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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따르는 삶 (눅 22:5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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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따르는 삶 (눅22:54-62)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한 사람으로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바라보면서 “당신이 행하신 표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 이야기를 듣고 우쭐할 만도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응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요3:3)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인간에게 있어서 한 번은 육신의 부모에게 나음을 얻지만, 또 한 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적 가치관에서 영생에 대한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한시적인 이 땅에서의 관심을 영원한 나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가치, 영원한 생명, 영원한 나라, 영원한 말씀에 전혀 관심이 없던 자가 변하여 영원한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았던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정신없이 살던 젊은이가 쉰 살이 넘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인생일까?"를 깊이 고뇌하던 중 기독교 진리를 받아들였고 남은 생을 농민들과 함께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러시아의 작가 레오 톨스토이입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믿음이 내게 들어온 후 그리스도의 말씀이 영원한 진리임을 알았다. 나의 온 삶은 변화했다. 이전에 바라던 것을 바라지 않게 되었으며, 바라지 않던 것을 바라게 되었다. 또한 선으로 보였던 것이 악으로, 악으로 보였던 것이 선으로 보였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이 바꿔지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지적, 감상적 대상이 아니라, 삶의 능력이며,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관이 바꿔져야 합니다. 욕하던 사람이 찬송하는 사람으로, 남을 저주하던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육신을 좇던 사람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롬8:5-9, 갈5:16-26).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는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나를 죄악에서 구원하신 구원자 되시며,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이루어낸 화해자이시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며, 진리요, 생명입니다. 꼭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같이 찬송 “예수는 나의 힘이요”(93장)를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이해하기 까지는 ‘근본의 중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의 중심이 무엇인가?”, “그 사람의 의도가 무엇인가?”, “그 사람의 근본이 무엇인가?”, “그 사람의 생각이 무엇인가?”를 알면 사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중심을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사람의 중심을 알지 못하고 외모만을 바라보는 어리석은 인간의 연약함을 바라보면서 사무엘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됩니다.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를 보면 ‘인간이 얼마나 모순 덩어리인가’를 알 수 있고, ‘인간이 얼마나 감성적인 인물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재점검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자 합니다.

1. 역경 속에서도 크리스천임을 보여야 합니다.

역사에 빛나는 지도력을 발휘한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 중 한 가지는 역경 지수가 높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고난과 절망의 환경을 극복한 것은 물론 이거니와 시대적 난관과 역경을 이겨낸 자들이 역사의 주인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주저앉아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악성 베토벤은 청각 장애를 이기고 감미로운 교향곡을 남겼고, 맹인이라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깊은 신앙과 영성 깊은 필치로 실낙원을 저술했던 밀턴, 극심한 중증의 정신병을 극복하고 위대한 통신 혁명을 일으킨 마르코니나, 시각 장애를 갖고 있으면서도 헬렌 켈러를 헬렌 켈러 되게 한 설리번 앤, 영원한 기독교의 고전인 천로역정이나 삶의 희망을 노래하는 마지막 잎새는 존 번연과 오 헨리가 지독한 역경 속에서 남긴 걸작들입니다. 인생의 역경을 고난으로 생각지 말고 새로운 기회로 활용하는 지혜를 가지면 세상은 더욱 행복할 것입니다. 인생은 역경의 용광로를 통과하면 불순물이 제거되고, 인생은 뜨거운 불의 시험을 만나면 연단됩니다. 이것이 바로 시련이 주는 값진 교훈입니다.

역경 지수가 높은 사람은 그만큼 성과 지수도 높습니다. 역경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축복의 전령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시련이 와도 우리는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리 자신들이 어려울 때일수록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입으로 시인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크리스천의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며, 크리스천임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로울 때에는 예수님을 팔아먹고, 해로울 때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버리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특별히 역경가운데 있을 때 내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잃지 말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은 사회의 높은 직위나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나타내려는 마음이 있지만, 정작 우리들이 크리스천이라는 정체성을 회복하며, 나타내는 일에는 소극적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특별히 어려움이 있을 때 더욱 그리하여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지방에서 귀신들리자들을 고쳐주자 점치는 여종의 주인이 자신의 돈벌이가 줄어들자 “로마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잘못된 풍속을 전한다”는 모함으로 인해 옷을 빼앗기고 채찍으로 몹시 때린 후 감옥에 가두었을 때에도 한밤중에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찬양하였습니다. 어려움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어떠한 환경가운데서라도 우리는 크리스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역경가운데 있을 때 우리들은 기도로 승리하여야 합니다. (시107:19-20)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그리고 소망으로 승리하여야 합니다.(눅21:25-28)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어떠한 환경가운에 있을지라도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나타낼 때 우리들은 더욱 조심할 수 있으며, 죄악에 빠지지 않습니다. 한 소녀가 베드로에게 “저이는 크리스천이요”라고 한 것처럼,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저이는 크리스천이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들은 크리스천임을 보여야 합니다.

2. 넘어진 가운데서도 주님을 향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늘 과신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 “나는 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 “나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 그런데,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충성과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순종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모습을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 제사장의 집에서 심문을 받을 때, 한 종이 베드로를 향해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었던 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자신 있게 “그렇소, 내가 예수와 함께 있었던 자요.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통당하실 때 나도 같이 하겠소.”라고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께서 “닭이 울 기전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니라”(눅22:61)고 하신 말씀대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던 베드로가 상황의 어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현재 우리들의 상황 속에서 일어 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다가 어떤 절박한 상황에 이르러 예수님을 더욱 의지하기보다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직장을 잡으면 예수님을 부인하는 이들이 있고, 어떤 이들은 결혼하면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이들은 절박한 문제를 해결한 후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호언하던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보여준 인간의 연약함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입니다. 멀찍이 따라갔던 베드로처럼, 우리들은 미온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예수님은 추운 새벽에 심문을 받고 계셨지만 베드로는 추위를 이기지 못하여 불신자들과 모닥불을 피어 놓고 불을 쬐며 몸을 녹이고 있었듯이, 우리들은 예수님의 고난과는 상관없이 불신자들과 어울리며, 신앙과 불신앙, 진리와 비진리와 타협하고 있는 나약한 인생인 것이 현실입니다.

신앙생활에 실패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실패했어도 “우리가 자빠져도 넘어지지 않음은 주님의 은혜입니다.”(시37:24) 바울이 선교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격어야 할 것이다.”(행14:22)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많은 환난을 겪을 때 넘어지고 쓰러지고, 실수하고, 허물 많은 삶을 선택하는 연약한 삶의 모습 속에서도 항상 주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실수해도 주님을 향한 근본적인 충성심이 변해서는 안 됩니다.
실패의 현장에서도 우리는 성도임을 말해야 하고, 성도로서 자신감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죽을병이 걸렸어도, 사업에 실패하였어도, 시험에 낙방하였어도, 현재 어떠한 어려움에 처했더라도 우리는 크리스천임을 보여야 합니다. 크리스천으로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열심히 더욱 신앙 생활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곁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을 때 한 비자가 나타나서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었느니라”하니 베드로는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하며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변치 않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하지 모릅니다. 특히 어려움을 당할 때 변치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웨슬레 목사님은 철저하게 예수님을 따를 때에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 당시 정통적인 성공회의 교단에서 쫓겨났으며, 때로는 복음을 증거할때에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와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였기에 그는 제2의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용도 목사님도 당시 사람들의 오해와 핍박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기쁜 복음을 전하였고, 상한 심령들을 치료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철저하게 믿고 따르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는 그의 일기를 통하여 예수님을 얼마나 뜨겁게 믿었고, 따랐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초점은 예수다. 소망에도 예수요, 인내에도 예수요, 기도에도 예수요, 찬송에도 예수요, 떠들어도 예수요, 잠잠해도 그저 예수뿐이다. 생시에도 예수, 꿈에도 예수, 그리고 또 잠꼬대에도 예수다. 먹어도 예수, 입어도 예수. 자도 예수요, 일하여도 예수, 그저 우리 생명의 초점은 예수뿐이다. 오! 예수는 곧 우리의 모든 것이오, 또 우리의 생명이다. 만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이 생명을 잃어버리면 아무 유익이 없게 되는 것이다. 오! 우리의 진리이신 예수여! 당신 없이 우리는 살지 못하옵니다. 오! 우리의 진리이신 예수여 당신 없이 우리는 알지 못하옵니다. 오! 진리이신 예수여 당신 없이 행할 수 없습니다. 오!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여 영원히 우리와 같이하여 주옵소서” 그는 예수님을 증거 하다가 결핵에 걸려 소금을 입에 물으면서도 예수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역경 속에서도 믿음의 선배들과 같이 믿음을 변치 않아야 되겠지만, 역경 속에서 실패했다할찌라도 우리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넘어져도 완전히 자빠지지 않는 것은 주님의 은혜인 것을 믿으시고, 우리는 연약할 때도 중심을 주께 두어야 합니다. 실패했어도 우리는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3. 말씀을 기억하여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에 닭 우는 것을 듣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되어 밖으로 나가서 통곡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말씀을 들어도 잊어버릴 때도 있고, 알아도 행치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말로만 전하는 삶이 아니라 말씀을 기억하여 행동으로도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항상 말씀에 자극을 받고, 말씀대로 살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경건의 모습만 남고, 행함이 없으면 질책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23장23절에서 예수님은 경건의 모습만 남어있고 행치 않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질책을 가하십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외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버렸도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민감하게 반응하여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라면 언제라도 순종하여야 하고, 주님의 말씀이라면 언제라도 돌아와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탕자처럼 세상 것의 어려움을 다 체험하고, 세상의 징벌을 다 경험하고 돌아서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베드로처럼, 실패했더라도, 연약하더라도, 말씀에 감동을 받고 통곡하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특별히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들이 말씀을 기억하여 인격적으로 보나 행위의 면으로도 믿음 위에 덕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과제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알아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하겠습니까?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지켜 행하십시오. 말씀을 항상 기억할 수 있기를 바라며,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마다 나의 잘못을 회개하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이 기억되어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하였습니다. 자신의 죄악과 어리석음을 알아차림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우리도 연약한 존재들이기에 베드로처럼 실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가까이 할 때마다 우리도 베드로의 통곡과 같은 진정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한 죄악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철저하게 좇아가야 합니다. 가난에 처해 있더라도, 병들었더라도, 상황이 그리 좋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철저하게 좇아야 합니다. 고난에 참여할지라도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임을 나타내 보여야 하고, 가르침대로 사는 자가 되어서 철저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고신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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