 자, 성공하지 못한 자의 차별이 없습니다. 피부색을 가지고 하나님이 구별하시지 않습니다. 모두를 똑같이 불쌍히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위대한 하나님의 자비요,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떠한 조건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자비는 온 우주를 가득히 채우고도 남는 풍성한 자비입니다.

요나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이 자비 앞에는 못 나올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 못 믿을 사람이 없고,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 자비 앞에서는 하나도 예외가 없습니다. 다 똑같이 사랑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이젠 바로 우리의 다음세대들에게 이 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우리 교회 청년들을 흔들어 일본 땅에 하나님이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늘 맞이하는 광복절 주일은 단순히 과거 역사만을 돌아보자는 것이 아니라 광복 이후에 미래 비전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할 시점에 서 있습니다. 분명 광복이란 뜻은, 말 그대로 빛을 찾은 날이요 주권을 되찾은 날입니다. 36년 동안 일본사람의 고통스러운 지배 밑에서 신음하다 자유의 빛을 회복한 날입니다. 이제 광복 62주년을 지나면서 우리도 새롭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 저 쓰라린 세월이 우리 민족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 민족의 앞날을 위해 어떤 의미로 새겨야 하는지? 그리고 이제 용서해야 합니다. 일본도 용서하고, 친일파도 용서하고... 물론 저들이 잘못을 참회할 때 말입니다. 언제까지 원한을 가슴에 묻고 갈 수는 없습니다. 역사도 청산해야 하지만 우리 안에 남아있는 저 원한도 청산해야 합니다. 그래야 홀가분하게 미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여전히 사탄의 권세로 인해 흑암 아래서 소망 없는 자로 살아야 할 인생들인데 진리이신 예수로 말미암아 자유함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젠 그 자유의 의미를 보다 깊이 깨달아 하나님의 성숙한 자녀로 삶에 한 복판에 설 때 그 자유를 누리는 한 사람으로 인하여 교회와 사회는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을 보면 초대교회 역사를 펼쳐 보이며 우리에게 한 중요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대단한 지면을 할애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통해 세워지는 중요한 인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명의 사람 사울을 세워 사도 바울이 되게 했던 사람, 버림받은 마가를 격려해 다시 일선 사역자로 세워주었던 그가 바로 격려의 사역자 바나바입니다. 어쩌면 그는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면서 가장 인생을 보람차게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본문을 보면, 요셉은 구브로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자기 고향인 팔레스타인에서 자란 유대인이 아닌 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이었어요. 레위족이었지만 제사장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니요, 사도도 아니요, 보통 레위인, 즉 우리와 같은 평신도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러나 사도행전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바나바는 초대교회에서 사도 바울에 버금가는 중요한 지도자의 위치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이 평범한 이 사람을 위대한 바나바로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바나바를 그토록 위대한 지도자로 세웠습니까? 사도행전은 그가 행하였던 '격려의 삶'으로 인해, 그가 이러한 위대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얘기합니다. 그가 살았던 격려의 삶이 너무나도 놀라웠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를 원래 이름보다는 '격려자'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 이 사람이 자꾸 그리워집니다. 이 사람이 그리워지는 이유가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본문을 중심으로 세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너무나 타산적이요 계산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타산적인 시대에 계산을 초월하고 살았던, 그리고 더 높은 가치를 위해서 헌신할 줄 았았던 바나바가 그리워집니다. 4장은 바나바에 대한 첫번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6-37절에 보면 성도들이 교회사역을 위해 자신의 밭을 팔아 헌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굉장한 부흥을 맛보았습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교인이 몰려들었어요. 교회가 성장한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한꺼번에 들어오다 보니 많은 필요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 당시 역사나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루살렘 교회는 참으로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로마의 속박에서 수많은 세월을 눌려 지내왔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복음을 듣고 교회 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겁니다. 당장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교회가 어떻게,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가 였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구제에 대한 문제가 교회 안에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이 교회의 필요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소유의 밭을 팔기 시작했어요. 그 밭을 판돈을 전부 교회 앞에 내놓았다고 말씀합니다. 바나바가 자기의 밭을 내놓은 이유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이 공명심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에게 필요가 없어서 넉넉한 가운데 바친 것도 아니었어요. 그가 자기의 소유를 판 단 하나의 이유는 가난한 자들에게 조금이라도 격려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나바라고 해서 왜 돈이 필요 없고, 쓸 곳이 없었겠습니까? 그에게도 가족이 있었어요. 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취미생활도 하고 싶고, 저축도 해야 되고, 쓸 곳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바나바'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겁니다. 늘 다른 사람의 필요를, 늘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던 겁니다. 이렇듯 격려의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바라봅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늘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음식도 자기가 좋은 것을 먹어야 되고, 잠자리도 자기가 좋은 곳에 늘 자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건 자기가 좋은 것을 하고, 그 다음 남은 것을 가지고 타인에게 줍니다. 그런 반면에 어떤 사람은 늘 자신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합니다. 자기에게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없어서 자기의 것을 내놓은 것이 아닙니다. 나도 쓸 곳이 많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과감하게 내 것을 희생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놓을 때,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격려가 될 줄 믿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격려의 삶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얼마나 가졌느냐 보다 어떤 태도를 가졌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두 번 째로 바나바가 그리워지는 이유는 이 세상 모든 것보다 인간의 소중함을 알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사회는 경쟁사회 이기에 성취를 최고의 목표로 삼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사회 모든 분야에서 경쟁을 치루고 있습니다. 입시경쟁, 취업경쟁, 생존경쟁, 수출경쟁, 출근경쟁...등 이미 우리는 경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말로 심각한 것은 목표만을 추구하다 보니 인간성은 짓밟히고 인간이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 되어버리고 마는 인간성 상실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판이니 남을 짓밟아서라도 자신이 성공하기를 원하는 서글픈 시대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어떻습니까? 사울이 예루살렘 사람들의 의심과 비판을 받았을 때 바나바는 사울을 적극적으로 변호했습니다. 행9:26,27절에 보면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 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바나바가 어떻게 주님 본 것을 압니까? 그는 그 자리에 같이 있지 않았어요. 그런데 사울 대신에 바나바가, 사울이 예수님 만난 것과 영접한 것을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얘기해 주는 겁니다. 바나바가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왜 이렇게 알 수 있었을까요? 사울을 믿어준 겁니다. 그가 자기에게 와서 간증을 하는데 믿어주고 싶었던 겁니다. 도와주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를 믿고, 사울이 아무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얘기를 해도 믿지 않으니까 자기가 대신 나가서 얘기를 해 준 겁니다. 바나바의 인격을 아니까 그제야 성도들이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행15장에 기록된 마가에 대한 바울과의 의견충돌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차 전도 여행기간 중 떠나간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와 그런 사람은 데리고 갈 수 없다는 바울과 의견이 대립된 것입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열심히 변호합니다. "이 사람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번의 실수로 어찌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실수 때문에 더 열심히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마가도 데리고 갑시다." 이렇게 말했을 지도 모릅니다. 결국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갔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만일 바나바가 그때 쓰러진 마가를 일으켜 세우고 격려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성경책 중에는 그토록 중요한 '마가복음'이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실패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바나바가 그를 격려했기 때문에, 그는 다시 세움을 입어서, 결국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놀라운 사도가 된 것입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도 이것을 깨닫고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후서를 쓰며 디모데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려 오라! 저가 나에게 유익한 사람이니라!" 마가와 화해하려고 한 겁니다. 그때 만약 바나바가 마가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한 사람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그 가능성을 키워주는 사람, 비록 그의 과거가 우리를 실망시켰어도 비판하기 보다, 버리기 보다, 포기하기 보다.... 그 사람을 믿어주며 병들고 약하고 쓰러져있는 형제의 손을 붙잡고 함께 가자고 소리치는 바나바 같은 이 사람이 부럽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바나바가 그리워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신앙 때문입니다. 행11장에는 바나바의 또 다른 아름다운 사건이 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 목회자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나바가 부임한 그 날부터 안디옥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바야흐로 바나바의 인기는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일을 바나바가 혼자 감당하기 어렵자 그는 바울을 초청하여 함께 동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바나바가 옹졸한 목회자였다면 바울을 데리고 오는 것을 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인기나 명예, 성취욕보다도 하나님의 일이 더욱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불렀고 그가 오자마자 교회는 더욱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나바의 판단은 신중했습니다. 바나바의 천거로 사울은 바울이 되었고 바울은 바울되기 위한 일터의 현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있었기에 비로소 안디옥 교회는 세계선교의 센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행11장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표기가 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장 이전에는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기록되었지만 이일 후에는 "바울과 바나바가"로 표기가 바뀌고 있습니다. 세계선교의 주체가 바나바에서 바울로 옮겨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바나바의 불평이나 원망은 전혀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침묵으로 기쁘게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의 사역을 계속 감당하는 이것이 전혀 섭섭하지 않았던 이 사람,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인기, 체면, 목표보다도 주님의 사역이 더욱 활발하기를 원했던 바나바, 여러분은 이 사람이 그립지 않습니까? 그는 오로지 주의 일이 부흥되기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승리하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원했던 사람,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기 원했던 사람,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숙하기를 원했던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한번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격려의 삶이 필요합니다. 우리 가운데 넘어져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 넘어진 자였습니다. 모세도 쓰임 받기 전에 넘어졌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넘어진 경험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다 허물이 많았던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격려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고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별명은 '보혜사'였습니다. 파라클레토스! 직역하면 '옆에 서서 돕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왜 보내셨는가? 우리는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실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알고 우리가 낙심하는 것을 방지하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신 줄 믿습니다.

오늘 째 아프칸에 피랍 되어있는 우리의 형제들이 억류된지도 벌써 25일째가 되갑니다. 지금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2사람이 풀려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기대감도 크지만, 한 달이 다 되 가도록 고통 속에 있는 당사자들은 얼마나 충격이 크겠습니까? 그들의 가족, 역시 또 다른 고통 속에서 하루 하루를 지내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 또 다른 상처를 가족과 교회가 받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차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사례인데 참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실 이런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향해 '유서 쓰고 갔으니, 조용히 죽어라', '내가 낸 세금으로 몸값 지불하지 말아라'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시각은 너무했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얼마 전에 한 용기 있는 유명 탈렌트가 자신의 미니 홈피에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에 인질로 잡혀있는 한국인 봉사단원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을 했습니다. 이 글은 하루에도 20,000건의 접속이 될 만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애통하는 마음'이란 글인데 이런 내용입니다. "악어들이 득실거리는 어느 강가에 '위험'이라는 푯말이 서 있습니다. 강을 건너던 작은 배가 뒤집혀 아이들이 빠져서 허우적거립니다. 그들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죽어 가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한 무리의 어른들이 강으로 뛰어 듭니다. 아이들을 한 명, 두 명 구하던 그 어른들은 이내 악어의 공격을 받아 피투성이가 되기 시작합니다. 강가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할까요? 아니면, '위험'이라는 푯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네 의지로 갔으니 알아서 해라" 할까요? 혹은 "지금 악어에게 물리고 있는 사람이 나와 같은 종교인가, 아닌가"를 분석할까요?"라는 문구에서 위험에 처해있는 그들을 종교와 여러 가지 상황을 생각하지말고 무조건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격려의 글이 많은 사람들의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덧붙여 '돌아가신 두 분과 아직 억류되어 있는 스물 한 분은 선하고, 훌륭한 분들입니다. 이 분들은 존재함으로써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보석' 같은 사람들입니다'라고 그들의 선행을 격려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비판과 정죄가 난무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문을 펴면 온통 비판의 글들이 가득합니다. 학생들은 교사를 비판하고, 고용인과 고용주들은 서로의 잘못을 비판합니다. 국민들은 지도자를 비난하고, 지도자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급급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뜻하게 위로해 줄 사람이 참으로 없는 세상입니다. 사람과 이 사회를 세우는 격려의 사람은 더욱 찾아보기가 어려운 세대입니다. 누가 이 척박한 세상을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정죄의 화살을 맞고 남몰래 신음하는 자들을 찾아가 치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 광복 62주년을 맞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좀더 받은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세상은 바나바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바나바를 소리쳐 요구하고 있습니다. 누가 바나바가 되어 낙심하여 멸망해 가며, 격려가 필요해서 아우성치는 저 사람들의 소원을 채울 수 있겠습니까?

오늘 당신이 이 사람이 되어 보지 않겠습니까? 바나바와 같이 남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고, 남을 믿어 주며,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목적으로 생각하며, 넘어진 자를 과감하게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자!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가정과 교회, 불신과 낙담으로 인해 넘어져 가는 이 한국 사회가 다시 일어나 수많은 나라와 열방에 희망을 주는 민족이 될 줄 믿습니다. 지금은 바나바가 그리운 시대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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