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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뻐하십시오! (빌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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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빌립보서 4장 4절
제  목 : 기뻐하십시오! 

1. 기쁨

어느 고등학교의 중간고사 문제에 다음의 질문이 나왔습니다.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저술한 책으로 우리나라 주변의 어족과 그 정보에 대해 저술한 책은?” 정답은 <자산어보(玆山魚譜)>였는데요, 많은 학생들이 <목민심서(牧民心書)>라고 적었습니다. 정약용하면 자동적으로 <목민심서>가 떠오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가운데 아주 특별한 답을 적은 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학생의 답은 <월간낚시>였습니다.

어느 중학교 중간고사 생물 시험에 “개미를 삼등분으로 나누면 ( ), ( ), ( )”라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정답은 “개미를 삼등분으로 나누면 (머리), (가슴), (배)”였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정답을 잘 썼습니다만, 그 가운데 한 학생의 답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의 답은 “개미를 삼등분으로 나누면 (죽), (는), (다)”였습니다. 그리고 기말고사 때, 체육 시험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나왔는데요. “올림픽의 운동 종목에는 ( ), ( ), ( ), ( ) 등이 있다.” 정답은 “육상, 수영, 권투, 유도, ․․․.”인데요. 채점하는 교사를 배꼽 잡고 웃게 만든 한 학생의 답이 있었습니다. “올림픽의 운동 종목에는 (여), (러), (가), (지)가 있다.”

한 초등학교 교사가 자기 반 학생들에게 “엄마 아빠”라는 말로 4행시를 지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학생이 기가 막힌 답을 내놓았습니다. “엄: 엄마는, 마: 마덜, 아: 아빠는, 빠: 빠덜!”

오늘 설교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주님은 제게 여러분에게 “기쁨”에 관한 이론을 설명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제게 여러분을 ‘기쁘게 만들라’, ’여러분을 웃게 만들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웃게 하자고 몇 가지를 말씀을 드려보았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여러분이 가장 기쁠 때는 언제입니까? 초등학생 500명에게 물었습니다. 어린이들은 언제가 가장 기쁠까요? ‘시험을 잘 봤을 때, 부모님이 선물을 사 주실 때, 생일날, 친구들과 놀 때, 가족과 함께 놀러갈 때, 경시대회에 나가서 상을 탔을 때, 용돈을 받을 때, 집안일을 도와서 칭찬을 받을 때, 그리고 TV나 비디오를 보거나 컴퓨터를 할 때. ․․․’

그 다음으로 청소년들에게 물었습니다. 중고등학생들이 기쁠 때는 ‘성적이 올랐을 때(53.0%), 용돈을 많이 받았을 때(14.3%), 좋은 친구가 생겼을 때(11.0%) ․․․’ 등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언제가 가장 기쁘십니까? 어떤 분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하루 종일 수고한 후 잠자리에 들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연세드신 부모님들이 맛있게 음식을 드실 때, 그리고 자녀들이 음식을 즐겁게 먹을 때라고 했습니다.

비슷한 질문입니다만, 여러분이 가장 기뻐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무슨 일을 할 때, 어떤 일이 여러분에게 가장 기쁘냐는 말입니다.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일,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일, 그와 같이 사는 일, 그리고 같이 죽는 일이다.” 또 어떤 분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할 때 같이 수다 떨 친구가 있는 것은 더욱 더 기쁜 일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언제가 가장 기쁩니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기뻐하십니까?


2. 기뻐하라

1) 성경의 기쁨

오늘 본문은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기뻐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이로(χαί́ρω)라고 하는데요. 이 말은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기뻐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사람을 보고 그 사람 때문에 기뻐하는 것, 그리고 어떤 물건을 보고 그것 때문에 기뻐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 말은 인사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카이레!”, 혹은 “카이레테”라고 해서, "안녕하십니까?" 라는 뜻이었습니다. 또한 이 말은 축배를 들 때도 사용되었고, 헤어질 때 나누는 인사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평범했던 이 말이 신약성경에 와서 아주 특별하게 사용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또 누구든지 우리 주님만 만나면 특별하게 변하는 것 같습니다. 신약성경에 74회 나오는 이 말은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가 곧 온 세상과 성도의 기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가서는 사도들과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복음 때문에 능욕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기뻐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즉 기쁨이라는 이 “카이로”라는 말은 예수님만이 진정한 기쁨의 이유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따라서 비록 인간적으로나 세상적으로는 가난하고 아프고 괴롭고 슬픈 등 견딜 수 없는 상황이지만, 예수님을 믿고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 때문에 기뻐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2) 바울의 기쁨

오늘 본문 역시 이러한 성경의 흐름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의 상황도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는 주후 62년 혹은 63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바울이 로마에서 기록하여 에바브라 디도라는 사람을 통해 빌립보 교회에 보내어진 편지입니다. 그런데 네 장 밖에 안 되는 이 빌립보서에는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즉 빌립보서는 일종의 유머집처럼 읽고 듣는 성도로 하여금 웃게 만드는 성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당시 바울의 형편은 기뻐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물 건너고 바다 건너고 광풍 만나고 뱀에 물려가면서 로마까지 와서 감옥에 송치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여 세웠던 소아시아 지역 교회의 성도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1:14-17), 또 어떤 사람들은 바울 사도가 감옥에 갇힌 것이 자신이 교계에서 지도자로 인정받을 기회라고 여겨 바울을 깎아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은 죄수의 신분으로서 가택연금처럼 어느 정도의 자유가 주어진 안가에서 감옥생활을 했는지, 아니면 실제로 감옥에서 생활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60대 노인인 그가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 거기다가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질병을 갖고 있다는 것은, 하루 하루가 그에게는 괴로움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발작을 하는 간질병에 다가, 눈이 나빠 글을 제대로 읽고 쓰는 것이 어려웠고, 허리는 구부정하게 굽어 있었기에 편히 누울 수가 없었으며, 다리도 ‘오자 다리’처럼 휘어져서 걷는 것이 너무나 불편했다는 것 등, 성경과 역사적인 자료들이 말하는 그의 형편은 그야말로 최악이었습니다.

이렇게 불편하고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환경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그가 빌립보서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었으며, 빌립보 성도들과 오늘 우리를 향하여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성도의 기쁨은 인간적인 조건과 세상적인 환경을 뛰어넘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그가 알고 있었고, 알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기쁨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는 세상의 것이나 사람의 것에 의해 지배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 바람이나 인간 바람 때문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가 아닙니다. 세상과 연결고리가 많고, 사람들과의 연결된 것이 많은 사람은 그것 때문에 울고 웃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도는 주님과 그 말씀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즉 하늘과 연결되어 있는 성도는 변치 않는 기쁨, 늘 한결같은 기쁨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세상이나 사람들에 의해 그 기쁨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바울을 보십시다. 질병을 가진 자로서 감옥에 있었고, 재판의 결과를 알 수 없어 불안한 하루 하루는 보내고 있었으며, 그리고 그 곁에 아무도 없어 너무나 외로운 처지에 있었고, 교회의 분열과 사람들의 오해와 시기 질투가 그를 힘들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 근심과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빌립보서의 기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기쁨”이며,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기쁨”이며, “환경과 사람에 따라 이리저리 변하는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기에 충분한 기쁨”입니다(K. Barth).

얼마 전, 제게 이 기쁨에 대해 도전을 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지금 위암이라는 중병으로 투병하고 있는 분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하는 일이 잘 되어서 기뻐하고, 돈이 많아서 기뻐하고, 사람이 좋고 그 좋은 사람이 내 곁에 있어서 기뻐하고, 건강해서 기뻐하는 것은 진정한 기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들은 ‘아주 가벼운 기쁨이요, 그리고 그 생명도 짧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기쁨, 변하지 않는 기쁨, 영원한 기쁨은 오직 우리 주님에게 있고 그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요즘 전과는 달리 예배와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지금이 자신에게는 가장 기쁜 나날’이라고 했습니다.

글 쓰는 작가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가 그만 암에 걸려 많은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불행과 고통을 비관적이고 원망섞인 언어로 늘어놓는 것이 그의 작품이었는데요.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거짓말처럼 그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병은 더욱 악화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죽어가면서도 저 사람이 저렇게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을 안 그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인생이 그렇게도 무겁고 고달프고 괴로웠던 것은 주님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주님을 알았기에 암이란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며, 이젠 죽음도 아주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는 정말 그는 찬송하고 또 감사 기도를 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떤 여대생이 가난한 사람들만 입원하는 무료 환자 수용소에 두 달 동안 입원을 했습니다. 그 병원은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렇다 보니 세상 어디보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이고 늘 원망과 불평만을 늘어놓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 자신도 가난하고 외로웠던 이 학생은 자신도 병으로 무척이나 아프고 괴로웠지만, 재미있는 이야기와 유머로 병원의 모든 사람을 웃게 만들었고, 또 찬송과 기도로 그들을 위로하며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녀의 치료가 다 끝나서 퇴원을 하게 되었는데요. 이 소식을 들은 환자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환자들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 울면서 “의사보다, 간호사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이니 우리와 같이 있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녀 때문에 환자들은 질병의 고통 속에서 늘 웃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윤의’라는 분은 “‘슬픔에 잠긴 크리스천’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기쁨은 저절로 오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블로이’라는 분은 “기쁨은 성경 전체를 흐르는 막을 수 없는 강이다. 즐거움은 하나님이 안에 거하신다는 감출 수 없는 표시”라고 했습니다. 즉 성도는 기뻐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죠.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기뻐한다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증거이고, 여러분이 기쁨을 잃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 산다면, 그 아들 예수의 십자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신 주님이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주시리라는 확신이 있다면, 오늘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목자가 되셔서 여러분을 인도한다는 것을 믿으신다면, 현재 삶의 힘들고 어려운 상황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기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여러분은 주님 안에 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기뻐해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 비관과 자포자기, 우울과 슬픔은 성도의 언어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람인 이상, 여러분의 매일 매 순간은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 찰 줄로 믿습니다.


3. 성도란 ‘기뻐하는 자’

말씀을 맺겠습니다. 느헤미야 8장 10절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의 능력이나, 성령의 능력이나, 기도의 능력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무슨 힘과 능력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세상 과학자들도 웃음이 힘이 된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기뻐하는 것이 인체 기관에 영향을 주어서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큰 유익을 주고 힘을 공급해준다는 것입니다.

일본 오사카 대학원 ‘신경 기능학 팀’의 공동연구에 따르면, 백혈구의 일종으로 암세포를 공격하는 ‘NK(내츄럴 킬러) 세포’라는 것이 있는데, 웃음이 이 ‘NK 세포’의 움직임을 활성화 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18세에서 26세 사이의 남성 21명을 상대로 코미디 프로와 교양 프로를 볼 경우 ‘NK 세포’ 활성화 비율을 비교한 결과, 코미디 프로를 봤을 때 ‘NK 세포’ 활성화율이 시청 전의 26.5%에서 29.4%로 높아진 반면, 교양 프로를 시청했을 때는 27.1%에서 24.8%로 감소했다는 것입니다. 웃음이 명약이란 말이 과학적 임상실험을 통해 증명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음악가 하이든은 “당신의 음악이 어찌 그리 기쁨이 넘치느냐?”라고 묻는 말에 “내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내 마음에 너무 기쁨이 넘쳐서 악보가 춤을 추고 뛰어오르는 것 같아지는데, 그때 펜을 잡으면 악보가 춤을 추고 뛰어오르는 것같이 기뻐진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것을 ‘나 몰라라’하는 현실감각이 없는 사람처럼 기뻐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사랑과 인도와 보호하심을 믿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뻐하며 살 때에 느헤미야 말씀처럼 그것이 여러분에게 힘이 될 것이고 능력이 될 것입니다. 즉 그 기쁨이 여러분의 힘든 현실, 기쁨을 앗아가는 현실을 바꾸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기뻐하고, 그 기쁨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영혼이 건강하고, 육신이 건강하며, 가정이 건강하고, 직장이 건강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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