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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생을 풍성하게 사는 사람 (빌 4: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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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풍성하게 사는 사람(빌 4:15-20) 
 
사람들의 삶에 대한 풍부감과 빈곤감은 가지고 있는 소유의 과다에 달려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비록 적게 가졌어도 감사하고 많이 가졌다는 풍부한 심정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늘 불평하고, 비교하고, 마음의 빈곤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불행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어서 늘 마음이 다급한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만 보면 뭔가 저 사람을 통해서 내가 유익을 취해야 되겠다고 마음이 분주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번 여름 행사들을 보면서 우리 참여한 학생들도 참 열심이었지만 그 학생들을 위하여 어려운 휴가내고, 또 어려운 시간, 또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봉사하고, 애쓰고, 섬기며, 여러 가지로 힘을 다하는 우리 선생님들과 봉사자들의 모습을 볼 때 참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쏟고, 시간을 쏟고, 가진 모든 것을 다하여 동참하고, 봉사하고, 은혜를 나누다 보면, 어느덧 그것이 우리들의 삶의 목표가 돼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많은 것을 가져서 풍요로운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어떻게 느끼고 누리며 내 마음속에 기쁨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갈려지는 것을 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 삶의 풍성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명확하게 하나님께 대한 기대함으로부터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즉 하나님께서 내 모든 쓸 것을 풍성하게 채우실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든든하고, 의지가 되고, 마음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그의 선교여정에 있어서 필요한 것을 제공해 준 빌립보교회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가 힘들어했던 데살로니가 사역에 대해서 그 어려운 지경에서 그들이 보내줬던 도움과 그리고 사랑의 손길들을 기억하며 또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위해 이렇게 아름답고 귀하게 협력하고 헌신한 그들에 대하여서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실 아름다운 제사이며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풍성한 대로 그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실 것을 또한 이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마음과 그가 기대하고 있는 내용, 또 빌립보교인들의 모든 모습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풍요롭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평생 동안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첫 번째 생각해 보는 것은 언제나 그 마음에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풍요를 느끼며 걱정대신에 감사와 기대를 가지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바로 사도바울의 심정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풍요를 느끼며 또 뿐만 아니라 상대를 평안하게 하고자 하는 심정을 가졌습니다. 오늘 이들에게 전한 내용을 보니까 먼저 <18절>에 이렇게 기록이 됩니다. 내게는 또한 모든 것이 있고 풍부하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사도바울이 곳곳을 순회하면서 전도하는 선교사역을 이루는 데 있어서 뭐 가진 것이 그렇게 많겠습니까? 가진 것이 있어도 다 써야 될 것이고, 또 뿐만 아니라 그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것이 있을 텐데 그는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그 있는 것조차도 풍성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 사도바울의 마음은 빌립보 교인들을 조급하게 만들어서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그들의 마음에 기쁨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심정이 들도록 했던 겁니다. 상대를 풍요롭고 상대를 편안하게 하는 겁니다. 또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기 마음의 풍요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4장 15절>을 보면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너희가 처음에 나를 도와준 사람이 처음 너희였다.

그리고 또 <16절>을 보니까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하면서 이와 같이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처음 어려웠을 때 나를 도와주었고 또 여러가지 어려운 지경에 있을 때 도와주었던 사람들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심정이어야 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이전에 어려웠을 때 또는 처음에 그와 같은 작은 도움이 큰 기초가 되어서 우리의 삶에 큰 기쁨이 있지 않았는가 생각을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와 같은 것을 잊지 않고 참 감사하는 겁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풍부와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상대를 배려하여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통해서 어떤 것을 더 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이전에 베풀어줬던 그 은혜와 사랑만 생각해도 내가 기쁘고 감사하고 또 뿐만 아니라 나는 모든 것이 있을 만큼 풍부하다. 너희가 이와 같이 너희가 나에게 기쁨을 주었던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더욱이 자신을 생각함보다 상대를 더 생각하고 축복하는 겁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항상 상대를 내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까하고 상대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람들도 보면 항상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에게 내가 어떤 유익을 취할까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그 사람을 보면 내가 어떤 유익과 도움을 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먼저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집에 같이 사는 사람도 저 사람 때문에 내게 어떤 유익이 있었는가 생각하면 억울하기만 합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 생각하면 감사할 뿐입니다.
사람들에게도 항상 대할 때 내가 저 사람에게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라고 안타까우면서 도움을 주지 못해서 애쓰는 삶이 될 때 우리는 상대에 대해서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기본 시각, 일을 대하는 기본 시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여기서 어떤 도움을 얻을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어떻게 큰 도움을 끼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예를 생각해야 되는데 이런 것 밖에 생각이 안 나서 여러분께 드리는데 여러분 오해하지 말고 그냥 재밌다하고 웃는 얘기로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게도 교육자분들이 여러분 되잖아요. 한 30여분 되다보니까 때가 되면 옮기시는 분들도 있고 새로 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주님 앞에 아주 헌신하고 그의 삶을 주님 앞에 드리기로 하신 분들인데 또 저희가 청빙을 할 때 또 이력서도 보고 추천도 받고 해서 보고 그 중에서 또 일정한 분들을 청해서 면접을 보지 않습니까? 여러 목사님들이 쭉 앉아서 앞에 계신 분들의 면접을 보는데 이렇게 여쭤봅니다.
“왜 이 교회에 지원하셨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대답을 많이 하십니다.
“예, 제가 몇 년 이 교회에서 잘 배우고 또 목사님께 잘 배워서 제가 교회를 개척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제가 목회를 잘 하려고 합니다. 목사님 잘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대부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분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 교회와 목사님께 잘 배워서 교회에 큰 기여를 하겠습니다.” 하는 사람들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다 배워서 간대요. 들어올 때부터 배워서 다 간대요. 그래서 제가 그렇게 가르쳐 드립니다.
“여기서 열심히 잘 배워서 가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열심히 배워서 이 교회에 헌신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슨 말씀을 드리냐면 저희 교회 처음 부임하신 분들에게 꼭 말씀을 드리는데 “여러분들은 이 교회가 이 지상에 있는 수많은 교회 중에서 여러분들이 사역할 수 있는 유일한 딱 한 개의 교회다. 나는 이 교회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 교회에서 배우시고 봉사하시고 헌신하시고 사역을 하십시오.” 하고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나는 내 평생 섬길 수 있는 교회는 이 한 교회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 교회에 내 모든 것을 힘을 다해서 일단은 내가 배워야 되니까 배우고, 또 배운 것을 가지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이 교회에 뭔가 기여하고 공헌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이 교회에서 배우고 사역하고 또 봉사하고 헌신하십시오.”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때가 되고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면 그곳에서도 내가 지금 하나님께서 나에게 섬길 수 있는 유일한 교회를 주셨는데 정말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서 나의 모든 것을 헌신하고 공헌하고 기여하게 하셨는데 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하고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내가 어떤 한 교회를 정해놓고 아니면 개척을 하고 해야 되는데 거기 가서 내가 힘을 다 쏟고 여기서는 배우는데 주력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뭔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내게 주어진 여건, 내게 주어진 상황, 내게 주어진 모든 상태 속에서 이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최고요, 유일한 것이요, 또 이것을 통해서 나의 모든 것을 다 힘을 쏟고 하나님 앞에 헌신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입니다. 아마 우리 목사님 전도사님들은 전부 그런 생각으로 다 봉사하고 헌신하고 계십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그러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의 삶 가운데 내게 주어진 모든 것, 내가 지금 어떤 일을 해도 내가 누구를 만나도,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어도 정말 이게 내가 해야 될 유일한 사람이고, 내가 섬겨야 될 최고의 사람이고, 내가 해야 될 유일한 모든 거다라고 생각하고 한다면 우리 마음도 달라지고 우리의 모든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교역자 처음 오면 한 3년은 성도들에게 민폐 끼치는 것밖에 없다. 한 3년은 겨우 제 몫을 할 것이고, 한 3년 공헌하게 될 것이다. 이런 말씀 드립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때로는 배우느라고 피해를 끼치기도 하지만, 내가 언젠가 훌륭해지면 내가 공헌할 때도 있을 거야 하는 마음을 가지고 어려운 때를 넘겨가고 그러면서 또 좋아졌을 때 오히려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하며 우리의 힘을 다하여서 섬길 수 있다면 우리의 모든 삶의 곳곳에서 바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능력이 못돼서 별 기여를 못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심히 배우고 또 수고하고 애써서 일정한 능력이 주어졌을 때 정말 우리가 수고하고 애써준 많은 사람들에게 기여하고 공헌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또 복되고 귀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의 헌신과 협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항상 그들을 세우고 축복하는 것이 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뭘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나는 너희들이 풍성한 하나님의 열매들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더 큰 마음에 기쁨을 끼쳐서 더 큰 은혜와 사랑의 교류를 이루는 것을 봅니다.
특별히 풍요를 느끼는 부유한 마음이 상대를 기쁘고 편해지게 해 주는 겁니다.

저는 <18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정말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된 것을 봅니다. 사도바울은 원래 그렇게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아주 이지적이고 이성적이고 굉장히 날카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마음이 이렇게 넓어진 겁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풍성하니라’ 아니 돌아다니면서 전도한 사람이 뭐가 그렇게 많고 풍성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겁니다.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아, 내게 지금 뭐가 필요하고, 뭐가 필요하고, 뭐가 없고, 뭐가......” 이러면 정말 빌립보 교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부담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잘해야 되는데 또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걸 또 했는데 어떻게 전달해 드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그 <빌립보서 2장>을 보면 에바브로디도 라는 사람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정성껏 모은 선교에 관한 것들을 사도바울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방법은 도보밖에 길이 없어요. 그래서 그냥 걸어서 걸어서 그 먼 길을 가다보니까 그만 병이 들었습니다. 그 에바브로디도는 자기가 병든 것보다 병들었다는 사실을 혹시 교인들이 듣고 걱정할까봐 그것 때문에 걱정을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그 에바브로디도를 들어서 “정말 그는 이와 같은 마음을 가졌다. 정말 훌륭한 사람이다.”하고 그에 대해서 칭찬하는 장면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뭐냐 하면 모은 것을 전달해 주기도 어려운 때에 사도바울이 뭐 많은 것을 가지고 활용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풍부하니라’ 그는 이미 하나님 은혜 가운데 만족하는 것을 배웠던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나는 풍부에 거할 줄도 알고 나는 비난함에 거할 줄도 알아. 내게 모든 것이 있어도 내게 모든 것이 부족해도 나는 그 가운데 자족할 수 있는 은혜가 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나는 여건과 상황에 좌우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여건과 상황이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기쁘심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승리를 선언하는 겁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들 만나면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만날 때마다 뭐 없다는 얘기만 하고, 만날 때마다 부족하다는 얘기하고, 만날 때마다 억울하다는 얘기해요. 그런데 그 얘기하는데 20년 동안 만나도 20년 동안 맨 날 그 얘기만 해요. 그 사람 20년 만났는데도 한 얘기가 그 내용의 기조가 거의 똑같아요. 한 번도 기쁘다, 좋다, 난 풍성하다, 난 누구에게 뭘 줬으면 좋겠어. 뭐 필요한 사람 없어? 이런 얘기는 안하고 항상 그 반대의 얘기만 해요. 그런데 한결같이 20년 동안 똑같이 얘기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런 사람을 보면 우리 마음에 좀 부담이 되잖아요. 그런데 없다고 해서 누구 도와주는 사람 없어요. 없다고 하면 있는 사람도 옆에서 없어져 버려요.

풍성하고, 감사하고, 기쁘다고 하면 옆에 사람들이 오히려 많이 모여든다구요. 그러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는 것보다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단 말입니다. 진정한 풍요를 느끼는 감사의 마음,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나보다 더 나은 상대와 늘 비교하여 부족함을 느끼고 괴로워하며 자신도 괴롭고 다른 사람도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늘 감사하고 기쁘고 정말 이전에 받았던 은혜를 생각하고 그것만 생각해도 감사하고 감격한 겁니다.
너희 때문에 잘됐다. 풍요하다. 이런 감사와 격려의 개념이 필요한 겁니다.

잠깐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말씀드립니다.
교회 오셔도 목사가 맨 날 우리 교회 이게 부족하고 저게 부족하고 이게 없고 우리 성도들은 이게 부족하고...... 날마다 그런 얘기 들으면 여러분 어떻겠어요?
그 마음에 ‘아휴, 나는 맨 날 부족해서 교회에 왔는데 교회마저 부족한 교회에 왔구나!’ 이런 생각하면 참 지치고 지칠 겁니다.
우리 성도들이 참 수고하셔서 교회가 이렇게 풍요롭고 다른 분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고 우리가 보낼 것도 있고 여러분 참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런 얘기 들으면 ‘내가 별로 수고한 것도 없는데 그래도 내가 이렇게 봉사하고 헌신한 게 그 오병이어처럼 별것 아닌데 그게 오병이어처럼 사용되어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사용되었다니 참 감사하다. 내가 조금 더 힘내서 내가 하나님께 더 헌신해야지!’ 이런 마음이 드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우리 삶에 적용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삶에 뭐가 없다. 뭐가 부족하다. 난 항상 고통당하고 나는 늘 억울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안돌아 보시나보다. 이런 생각하다보면 우리가 그렇게 아주 비루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께 참 감사하다. 어려울 때 이런 은혜 주셨고 내가 고통스러울 때 이런 은혜를 주셨고 나는 시작할 때 아무것도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큰 축복을 주시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낼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어려운 게 없어요. 교회도 어려운 게 없잖아요. 교회가 뭐 어려운 게 있겠습니까?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큼 사역을 하는 게 교회 아닙니까? 계획은 세웠는데 그만큼이 없어요. 그러면 그게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우리 개인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계획을 세울 수 있겠지요? 이런 것이 이만큼 필요하고 그 계획을 가지고 이렇게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그 계획대로 안 해 주셨어요. 그러면 최종적인 것은 뭐죠? 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해 주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수용이라고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의 뜻을 수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감사하고, 날마다 그 자리에서 또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고, 또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그러니 우리는 언제든지 감사하고 감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게 되면 두 번째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받으실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4장 18절>후반을 보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너희가 나에게 전해준 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말하는 겁니다. 정말 향기로운 제물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과 아름다운 헌신, 이것은 하나님이 받으실 향기로운 제물이요,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풍성케 하는 아름다운 헌신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에 진정으로 주님을 위해서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이번에 청년들 수련회 주제가 ‘그대는 부르심을 받았는가?’ 라는 주제였습니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았는가?
내 마음에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부르심의 확신이 있는가?
이 부름의 확신이 있으면 우리 삶은 달라지는 겁니다.
아침에 눈떠서 일어나야 될 이유가 있는 것이고, 내가 노력해야 될 이유가 있는 것이고, 내가 정말 땀 흘리고 힘든 일도 감당해야 될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확신이 있을 때, 내가 가야 될 길이 보일 때, 내가 분명히 가야 될 저 언덕에 분명히 깃발이 펄럭일 때, 우리는 분명히 일어나 갈 수 있는 마음의 용기와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진정으로 주님을 위해 내가 할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 달려간다면 우리 삶은 더욱 더 풍성해지는 은혜의 삶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내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게 되면 이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아름다운 제사가 되는 겁니다.
삶의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내 삶이 주님의 일을 풍성하게 하는가 아니면 별 관계없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도대체 내 삶의 어떤 것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될까?
내 작은 것이었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제물이 된다면 얼마나 귀한 것일까?
커서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것들이 모두가 하나님께 제물입니다.
나는 나 자체로 이 시대 속에 하나님의 향기로운 산 제물로 드려야지. 내 삶을 더 향기로운 제물로 준비하는 것은 무엇일까? 또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에 정말 기쁜 것은 하나님이 나를 기쁘게 해 주신 것도 기쁘지만,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렸다 하는 것이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부모님이 나에게 기쁘게 여러 가지 일을 해 주신 것도 감사하지만, 조금 우리가 장성하면 내가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렸다는 것 자체가 우리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고 협력하고 돕는 일,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내 모습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 육신의 소욕을 넘어서는 일도 우리는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다면 우리 마음이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저는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내가 큰일을 하지 못해도 내가 어떤 능력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내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내가 하는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기뻐 여기시는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확신하는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기대와 소망과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믿음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고 최대의 선물입니다.
내모든 상황을 바꾸시지 않으셔도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을 가지고도 나는 기뻐하고 감사하고 감격하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정말 별것 아닌 오병이어를 가지고 온 자에게 “뭐, 이런 것을 가지고 왔어?” 라고 하지 않고 그 하잘것없는 오병이어를 손에 들고 정말 간절히 기도하셨을 때 그것을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거두는 축복을 거두셨습니다.
정말 하잘 것 없는 제자들이지만 “너희 같은 사람들이 뭘 할 수 있겠어?” 라고 하시지 않고 그들을 정성으로 거두시고 가르치고 키우셔서 그들로 말미암아 초대교회를 일구시는 주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오늘 <19절>을 보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풍성한 대로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러니까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복음 전도자 무디라는 사람은 이 구절을 들어서 하나님의 은행이라고 얘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행, 은행에서 꺼내 쓰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행이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일 있을 때마다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가운데 풍성한 대로 그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께서 주님 안에서 아름답게 헌신하며 사는 성도들에게 결국 풍성한 은혜를 주심을 믿을 때 우리 마음은 한없는 기대와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의 풍요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거 이제 우리는 그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결국은 내가 많은 것을 가져도 내 마음이 불편하면 그것이 기쁨이 못됩니다.
마음에서 시작된 풍요는 결국 삶에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 받은 풍요는 그것을 감사하여 나눌 수 있는 양질의 풍요가 되는 겁니다.
내게 어떤 것이 주어져도 ‘이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다. 그리고 내게 주신 풍요로움이다.’ 라고 생각하면 그것을 누리고 활용하는데 있어서 전혀 달라요. 똑같은 것을 가져도 정말 양질의 것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 대한 기대는 우리 삶을 결코 빈곤케 하지 않고 얼마를 가지고 있건 그 상태에서도 최고의 선과 아름다움을 이루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의 풍요가 어디서 올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채워주심에 대한 기대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것 아닙니까? 쉽게 설명해 드릴게요.
적게 가졌어도 늘 풍요롭게 사는 것.

어떤 사람-여러분이라고 합시다.
어떤 사람이 은행에 돈을 많이 저금해 두었어요. 그럼 이 사람 부자죠? 그래도 돈 다 안가지고 다니잖아요. 지갑에다 돈을 조금만 가지고 다녀요. 많이 가지고 다니면 불룩하잖아요. 불룩해도 나는 많이만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요?
그거 불편하잖아요? 다 쓸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많이 가지고 다니세요. 그래서 조금 넣어서 가지고 다녀요. 그런데 그 사람은 돈을 조금 가지고 다녀도 늘 마음이 풍요로울 겁니다. 다 쓰면 또 꺼내서 채우면 되잖아요. 요즘 기계도 곳곳마다 많은데요.
조금 가지고 있어도 늘 풍요로워요. 왜냐하면 내가 많이 맡겨뒀으니까. 언제든지 지갑 채우면 되니까. 그건 마음이 풍요로울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은행에 돈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지갑에 돈은 이만큼 넣어놨어요. 마지막 쓰고 죽을 것. 지갑에 돈이 이만큼 있어서 불룩해요. 그럼 이 사람 마음이 기쁘겠습니까? 이게 내 전 재산이야. 이거 쓰면 나는 끝이야. 나는 없어.
여러분 둘 중에 누가 되겠습니까? 그걸 물어보십니까?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뭔가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지금 내가 당장 별로 가진 것 없어도 마음이 든든하고 기뻐요. 내 지갑에 돈이 없다고 내가 가난한 사람입니까? 내가 은행에 많이 넣어놨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신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마음이 기쁘고 편안한 겁니다.

여러분,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지금 지갑에 안가지고 있을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지금 지갑에 없을 뿐이지 나는 은행에 많아.’
지금 내가 없을 뿐이지 하나님께서 많이 가지고 계시고 내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에게 주실 것이야. 내가 판단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판단하는 때. 문제는 내 판단하는 때와 하나님이 판단하는 때가 일치만 하면 돼요.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만 하면 언제든지 우리는 갈등이 사라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사람의 지킴은 불안하지만 하나님은 늘 우리들에게 안전하십니다.
들의 꽃, 풀, 하늘을 나는 새, 그들은 입을 것 먹을 것 걱정하지 않아도 먹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먹여주시고 입혀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리 믿음이라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어떤 일을 이루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결과가 주어졌을 때에는 이게 하나님의 축복이다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또 다른 소망을 가지고 또 애쓰고, 또 결과가 주어졌을 때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이 관계가 유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믿음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열심히 뭐 하기 어려워하고 또 결과로 주어졌을 때 그게 또 마땅하지 않고 그러면 우리 삶은 늘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결과와 성과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기쁨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을 때,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또 다른 하나님의 일들을 계획할 수 있을 때, 우리 삶은 유려한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풍요를 믿고 있다면 우리는 주어진 상태에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 무엇일까를 생각을 합니다.
지금 나는 시간이 있고 건강이 있어. 그런데 물질은 없어. 그럼 시간과 건강가지고 일하면 됩니다. 그러다보면 물질도 생깁니다. 나는 물질은 있는데, 몸이 약하고 병들고 그리고 또 여러 가지가 어려워. 그러면 물질가지고 일하시면 됩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실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도 조금 있을 때 돕기 시작해야지 많이 있다 보면 조금 있을 때 돕지 못한 사람은 많이 있어도 돕지 못해요. 조금 있을 때는 없어서 못 도와 줬는데 많이 있을 때는 아까워서 못 도와줍니다.
조금 있을 때 정말 부족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돕고 있다 보면 많이 있어도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고 감사하다는 마음이 드는 겁니다.
조금 있을 때 너무 없어서 못 도와주면 많이 있을 때는 그게 아까워서 못 도와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도 조금 있을 때 너무 없어서 하나님께 헌신 못하면 많이 있을 때는 도무지 아까워서 헌신을 못해요.
우리가 아깝다는 개념이 아니라 감사한 마음이 들면 우리는 헌신할 수 있고 도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제가 주일학교 학생들 가르칠 때부터 제가 중학생 됐을 때 반드시 가르친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구제헌금을 반드시 가르쳤습니다.

구약에는 십일조를 내지 않습니까? 그런데 3년에 한 번씩 십일조를 더 냈습니다. 십의 이조를 낸 겁니다. 3년에 한 번씩 십일조를 낸 것은 구제를 위한 십일조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구제하는 데 사용한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모두가 다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같이 나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삶 가운데 자꾸자꾸 다른 사람에게 주고 기쁜 일을 해 본 사람은 결국 이 세상 떠날 때까지 그렇게 삽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뭔가 얻을까라고 생각한 사람은 결국 세상 끝날 까지 그렇게 살다 간단 말입니다.
가장 큰 풍요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믿으며 하나님이 풍성한 대로 내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적인 자신감을 가집니다. 자신이 있으니 여유롭고 관대하고 베풀 수 있는 겁니다.

오늘 내게 무엇이 있습니다. 내일 나는 아무 소득 못 할지도 몰라. 하면 이거 줄 수가 없어요. 내일 나 또 소득 할 수 있어. 하면 이것 줄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자신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신감, 하나님이 내게 공급해 주신다는 마음의 확신이 있으면 내 주머니에 있는 것, 내 손에 있는 것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 또 하나님이 내게 주시지 않아. 라는 마음이 들면 내 손에 있는 것을 어떻게 줍니까? 못준단 말입니다.

우리 사르밧 과부 여인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집에 밀가루 조금하고 기름 조금 있어요.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가 오더니 집에 뭐가 있냐? “예, 기름 조금하고 밀가루 조금 하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겁니다. 이거 먹으면 음식이 아무것도 없어서 이제 죽는 겁니다. 흉년 때.
그런데 안타깝게도 엘리야가 “그것으로 음식을 해서 나를 다오.” 그러니 얼마나 야속해요. 이거 먹고 내가 죽을 건데 이거 먹으면 끝인데 그걸 달라고 하니 너무 야속하다. 이거 없는데 마지막까지 다 달라네. 그거 얼마나 야속하겠어요. 그런데 그래도 이 여인은 ‘내가 이거 먹고 죽으나 안 먹고 죽으나 마찬가지다.’ 생각을 했는지 그걸 해서 선지자에게 줬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 밀가루 독에 밀가루가 계속해서 마르지 않고 기름병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대접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두 가지 마음 중에 어떻겠습니까?
‘이것 주면 마지막이다.’ 생각했을 때 그 마음하고, 매일매일 밀가루 독에서 밀가루가 끊이지 않고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았어요. 그 때 오늘도 만들어드리고 내일도 만들어드릴 때 그때의 심정이 같았겠습니까? 정말 비장한 마음이었을 겁니다.‘이거 어차피 한 끼 더 먹고 죽으나 한 끼 덜 먹고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좋은 일이나 하자.’ 그러면서 만들어줬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매일매일 나올 때 매일매일 만들어 드린 것은 ‘이것 퍼도 또 나오는데 괜찮아, 내일 또 있겠지.’ 이런 기대가 있는 겁니다.

이게 뭐죠? 마음속의 어떤 확신입니다. 물론 그것은 눈에 보이는 실증적인 것을 가지고 확신하는 것이겠지요. 믿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던 것에 대한 확신입니다. 시간이 가면서 우리 눈에 보이는 확신으로 바뀌는 겁니다.
처음에는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믿었는데 시간이 가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음대로 산다는 것은 내 눈에 보여서, 믿어서,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눈에 안보여도 믿었는데 그것이 삶의 실제가 되더란 말입니다.

저는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언제나 세상이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인 평안의 기쁨과 가치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 쪽에 우리의 마음을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그냥 주시는 것도 아니고 풍성히 주시는 겁니다.
늘 말씀드리잖아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게 뭐라고 말씀드렸지요?
날마다 하니까 모르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어떻게 왼손이 모릅니까?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하는 것은 몰라요. 여러분 3일전에 뭐 먹었는지 기억나세요? 일주일전에 뭐 먹었는지 기억나세요? 그런데 일주일전에 선한 일은 뭐했는지는 기억나시잖아요. 3년 전에 한 것도 기억나실 텐데요. 이게 왜 그렇죠?
우리 매일매일 음식을 먹으니까 뭘 먹었는지 매일 먹은 것은 기억이 잘 안돼요. 그런데 선한 일은 어쩌다 한 번 하니까 특별하니까 기억이 됩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잖아요. 10년 전에 헌신한 것 생각나면 회개해야 됩니다. 10년 동안 한 번도 그런 헌신을 안 해 본거죠. 날마다 더 큰 헌신을 했어요. 그러면 날마다 날마다 헌신을 하다 보니까 그걸 모른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날마다 선한 일을 하면 이게 선한 일인지 아닌지 구별도 안돼요. 그냥 내 생활이구나.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도 내가 헌신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구별이 안돼야 됩니다.
처음에는 헌신하면 마음에 감격스럽겠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감동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될 일을 당연히 하는 거지. 그런 마음이 들 때 우리 믿음이 더욱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 안에서 그의 공급과 인도하심을 믿으면 가장 풍요로운 자고 가장 큰 사랑과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사도바울이 의도적으로 말을 만들어서 썼다고 생각합니까? 순연하게 쓴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항상 모든 게 풍요롭고 또 하나님이 내게 부족한 것이 있으면 언젠가 채워주실 거야. 걱정하지 마라.
다른 사람을 이렇게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 마음이 벌써 편안한 겁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런 마음 가졌으면 좋겠는데 잘 안돼서 문제죠? 그런데 그런 마음 가지게 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마음에 진정한 풍요로 우리 평생을 풍성하게 살줄로 믿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가장 자신 있는 때가 어떤 때입니까?
내가 모든 것을 가져서(?) 자신 있다.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으면 이것을 또 잃어버릴까봐 또 불안해 지거든요.
가장 자신 있는 때는 어떤 때죠?
내가 설사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그 가운데 나는 또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때 우리는 자신 있는 겁니다. 내가 어떤 것을 많이 가졌는데 그거 잃어버려도 괜찮아.

늘 말씀드리지요? 오늘도 한 번 따라서 합시다.
“큰일도 없고 놀랄 일도 없다.”
내게 뭐든 놀랄만한 큰일이 생기면 ‘아, 그거 큰일도 없고 놀랄 일도 없어. 그것 또 해결하면돼지. 어떤 어려움이 와도 내가 그 일 또 해결하면 돼. 하나님이 이제까지도 지켜주셨고 이제까지 내가 어려움이 없었나?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도 하나님께서 해결하게 하셔서 지금까지도 있는 건데 하나님께서 그 일도 처리하게 하시겠지.’
기쁜 일이 있을 때는 마음껏 누리고 즐기세요.

여러분들, 여러분 자녀들이 좀 기쁘게 산다고 그것 질투하지 않잖아요.
‘참 잘 됐구나. 참 기쁘고 고맙다.’
제가 말씀드렸죠? 우리 성도들 잘되면 제가 그것 가지고 ‘또 얼마나 교만해질까?’ 이렇게 제가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고 했잖습니까?
저는 성도들 잘되면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그렇게 마음이 기뻐요.
우리 하나님도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잠자면 무슨 생각이 들어요.
‘피곤했구나!’
좀 곤히 잠자면 깨지 않게 문이라도 닫아서 조용하게 만들어주죠? 안 그래요?
깨워서 “공부해라. 공부해.” 자는 것 도저히 눈뜨고 못 봅니까?
우리 하나님도 여러분 피곤해서 자면 안타까이 여기시고 좋아하실 겁니다.
그래 한 잠 푹 자고 일어나서 또 힘내서 열심히 해라.
우리가 즐겁게 지내면 하나님이 그것을 시기하실 것 같아요?
전 그럴 것 같지 않아요.
그래 너 기쁘게 지내라. 너 좀 고생했지. 기쁘게 지내라.
그러나 또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없어 진다한들 ‘하나님께서 또 내게 주실 것이야.’ 하는 의연한 마음을 가지고 간다면 우리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기쁨과 은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진정한 삶의 자신감은 내가 모든 것을 가져서가 아니라,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의지가 있을 때 사람이 자신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우리 마음에 모든 것을 소유해서 풍요로운 것이 아니라, 내게 어떤 여건이 주어져도 나는 그 가운데 기뻐할 수 있다는 마음이 있을 때 풍요로운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담대하게 나는 참 많이 가졌고, 나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수시로 채워주실 것이고, 그러니까 나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고 은혜가운데 기쁘게 지내십시다하는 마음을 우리는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대합시다.”
“주님은 우리의 기대이상이십니다.”
이 두 마디는 우리 새벽기도 끝나고 늘 기도하기 전에 인사하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기대하셔야 합니다.
여호와는 항상 우리의 기대이상이십니다.
오늘 우리 이렇게 인사하고 마칩시다.
“우리는 평생주고 갑시다.”
“마음에 안 들고 마음에 안 맞아도 평생 주다 갑시다.”
“우리 상은 하나님께 받읍시다.”
그래요 우리 상은 하나님께 받읍시다.
하나님께 상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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