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백성과 재물 (창 13:5 - 창 14:24)

  • 잡초 잡초
  • 333
  • 0

첨부 1


하나님의 백성과 재물 (창 13:5-14:24)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브람 ‘개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를 인류 역사 속에 분명하게 드러내시려는 큰 그림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아브람의 삶을 통해 보여줍니다. 오늘은 하나님 백성의 올바른 재물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간단하지만 간단하지 않은 질문부터 던져보겠습니다. 부자 되는 것, 가난한 자로 사는 것, 어느 쪽이 은혜일까요? 아브람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얻은 많은 재물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였지요. 그런데 성경은 부자들에 대한 경고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축복의 말씀이 많잖아요. 모순되어 보이는 이 현상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요? 하나님의 백성 중에도 아브람 이삭 야곱 욥 다윗 등 많은 소유를 가진 사람들과 열 두 사도들처럼 소유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분류해야 할까요?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기준을 마련해 두지 않으면, 거저 자기보다 잘 살면 부자이고 못 살면 가난한 자로 분류하기 쉽지요.

제가 공감하기로, 부자란 자기 소유가 많은 사람입니다. 많은 소유를 가졌지만 그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맞게 써야 한다는 자세를 가졌다면 자기 것은 전혀 없는 가난한 자입니다. 반면에 아주 조금 소유하고서도 모두 자기 것으로만 여기고 있다면 고만큼의 부자겠지요. 이 기준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서 100원짜리 부자도 있고, 100억짜리 가난한 자도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재물을 소유’하는 것을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재물이 사람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경고합니다. 성경의 경고는 소유한 재물의 양에 대해서가 아니라 재물에 대한 잘못된 태도에 대해서입니다. 그래서 저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님들에게 풍요로움을 주셔서 즐거워하게 하시고 그 모든 풍요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감사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재물에 대한 성경적 태도까지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의 태도에서 성경적 재물관의 모범을 몇 가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바로에게서 받은 재물은 심한 기근을 겪었던 아브람과 그의 부족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그 재물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5-6절을 보면, 그 땅이 아브람과 롯이 함께 동거함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6) 생긴 문제인데, 표준새번역 성경은 “그들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그 땅에서 함께 머물 수가 없었다”고 번역했습니다.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이방 땅을 전전하는 동안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이며 든든한 동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유가 많아지자 갈등이 생겼습니다. 목자들이 서로 좋은 꼴과 좋은 물을 자기 소유의 양떼들에게 공급하려고 밥그릇 싸움을 했겠지요. 이러한 내부 분열은 아브람에게 기근 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 여겨졌음이 분명합니다. 7절 하반절의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거하였다는 말씀은 아브람의 상황이 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처지임을 일깨워줍니다. 말하자면 적전 분열로 인해 하나님 백성이라는 공동체 전체가 몰락할 수도 있는 비상사태가 발생한 셈입니다.

갑자기 많아진 재물을 잘 관리한다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브람은 위기를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그는 먼저 사태의 핵심이 한정된 자원 속에서 소유가 많기 때문에 생긴 문제임을 정확하게 진단했습니다. 따라서 다툰 목자들을 훈계하거나 잘잘못을 따지는 처방을 하지 않고 롯과의 분가를 결정합니다. 롯에게 선택권을 양보한 것과 14장에서 사로잡힌 롯을 구출할 때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롯에 대한 그의 애정이 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대한 결정의 순간, 혹은 선택의 순간에 아브람과 롯의 가치관이 대조되어 드러났습니다. 8-9절을 봅시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8-9) 이 경우 선택권의 양보는 대체로 아브람의 덕성으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선택권을 떠넘김으로서 정죄 당한 것을 생각하면, 선택권 양보가 언제나 하나님 백성다운 태도라고 교훈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만약에 롯이 가나안 땅에 머물기로 선택했다면, 아브람이 소돔 땅 쪽에서 살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선택권의 양보에 초점을 두고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주목할 초점은 선택권을 양보할 수 있게 했던 그의 가치관입니다. 애굽에서의 뼈아픈 경험이 현재 아브람의 결정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며 재물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체험이 분명 그의 결정에 영향을 주었겠지요. 그렇다면 시편 127:1절의 솔로몬의 시처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는 가치관이 아브람으로 하여금 먼저 선택할 수 있는 족장의 특권을 포기할 수 있게 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아브람이 이 세상에 속한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11:10)이라고 기록합니다. 아브람은 소유나 땅이 자신의 삶을 보장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의 왕이 되시고 내가 그분의 백성이라는 사실, 그분께서 나를 인도하시며 다스려 주시는 삶이 진정한 복이라는 사실을 바르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롯의 가치관은 아브람과 다릅니다. 그에게 있어서 애굽 여행은 대단히 유쾌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빼앗길 위기를 만나지도 않았고 갑자기 풍족해진 재물의 혜택만을 경험했습니다. 그가 애굽에 대해 상당히 좋은 인상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보면서 “애굽 땅과 같았더라”(10b)고 느끼는 대목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아브람은 애굽을 극복했으나 롯은 애굽에 사로잡혔습니다. 애굽 사건으로 아브람은 ‘재물을 주신 하나님’을 더 생각했지만, 롯은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재물을 소유하면서 하나님께 점점 나아갔지만, 롯은 재물이 그를 소유하면서 하나님께 점점 멀어지게 했습니다.

아브람의 선택 기준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롯의 선택 기준은 현실적인 유익입니다.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에 아브람을 움직이게 한 것은 하나님이었지만, 롯을 움직이게 한 것은 재물이었습니다.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13)이라는 사실은 롯의 선택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롯은 사악한 자들과 구별된 삶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반(反) 하나님 나라적인 분위기를 용납하고 그들의 향락주의에 동화되어 살았습니다. 아브람처럼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사악한 자들의 동류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서로 대조되는 두 선택의 결말도 살펴봅시다. 14-18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위로하시면서 마음에 손해의식이 생기지 않도록 보상하는 의미가 다분합니다. 롯은 “눈을 들어”(10) “동”쪽 땅을 보았으나(11),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눈을 들어 …동서남북”(14)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좋은 땅을 선택할 우선권을 주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눈에 “보이는 땅을 …영원히”(15)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려는 아브람의 애씀을 결코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손해를 영원히 보상해 주셨습니다. 언약의 말씀으로 힘을 얻도록 도우셨습니다. 반면에 롯의 경우는 14:12절에서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는 기사가 소개됩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사악한 자들과 지내다가 ‘모진 놈 옆에 있다 벼락 맞은 꼴’이 되었습니다.

13-16절까지에서 아브람은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14) 소수의 군사들로 대군을 습격하는 모험을 감행합니다. 그가 단지 조카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게 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자신과 후손에게 주시기로 약속되었던 땅이 유린당하는 것을 그냥 지켜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겠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아브람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16)오는 대승을 거둡니다. 17-20절은 멜기세덱이 승리한 아브람을 영접하는 장면입니다. 그가 축복하며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20)한 것도 아브람의 기습공격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람은 승리 후 세 가지 태도 역시 물질관의 모범이 될 만합니다. 첫째로 그는 전리품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줍니다.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아브람 자신이었지만 승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음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의미가 그의 십일조에 담긴 의미였습니다. 둘째로 소돔왕의 물품을 취할 수 있는 권리를 몽땅 포기했습니다(21-24). 아브람의 승리는 빅뉴스로 보도될 대승이었기 때문에 주변 지역에 그의 모든 행동 역시 파다하게 소문 날 것입니다.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전리품을 취하면, 그가 결국 조카를 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결국 돈을 위해 전쟁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는 오해 받을 행동조차 일절 하지 않기로 결심한 듯합니다. 셋째로 아브람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전리품의 포기를 다른 사람에게까지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족장인 내가 헌신했으니까 너희도 헌신하라고 하지도 않았고, 좀 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명목으로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제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말로만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재물에 대한 태도 역시 진심으로 그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지극히 높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욕망이나 시대의 욕망에 동화되지 않고,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하든 자신은 하나님 백성답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했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