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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의 유일성 (행 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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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어느 일간 신문의 종교난에 종교다원주의의 대부격이라 할 수 있는 변선환교수에 대한 글이 실렸다. 그 기사에서 변교수를 한국 기독교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종교의 벽을 허문 개혁적 인물로 치켜 세웠다.

요즘 샘물교회 봉사단의 피랍사건으로 인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구원의 유일성 문제”가 논란의 주요 이슈로 등장했다. 그것은 봉사단의 피랍사건과 더불어 아직도 힘겨루기가 계속되고 있는 이랜드 홈에버 노조 파업 사건과 부산 서면 지하도에서 모금 활동을 하고 있는 스님에게 한 맹렬한 전도자가 안수한 사건과 배경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사건들로 인해 계속되는 비난의 이면에는 기독교의 구원 교리 자체를 뒤집으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존립에 관련된 중대한 문제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고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일방통행적 교리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 교리로 인해 특히 개신교의 전도 방법이 공격적이고 배타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이 문제로 인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심지어는 신앙이 흔들리는 결과도 나타날 것이다. 특별히 구원의 확신이 없는 신자일 경우 더욱 동요가 심할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구원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으며 교회는 왜 예수 구원의 유일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가?

먼저 이슈가 되고 있는 본문 12절 말씀에 대한 배경을 살펴 보겠다.
행3장,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다가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하체마비장애인)를 만난다.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 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행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이 사건을 통해 군중들이 성전으로 모여 들었고, 베드로가 백성들에게 설교할 때 남자만 5천명이 믿었다.

(행 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이 일로 인해 베드로와 요한은 붙잡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심문을 당하게 되었다.
(행 4: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대하여 베드로가 담대히 답변하였다.
(행 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행 4:9)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행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행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공회원들 앞에서 베드로의 답변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당신들이 죽였으나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다.

2)당신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쓸모 없는 돌처럼 버렸으나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할 머릿돌과 같이 중요한 기초석이 되게 하셨다.

성경주석가 이상근 박사는, “예수의 이름은 앉은뱅이의 육적 구원을 넘어 전 인류의 영적 구원에 이른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구절은 “구원의 유일성”에 대한 명확한 선언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안에서도 구원의 유일성에 관한 교리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진보주의 입장에 있는 신학자와 성도들이다. 그들의 주장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통 종교다원주의라고 부른다.

쉽게 설명하자면, 높은 산이 있는데 그 정상에 오르는 길은 동서남북 여러 갈레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길로 가든 정상에서 다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등산에 비유하면 그럴 듯한 이론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등산이 아니라 영혼 구원에 관한 중대한 문제이다. 종교다원론자들의 주장대로 아무 종교나 다 믿어서 구원받는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사도 베드로의 말을 잘 들어보라.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2004년도 대광고등학교 교목실장을 지내다가 강의석군 사건으로 목사직을 반납한 유상태씨란 분이 “당신들의 예수”란 책을 썼다. 그는 그 책에서 행4:12의 말씀은 사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이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말씀을 절대화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부분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앞 부분은 예수님의 말씀이 맞지만, 뒷 부분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후대의 교회들이 덧붙였을 가능성이 많다라는 것이다.

인간적 측면에서 모든 종교와 화평의 관계를 유지하고, 기독교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구원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시도이기는 하지만 자기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훼손하는 억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진리를 혼란케 하는 거짓교사들의 이론들이 난립하고 있다. 세상과 평화를 시도를 시도하는 의지는 가상하지만 진리를 왜곡하면서까지 세상과 친해지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갈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갈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방편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14:6의 말씀을 근거로 증거하겠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 되시기 때문이다.
세계의 모든 종교를 구분하면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계시종교, 다른 하나는 행위종교다. 행위종교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고, 계시종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인간은 죄의 연약성 때문에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찾을 수 없다. 방황하다가 헛되다고 노래할 뿐이다.

(잠 14:12)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착한 일을 아무리 많이 해도 부족하다. 도를 아무리 많이 닦아도 부족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 된다. 다른 길은 없다. 속지 말라.


2)예수님 만이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진리는 거짓과 대조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아무리 고매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참되다 할 수 없다. 진실하고 겸손한 사람일 수록 자신이 악한 존재이며 추한 존재임을 고백한다.

(롬 3:4)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

옳은 말이다. 인간은 하나같이 다 거짓된 존재이다. 석가모니가 집을 떠나 방랑하며 진리를 깨달으려 보리수 아래서 수행한들 그 자신이 진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존재 자체가 진리이시며 진리로 충만하신 분이시다. 진리되신 예수께로 나아갈 때 인간은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예수님 만이 생명이 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명은 사망의 반대되는 의미를 말한다.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역시 자기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물리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다. 그러나 예수의 생명이 있는 자에게는 심판이 없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 만이 하나님께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 되시고, 예수님 만이 죄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는 진리가 되시며, 예수님 만이 사망의 공포에서 생명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 되신다.
복음주의적 입장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은 구원의 유일성에 대하여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 들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유일성에 대하여서는 너무나도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이기에 종교다원주의자 외에는 반론이나 이론의 여지가 없다. 누가 뭐래도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주변에서 아무리 잡아 흔든다 해도 이 진리만은 양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예)열쇠 예화

예수 구원의 유일성은 독일무이하여 다른 종교나 철학과 동화되거나 혼합될 수 없기에 핍박 받는 일도 발생하는 것이다.

그동안 교회가 선교전략과 방법론에서 무지했고 어리석었고 조심성이 없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성하고 더욱 겸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다원론적인 구원의 보편성까지 슬그머니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귀한 구원의 진리를 더욱 확고히 다지는 기회로 삼으면 전화위복의 은혜가 될 것이다.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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